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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요한 기록자로 남겠다

정은주 기자에게 듣는 세월호 보도와 기자의 ‘쓸모’… “기억하고 기록하다보면 ‘나 괜찮은데’ 느끼는 마약 같은 순간도 온다”
등록 2015-07-22 04:48 수정 2020-05-03 04:28

800km, 38일. 지난해 여름의 일이다. 세월호 참사로 자식을 잃은 두 아버지와 누나가 무게 6kg의 나무 십자가를 짊어지고 걸었다. 수많은 언론이 출발 상황만 취재하고 현장을 떠날 때 은 유일하게 남아 전 여정을 함께했다. 정은주 기자는 이들의 ‘로드매니저’를 자처하며 21일을 함께 걸었다(제1021호 표지이야기 ‘길 위에서, 기로에서’ 참조).
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올해 정 기자는 3테라바이트에 이르는 세월호 수사·조사 기록을 단독 입수해 헬기 511호기 첫 현장 보고 삭제 확인(제1057호 표지이야기 ‘헬기 511호기 첫 보고 삭제 단독 확인’ 참조), 123정·상황실 휴대전화 통화 내역 첫 확인(제1058호 표지이야기 ‘운명의 40분 해경은 적어도 4차례 현장 보고를 무시했다’ 참조) 등을 보도했다.

7월14일 오전  회의실에서 정은주 기자(맨 오른쪽)가 교육연수생 5명과 세월호 보도 뒷이야기를 나눴다. 정은주 기자 왼쪽부터 교육연수생 홍연, 이선민, 이지민, 강남규, 김가윤씨. 박승화 기자

7월14일 오전 회의실에서 정은주 기자(맨 오른쪽)가 교육연수생 5명과 세월호 보도 뒷이야기를 나눴다. 정은주 기자 왼쪽부터 교육연수생 홍연, 이선민, 이지민, 강남규, 김가윤씨. 박승화 기자

아웃사이더는 기자의 숙명

묵직한 사실이 담긴 보도 뒷면에는 고된 이야기들이 따라붙었다. 그래도 정 기자는 기록자로서 기자의 쓸모를 다하기 위해 세월호 추적 보도를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가 교육연수생들과 나눈 보도 뒷이야기를 질의응답 형식으로 옮긴다.

이선민(이하 선) 에서 세월호 보도는 정 기자가 전담하다시피 한다.

정은주(이하 정) 계기는 지난해 도보순례다. 길치인 내가 졸지에 길잡이가 됐다. 페이스북으로 중계를 하면서 코디네이터 역할도 맡게 됐는데, 도저히 그분들만 두고 서울로 돌아올 수가 없었다. 그때부터 신뢰 관계를 쌓은 셈이다.

김가윤(이하 김) 세월호 피해자 가족들과 긴 시간 동행 취재를 했는데, 기사와 관련한 동영상을 보니까 울먹거리기도 하더라. 기자는 공감 능력을 갖추더라도 보도에서 감정을 배제해야 한다고 배웠다. 경계를 어떻게 유지하며 기사를 쓰는가.

기본적으로 기자는 기록자고 증언자다. 기자로 사는 것 중 가장 어려운 게 외로움인데, 모든 사람에게 아웃사이더여야 하기 때문이다. 숙명이다. 그걸 놓치는 순간 독자에게 신뢰를 잃는다. 울컥할 때는 같이 울컥한다. 하지만 기록할 때는 기록자의 역할을 한다. 거리를 두지 않고 취재원한테 동화되는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사라진다.

123정·상황실 휴대전화 통화 내역을 처음으로 확인해서 쓴 제1058호 ‘운명의 9시04~44분 해경은 최소 4차례 현장 보고 무시했다’ 보도가 더 빨리 나왔으면 좋았을 거라 생각했다. 사람들의 관심이 세월호에 집중돼 있을 때.

사건이 터지면 당시에는 자료를 다 감춘다. 세월호의 경우 해경이 당사자여서 더욱 기록을 바깥으로 공개하지 않았다. 재판은 공개다. 그 안에서 이야기가 나올 수 있다. 그런데 언론은 사건이 터졌을 때만 붙는다. 그때 나온 사실 몇 개만으로 기사를 써낸다. 검찰이 수사 결과를 발표할 때 가장 크게 쓴다. 그리고 접는다. 공판이 하루에 12~14시간씩 이어지는데, 사건의 실체를 잘 모르면 듣기가 어렵다. 그래도 계속 좇는 게 기록자의 태도라고 생각한다. (보도 시점이 사건 발생) 1년 뒤면 어떻고 2년 뒤면 어떤가. 10~20년 뒤에 봤을 때, 언론에 보도된 것과 보도되지 않은 것은 큰 차이가 있다. 올해 세월호 보도는 에서 쓰지 않았으면 영원히 알려지지 않았을 수도 있다.

홍연(이하 홍) 수사·조사 자료의 양도 무척 많다고 했다. 기사 쓰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어떻게 포인트를 잡아서 쓰나.

이걸 보여주려고 가져왔다. (그는 세월호 참사와 관련된 정부기관, 인물이 어떤 행동과 말을 했는지 시간순으로 스프레드시트를 통해 정리한 내용을 펼쳐 보였다.) 사건 관계자가 누구에게 조사받고 감사받았는지, 사고 발생 당시 교신은 어떻게 했는지 등을 주제별로 나눠서 정리한 거다. 이렇게 정리하다보면 이 기록과 저 기록이 다르다는 걸 발견할 수 있다. 정리와 분석은 머리 좋은 사람이 하는 게 아니라 엉덩이가 무거운 사람이 하는 거다. 하면서 의문점이 무언지, 추가로 어떤 것을 취재할지 눈에 띄는 게 있으면 기사를 쓴다.

정리와 분석은 엉덩이가 무거운 사람이

이지민(이하 이) 세월호 참사 당시 ‘기레기’ 비판이 있었다. 어떤 기자는 자신의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 “진실에 근접하기 위해 현장에 있는 사람에게 하나라도 더 묻는 게 옳다”고 썼더라. 취재가 급박한데 당사자에게 질문이 상처가 될 수 있다면 어느 정도까지 물어야 하는지 궁금하다.

나도 기레기일 때가 많다. 중요한 두 기억이 있다. 과거 수습기자 때 경남 김해에서 일어난 비행기 추락 사고를 취재하면서 중환자실에 있는 기장을 인터뷰해야 했다. 스스로에게 굉장한 상처로 남았다. 또 한 번은 자살한 고등학생이 학교에서 어떻게 생활했는지 알아오라는 (데스크의) 지시가 있었다. 학교에 갔다. 교감에게 아이 얘기를 들었다. 학생들도 만나고 싶다고 했는데 안 된다고 했다. 교감실을 나와 자살한 아이 반으로 가서 사촌언니라고 거짓말을 하고 얘기를 들었다. 그런데 그 광경을 본 교감이 달려와서 도망을 갔다. 이런 기억들이 기자 생활을 하면서 ‘도대체 뭐가 중요한가?’를 묻게 했다. 내가 아니면 세상에 나오지 않을 기사와 이야기에 더 관심을 두겠다고 마음먹었다. ‘취재원이 나라면 어떨까. 그럼 내가 이런 선택을 할까’ 하는 생각을 하려고 한다.

빨리 취재하고 판단해야 하는 기자 일을 하다보면 타인에게 무례한 경우가 있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최소한 스스로가 무례하다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세월호 참사 직후 진도체육관에 가서 아무도 인터뷰하지 않고 돌아왔다. 현장의 공기만 맡았다. 르포를 써야 했다면, 굳이 ‘심정이 어떠냐’고 묻지 않고 그냥 옆에 앉아 있을 것 같다. 현장을 지키고 예민하게 관찰해서 쓰면 되지 않을까. 굳이 가슴 후비는 말을 해야 할까. 그렇게 후벼서 나오는 말이 진심일까.

보도를 보면 피해자 가족들이 친밀한 사이에서만 할 수 있는 얘기를 하더라. 좋은 질문을 잘해야 가능한 건지, 대화를 나누다 자연스럽게 나오는 얘기인지 궁금했다.

관찰이다. 그분들은 그런 말을 수없이 한다. 다만 언론이 듣지 않는 것뿐이다. 그냥 스친다. 기자의 가장 큰 덕목은 관찰력이라고 생각한다. 취재원을 집중해서 잘 관찰하고 잘 듣는 일이 중요하다.

강남규 취재원과 신뢰는 어떻게 쌓나.

일단 기사다. 기자가 과거에 어떤 기사를 어떻게 썼느냐를 통해 신뢰를 얻는다. 과거 내 기사를 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면, 설득을 잘해야 한다. 이 사람과 일하고 싶다고 생각하도록 만드는 거다.

“그렇게 후벼서 나오는 말이 진심일까”

세월호 보도에서 오보가 많았다. 정부 발표도 현장도 취재원도 늘 의심해야 하겠더라.

기자 일이 너무 어렵다. 다만 나는 몇 가지 원칙을 갖고 지키려 노력한다. 첫째, 나한테 기사는 일이지만 취재원한테는 인생이다. 그래서 일과 인생이 맞부딪칠 때는 인생이 먼저다. 둘, 언론의 역할은 권력에 대한 견제와 감시다. 그래서 어떤 선택을 할 때는 권력 감시인가를 생각한다. 셋, 마음이 아니라 몸이 힘든 일을 선택한다. 이 정도의 원칙을 갖고 아등바등하는 것 같다. 그럼에도 엄청난 실수들을 한다. 어렵다. 그냥 이 길을 걷지 마라. (일동 웃음) 나는 왜 하느냐. 좋아서 한다. 짝사랑이다. 못하는 사람임에도 조금이라도 더 낫게 하고 싶은 욕심을 채워나가는 것뿐이다. 하다가 2~3년에 한 번씩 마약을 한 것 같은 순간이 온다. ‘나 괜찮은데?’ 하는 순간이 정말 가끔 온다. 그것 때문에 한다.

어떤 순간이었는가.

‘이 세상에 내가 쓸모가 있구나’라고 느낄 때다. 충남 태안 기름 유출 사건을 취재할 때도 그랬다. 당시 우리 어민들의 피해 입증이 어려웠다. 비슷한 일이 터지면 보상 문제에서 어려움이 반복될 것 같았다. 한국언론재단 후원을 받아서 지난 10년간 IOPC(국제유류오염보상기금)가 어떻게 대처했는지를 5회 시리즈로 썼다. 스페인, 일본, 프랑스, 영국을 취재했다. 그때 처음 국제적으로 어떻게 배·보상을 받는지, 가해 기업은 어떤 책임을 지는지를 자세히 알렸다. 기사 덕에 우리 정부가 국제기구에 가서 협상력을 높이고, 관련 법을 만드는 데도 도움이 됐다.

세월호 때도 일본은 진상조사와 배·보상을 어떻게 하는지를 취재했는데,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같이 가서 만나보고 느껴보자고 제안했다. 태안 기름 유출 사건 때 어민 피해자들이 해외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으면 더 좋겠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동행했던 유가족 부부가 너무나 큰 용기를 얻고 돌아왔다고 했다(제1041호 특집 ‘함께 아파하고 함께 길을 찾고’ 참조).

인터넷 댓글 같은 걸 보면 “세월호 참사 원인은 다 밝혀졌는데 뭘 더 밝히냐”고 하는 사람도 있다.

일과 인생이 부딪칠 때는 인생이 먼저

검찰과 경찰이 참사 한 달 만에 선원의 조타 실수, 화물 과적 등을 사고 원인으로 꼽는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그런데 (경찰이 지목한) 사고 원인들이 항소심에서 다 깨졌다(제1063호 특집 “세월호 침몰 원인: 알 수 없음” 참조). 이런 내용을 언론이 제대로 알리지 않고 앞선 정부 발표만 믿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나라는 그런 면에서 권력자들에게 쉬운 나라다. 집요하게 기억하려는 사람이 많지 않다. 떠들썩한 순간만 넘기면 된다.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도 기록이 없다. 지금 내가 (세월호 참사) 기록을 해두면 언젠가 조금이라도 쓸모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기자가 대단한 직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정의를 구현한다는 건 불가능하고 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다만 집요하게 기록하다보면 결과적으로 그런 일을 할 수도 있다. 기록 중에는 물론 그런 결과에 대한 욕심이 없어야 한다.

정 기자는 여전히 10만 쪽에 이르는 세월호 수사·조사 자료와 부대끼고 있다. “커밍 순! 앞으로도 뭔가 (새로운 사실들이) 나올 거다. 혹시 안 나올 수도 있겠지만. (웃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료들을 다 보고 정리한 사람이 있다는 게 중요한 거 같다. 나중에 몇십 년이 지나도 관심 있는 누구나 자료를 다시 볼 수 있게 만드는 게 목표다.”

이지민 교육연수생 aaaa346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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