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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전환

등록 2017-12-05 17:11 수정 2020-05-03 04:28
일러스트레이션/ 이우만

일러스트레이션/ 이우만

11월25일부터 이틀 동안 서울 성수동에서 ‘리워크’(RE:WORK)라는 이름의 콘퍼런스가 열렸다. ‘일에 대한’ 콘퍼런스라고 할 수 있을 이 행사에는 “전환, 실험, 노동”이라는 구호가 붙었다. 다양한 방식으로 일을 구성하고 실험하는 사람 34명이 연사로 초대되어 이틀을 빼곡하게 채웠다. 일의 내용은 제각각이었지만, 모두 전통적인 직업의 규정에 얽매이지 않은 채 일을 조직하거나, 그렇게 일하는 사람들을 위한 온라인 플랫폼이나 물리적 공간을 설계하고 운영하는 사람들이었다.

엄밀한 계획은 없었다

어떤 콘퍼런스보다 연사 구성이 다양했다. 연령대로는 20대 중반부터 50대 초반을 아울렀고, 고용 형태로는 스타트업(신생혁신기업)의 창업자나 종사자, 대기업이나 중소 규모 기업 종사자, 프리랜서뿐 아니라 ‘엔(N)잡러’(두 개 이상의 직업이나 소속을 가진 사람)와 디지털 노마드까지 포함됐다. 업종으로는 IT(정보통신), 미디어 콘텐츠, 건축업, 컨설팅업과 투자업, 기존 분류법에 따라 이름 붙이기 어려운 업종까지 다양하게 포진됐다.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며 일하려는 사람에게 열려 있는 코워킹 스페이스 ‘카우앤독’(CoW and DoG, ‘함께 일하고 좋은 일을 하자’를 줄인 말)과 경력 단절 여성을 소셜벤처(공공의 이익을 추구하는 벤처기업)나 스타트업, 사회적기업 등과 연결해주는 위커넥트(WeConnect)가 이 행사를 공동 주관했다. 행사의 기획과 주관단체의 성격이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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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행사에 ‘어쩌다 전환의 기술’ 세션에 연사로 초대받았다. 나 말고도 두 사람이 함께 마이크를 잡았다. 18년의 기자 생활 뒤, 6년간 비영리단체에서 권리 옹호와 사업 운영 업무를 하다가, 지금은 논픽션 작가이자 여러 비영리단체와 연결되어 일하는 김희경 작가, 전략 컨설팅과 HR 컨설팅 분야에서 일하다가 지금은 ‘씨프로그램’(C Program)이라는 벤처 기부펀드를 이끌고 있는 엄윤미 대표였다. 우리 모두 ‘이직’(移職)이란 말로 담기 어려운 전환을 한 차례 이상 감행한 사람들이었다.

세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세 연사는 우리의 전환이 엄밀한 계획에 따라 이뤄진 것이라기보다는 생각지 못했던 가능성과 만나는 바람에 ‘어쩌다’ 이뤄진 것이라고 말했다. 때로는 자의로, 많은 경우 타의로 거치게 되는 전환이 미리 계획한 경로를 밟아 차근차근 진행되는 경우는 드물다. 전환의 욕구나 필요가 닥쳤을 때, 대부분이 일정 기간 ‘방황기’를 겪으며, 그 방황기에 우연히 만난 사람들과 기회가 전환의 경로를 제시한다.

존재하지만 아직 발견하지 못한 최적의 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경로 안에 담기는 경험과 관계망 안에서 선호와 기준에 따라 하나의 답을 만들어가는 것이 ‘어쩌다 전환의 기술’이라 할 수 있다. 이 기술에는 우연성에 열려 있는 방식으로 일과 관계를 조직하는 삶의 태도와 구체적 지침들이 포함된다.

이런 이야기는 리워크 콘퍼런스의 다른 많은 세션과도 연결됐다. 다양한 시도를 거듭하며 ‘우연히’ 다음 단계를 발견할 가능성에 열려 있는 것, 그 과정에서 자신에게 알맞은 것을 ‘스스로’ 판단하고 찾아가는 것. 어쩌면 이런 이야기는 유동성이 불가피한 현실에 맞춰 진화한 자기계발의 복음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다. 이런 삶의 방식이 이틀에 걸쳐 논의되는 가운데, 기본소득을 주제로 다루는 세션이 리워크 콘퍼런스 안에 자리잡고 있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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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한의 필요조건

우연성과 자율을 권하는 목소리가 현실에 맞춰 업데이트된 자기계발과 다른 것이 되려면, 사회안전망에 대한 논의가 함께 이뤄져야 한다. 일과 삶의 기획이 달라지려면, 사회안전망 역시 이제껏 당연시 전제된 노동의 문법, 가족주의의 문법을 넘어서야 한다. 누구에게나 조건 없이, 최소한의 안전망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다면 이 모든 우연성과 자율에 대한 이야기는 그래도 형편이 좀 나은 사람들의 한가로운 이야기라고 해도 할 말이 없기 때문이다.

제현주 일상기술연구소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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