‘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표준’.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짧은 시간에 인간 세계를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인류의 생활양식은 예전과 똑같은 궤도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이른바 ‘코로나 뉴노멀’ 시대의 개막이다. 무엇보다 인간과 인간의 물리적 접촉은 더 이상 무조건적인 덕목이 아니게 됐다. ‘접촉 축소’라는 시대적 요구는 자동차와 비행기의 이동을 줄게 해 의도치 않은 맑은 하늘과 깨끗한 공기를 안겨줬다. 화석 연료로 지탱하는 지금의 에너지 구조는 더 이상 ‘이대로’를 외칠 수 없는 영역으로 이동하는 중이다. ‘작은 정부론’에 시달리던 국가는 영역을 확장해나갈 태세다. 코로나19 대응에 미숙함을 드러낸 미국과 중국, 두 국가는 국제적인 지도력을 잃었다. 지(G)2 시대가 저물고 지(G)0 시대가 열렸다. 새롭게 모습을 드러내는 ‘코로나 뉴노멀’이 정의와 평등의 얼굴을 갖게 하기 위해 세계시민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_편집자주
미국의 전 노동부 장관이던 로버트 라이시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학 공공정책대학원 교수는 4월26일 영국 일간지 <가디언>에 한 기고에서 코로나19 이후 계급이 4개로 분화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위험을 무릅쓰고 계속 일해야 하는 의료진·경찰·배달노동자 등 필수 노동자(The Essentials), 일자리를 잃게 된 노동자(The Unpaid), 사회안전망에서 배제된 잊힌 사람(The Forgotten), 그리고 원격 노동자(The Remotes)다. 라이시 교수는 4개 계급 가운데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원격 노동자 비중을 전체의 35%로 추산했다. 전문직·관리직·기술직 노동자로 정보통신기술을 통해 랩톱(작고 가벼운 컴퓨터)으로 일할 수 있고, 코로나19 감염 위험도 상대적으로 작다.
코로나19에 따른 ‘사회적 거리 두기’로 원격근무가 주목받았다. 감염병이 발생해도 회사가 정상적으로 운영되기를 원하는 경영진의 필요와, 일터와 통근길에서 안전 확보를 원하는 노동자의 요구가 맞아떨어진 결과다. 한국에서도 서울 구로 콜센터 사례처럼 일터에서 집단감염이 일어나고, 확진자가 생긴 회사는 폐쇄돼 그 필요성이 증명됐다. 라이시 교수는 ‘원격 노동자’를 35%로 추정했지만, 정보통신기술의 도움으로 일하는 방식과 도구가 달라진다면 그 비중은 더 커질 수 있다. 다만 원격근무가 자리매김하는 건 노사 모두에 만만한 과제가 아니다. 회사 쪽에선 운영 효율성을 유지해야 하고, 노동자 쪽에선 포기하는 권리가 없어야 한다.
기업 처지에서 원격근무의 가장 큰 장점은 운영비 절감이다. 코로나19 이후 원격근무가 늘어남에 따라 기업에서는 회의비·출장비·연장근로수당 등의 지출이 줄었다. 최근 기업들은 미션별 팀 운영이나 협업을 위해 직원들에게 고정 좌석을 제공하지 않는 ‘공유형 스마트오피스’도 운영하는데, 원격근무로 공간 운영비를 더 줄일 수 있다. 최적의 업무 효율이 가능한 시간과 장소를 노동자 스스로 판단하고 비용 절감 이익은 회사가 떠안을 수 있다.
최적의 업무 효율, 이익은 회사로
원격근무가 운영 효율화에 최적화된 수단인지를 두고 평가가 엇갈린다. 대표 사례가 IBM이다. 1993년 원격근무를 공식 도입한 뒤 2009년 기준 전세계 임직원의 40%가 이를 택했다. 그러나 2017년 3월 ‘사무실 근무’로 돌아갔다. 직원들의 업무 집중이 떨어지고 소통 단절로 협업이 어렵다는 이유였다. 구글이나 애플 같은 ‘혁신기업’도 창의성과 협업을 강조하지만 원격근무를 권장하지 않았다. 2010년 말부터 한국 정부(방송통신위원회 주무)는 ‘스마트워크’라는 이름으로 원격근무를 장려했다. 당시 2015년까지 예산 1조원을 투입해 전체 노동자의 30%가 스마트워크(원격근무뿐만 아니라 시차출퇴근·유연근로제 포함)를 시행한다는 계획이었지만, 2017년 기준 원격(재택)근무제 도입률은 4.7%에 그쳤다(2017년 일·가정 양립 실태조사).
코로나19 이후는 상황이 다르다. 효율성 논란이 있음에도 원격근무는 노사가 모두 갖춰야 할 필수 ‘옵션’이 됐다.
“저는 진짜 행복했어요. 앞으로도 계속 재택근무를 했으면 좋겠네요.” 한 대기업에서 사무직으로 일하며 두 달 넘게 재택근무를 한 ‘워킹대디’ ㄱ씨의 말이다. 경기도 하남에서 서울로 출퇴근했던 그는 재택근무로 하루 3시간을 벌었다. 그 시간을 고스란히 8살, 6살 두 딸에게 투여했다. “6시(퇴근시간) 땡 치자마자 아이랑 밖에 나갔어요. 제가 재택근무를 하면서 큰딸이 두발자전거를 탈 수 있게 됐고, 농구 골대에 공도 집어넣어요. 아이랑 노는 시간이 늘어나니까 업무 집중도와 효율이 올랐어요.”
2016년 기준 서울시 직장인의 평균 출퇴근시간은 96.4분(한국교통연구원 조사)에 이른다. 노동자에게 출퇴근 스트레스는 그만큼 컸다. 여기다 대중교통에서 전염병에 감염될 수 있다는 스트레스도 사라지고 ‘꾸밈노동’에 필요한 시간도 줄었다. 10년차 여성 사무직 노동자 ㄴ씨는 “출근 준비를 안 해도 되고 ‘지옥철’ 안 타도 되는 게 (재택근무의) 큰 장점”이라고 말했다.
장점만 있는 건 아니다. 대면 업무가 잦은 대기업 노동자 ㄷ씨는 재택근무가 끝날 즈음 대상포진에 걸렸다. “아이를 돌보면서 일하려니 정신적 스트레스가 꽤 심하더라고요. 사무실에서 일할 때보다 서면·문자 보고를 수시로 해야 하고, 상사가 메신저로 말을 걸었는데 늦게 대답하면 노는 것 같으니까 휴대전화를 계속 붙잡고 있었어요.”
ㄴ씨의 경험도 크게 다르지 않다. “계속 전자우편 보내고 카톡 하면서, 점심시간도 없이 일한 것 같아요. 컴퓨터 마우스를 한동안 움직이지 않으면 사내 메신저가 ‘자리비움’으로 변경되는데, 사무실에선 전혀 신경 쓰지 않았지만 집에서 일하니 신경 쓰이더군요. 회사(생활)가 재밌다고 생각해왔는데, 종일 얘기할 사람도 없이 혼자 노트북만 들여다보니 힘들더라고요.”
건강권 침해, 성과주의 강화로 기울 수도
“출근 안 해서 좋은데 퇴근한 것 같지도 않다”는 말은 원격근무의 양면을 그대로 드러낸다. 노동시간은 “사용자의 지휘·감독 아래 근로를 제공한 시간”을 말하는데, 원격근무는 이 노동시간의 경계를 허물어뜨린다. 이 때문에 독일은 2016년부터 정부 주도 아래 노사가 함께 원격근무로 인한 법체계·제도 개선 방안을 논의했고, 그 결과를 <노동 4.0 백서>에 담았다. 노·사·정이 정한 핵심 목표는 노동시간과 장소를 유연하게 하되, 노동자가 결정할 수 있는 ‘주권’이 보장돼야 한다는 것이다.
“취업자는 일과 삶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상황과 과도한 요구로부터 보호받아야 한다. 더 많은 노동시간 선택지를 제공함으로써 노동시간과 공간 주권이 확대돼야 한다. 사회적 파트너십에 근거한 유연성에 관한 합의를 도출하기 위해 새로운 인센티브를 마련해 혁신적 노동조직을 위한 새로운 타협을 이끌어내고 사업장 차원에서 이를 다룰 수 있도록 더 많은 여지를 제공해야 한다.”
독일 <노동 4.0 백서>는 특히 재택근무의 건강권 침해 우려를 제기한다. “재택근무 때 노동시간과 여가시간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이는 건강에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김기선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이 설명한다. “재택(원격)근무는 사용자가 ‘사업장’(근무장소)을 노동자 개인에게 미뤄놓은 것이어서 안전보건에 대한 책임 부분이 사라지게 된다. 집에서 일하다 산업재해를 당할 경우 업무상 재해에 관한 인과관계를 인정하기 어려운 상황이 올 수 있다.”
원격근무는 성과주의를 강화할 가능성도 크다. 통상 기업들은 원격근무를 하는 노동자에게 추가 의무를 부과한다. 같은 공간에서 일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구체적인 하루 업무 목표와 수행 실적 등을 입증하라는 것이다. 대기업 인사담당자 ㄹ씨는 “같이 일할 때는 개인의 성과가 비교적 명확하게 나타나지 않았지만, 원격근무 상황에선 한명 한명 성과가 눈에 보인다. 이를 부담으로 느끼는 직원도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성과주의 문제는 평가 척도의 공정성과 맞닿아 있다. 스타트업 인사담당자 ㅁ씨는 “개인이 하루 동안 할 업무를 미리 공유하고 퇴근할 때 실적을 공유하는 방식으로 원격근무를 운영한다. 개발자들은 어디부터 어디까지 프로그램을 짰다는 명확한 실적이 나오는데, 일반 사무직은 그렇지 못해 고민이 많다”고 했다.
유연하지만 자기결정권이 있는 노동시간이란
일하는 시간과 장소의 극단적 유연화는 자칫 노동자에게 ‘노동자성’을 벗어던지도록 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노동자에게 재량을 대폭 부여하는 대신 ‘일의 완성’을 기준으로 보수를 지급하는 고용형태를 불러오는 것이다. 한국에서 1998년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이후 특수고용노동자가 늘고, 미국과 유럽에서 2008년 금융위기 이후 플랫폼노동자가 급증했던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일하고 싶을 때 일하고, 쉬고 싶을 때 쉰다’는 언명은 플랫폼기업들이 내세우는 플랫폼노동의 장점이기도 하다.
독일 <노동 4.0 백서>의 ‘유연하지만 자기결정권이 있는 노동시간’ 챕터는 이렇게 마무리된다.
“디지털화는 자기결정권이 더 큰 노동세계 4.0으로 향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 과정에서 충돌하는 이해관계와 목표 사이의 균형을 찾아야 한다. 일과 삶의 경계가 사라지는 상황과 과도한 요구에 대해 법적 보호를 제공하는 게 근본적으로 중요하다. 근로시간의 형태는 기업의 인사정책, 성과평가 기준, 경영문화와 분리할 수 없다. 또한 신기술은 시공간적으로 유연한 노동을 실현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 따라서 산업 또는 사업장 차원의 혁신적인 시도가 개발돼야 하고, 필요하다면 그것을 실험해야 한다.” 코로나19가 의도치 않게 우리 사회에 실험의 장을 마련해준 셈이다.
박태우 기자 eh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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