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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고시’ 아니어도 괜찮아

언론사 신입 공채 준비하던 ‘취준생’ 5년차 청년 언론인의 대안언론 합류기
등록 2017-02-01 21:02 수정 2020-05-03 04:28
저널리즘스쿨 졸업과 동시에 A언론사 인턴을 시작했다. 이미 언론사 인턴을 세 번이나 했지만, 이력서 빈칸이 무서웠다. 지난해 4·13 총선 때 A언론사 인턴기자 신분으로 취재 중인 모습(앞줄 오른쪽 두 번째). 김다솜 제공

저널리즘스쿨 졸업과 동시에 A언론사 인턴을 시작했다. 이미 언론사 인턴을 세 번이나 했지만, 이력서 빈칸이 무서웠다. 지난해 4·13 총선 때 A언론사 인턴기자 신분으로 취재 중인 모습(앞줄 오른쪽 두 번째). 김다솜 제공

밖에는 새하얀 함박눈이 쌓이고 있었다. 스무 명 넘는 사람들이 좁은 틈을 비집고 앉았다. 동기 한 명이 막걸리잔을 들고 일어났다.

“졸업 전에 취직돼서 다행이라 생각해요. 아직 (취직이) 안 된 동기들은 더 좋은 곳으로 갈 거예요.”

막걸리를 끝까지 들이켰다. 나는 아직 취직이 안 된 동기 중 한 명이었다. 지난해 2월, 세명대 저널리즘스쿨을 졸업했다. 언론인 지망생들을 위한 특수 대학원이다. 여기서 가장 부러운 일은 ‘언론사 취업’이다. 막걸리잔을 내려놓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기자가 될 수 있을까.’

‘기레기’ 되지 않겠다는 약속

2014년 4월16일 오전 9시, 1교시 수업 준비로 강의실이 분주했다. 여기저기서 휴대전화 알림음이 울렸다. 전남 진도 앞바다에서 배가 침몰했다는 속보였다. 전부 구조됐다는 얘기에 별 생각 없이 수업을 들었다. 오보였다. 이후 신문 지면에 ‘기레기’(기자+쓰레기)라는 말이 오래 머물렀다.

우리 학교는 실습을 위해 대안언론 를 운영하고 있었다. 세월호 사태가 터지자 취재를 자원하는 사람이 많았다. 내 룸메이트도 팽목항으로 떠났다. 2박3일 만에 돌아온 동기는 내가 알던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야, 너 기레기 되면 내 손에 죽어!”

평소 술을 가까이하지 않는 사람이 고주망태가 됐다. 그는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내 멱살을 잡고 늘어졌다. 힘겹게 둘러업고 기숙사로 들어갔다. 침대에 눕혔지만, 술주정은 끝나지 않았다. 검지를 들어 나를 가리켰다.

“바람막이만 입고 다녀도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더라. 너도 기레기 되는 거 아니야?”

“그럴 일 절대 없다. 약속할게, 약속한다.”

베갯잇이 다 젖어 있었다. 침대 머리맡에 무릎 꿇고 앉아서 한참을 달랬다. 동기의 손가락에 새끼손가락을 끼워넣었다. 기레기가 안 되겠다는 약속이었다. 그는 열 번도 넘게 내 다짐을 받아낸 뒤에야 잠이 들었다.

대학원 졸업을 한 학기 앞둔 시점에는 기레기라도 되고 싶은 심정이었다. 학교는 전쟁터였다. 첫 학기랑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동기들은 몇백 개의 시사용어가 적힌 종이 뭉치를 들고 유령처럼 돌아다녔다. 빈 강의실에선 모의면접이 한창이었다. 나도 면접 준비에 바빴다.

일대일 면접. 예상치 못한 질문이 나왔다. 소화할 수 없는 밥을 넘기듯 꾸역꾸역 답했다. 면접관의 눈빛은 내 속마음을 꿰뚫는 듯했다. “너, 솔직히 자신 없지?”라고 말이다. 갈수록 말이 흐려졌다. 면접관 얼굴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면접을 망쳤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며칠 뒤, 그 회사로부터 문자 하나를 받았다.

‘저희와 함께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나는 이 전쟁에서 졌다. 5년 동안 언론고시를 준비했다. 운 좋게 5번 최종 면접까지 갔지만, 떨어졌다. 언론고시는 대개 4차 전형으로 요약된다. ‘서류 전형-필기 전형-실무 전형-면접’. 전형에만 몰두하다보면 왜 기자가 되고 싶었는지, 어떤 기자가 되고 싶은지는 잊게 된다.

기약 없는 기다림만 남는다. 언론사들은 인턴 제도를 이용해 인력난을 극복한다. 공채 가뭄은 극심해진다. 공영방송 MBC마저 2014년부터 정규직 신입사원을 뽑지 않았다. 매년 공채를 하는 회사는 드물었다. 막내가 5년차 기자인 언론사도 있었다. 언제 전쟁이 날지 모르고, 그 전쟁에서 이긴다는 보장도 없었다.

나까지 취재할 필요가 있을까
2016년 2월 세명대 저널리즘스쿨을 졸업했다(맨오른쪽). 김다솜 제공

2016년 2월 세명대 저널리즘스쿨을 졸업했다(맨오른쪽). 김다솜 제공

취업 시장에서 졸업 예정자 신분은 중요하다. 무직과 학생의 차이는 크다. 졸업 유예까지 신청하면서 학생 신분을 유지하려 한다. 무직이 되면 공백 기간을 증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미 언론사 인턴을 세 번이나 했지만, 이력서 빈칸이 무서웠다. 결국, 대학원 졸업과 동시에 A언론사 인턴을 시작했다.

4월 총선으로 회사가 바쁘게 돌아갔다. 나는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르포 기사를 쓰게 됐다. 총선에 출마한 후보들의 일정을 쫓아다녔다. 취재 차량을 타는 게 무서울 정도였다. 몸이 심하게 젖힌다 싶어 계기판을 보면 엄청난 속도로 도로 위를 달리고 있었다.

“기사 잘 봤다. 조회 수도 잘 나왔더라? 수고했어.”

선배 기자의 칭찬을 들으면 밥을 안 먹어도 배가 불렀다. 몸은 그렇지 않았다. 2주 만에 4kg이 빠져 있었다. 밥은 사치였다. 조급했다. 밥 먹으면서 취재 내용을 정리했다. 그때 내 주머니에는 늘 소화제가 있었다. 끼니를 거르는 일도 잦았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뛰어다니는 날이 계속됐다. 저 멀리서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손을 흔드는 게 보였다. 몸을 웅크리고 인파를 헤쳐나갔다. 카메라 앵글에 부딪히고, 사람들 팔꿈치에 찍혔다. 장애물이 많았다. 가까스로 문 전 대표의 오른쪽에 붙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면서 시민들과 악수를 나눴다. 문 전 대표가 좁디좁은 재래시장 길목으로 들어가는 순간, 내 표정과 몸은 동시에 구겨졌다.

“앞에! 앞에!”

카메라 기자들이 나를 향해 거칠게 소리 질렀다. 카메라 앵글 앞에서 떨어지란 뜻이다. 화면에 내가 안 잡히도록 비켜섰다. 문 전 대표가 어묵 꼬치 하나를 집어들고 아주 천천히 입안으로 넣었다. 카메라 플래시가 여기저기서 터졌다. 눈이 저절로 감겼다.

1시간 뒤, 문재인 전 대표가 어묵 먹는 사진이 포털 사이트를 장식했다. 똑같은 내용의 기사가 여러 개였다. 우리나라에는 중계식 보도를 하는 기자가 너무 많았다. 나까지 취재할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회의감이 정점에 달한 건 총선 개표날이었다. 선배 기자가 당선자 인터뷰를 방송으로 내보내면 그 내용을 기사로 옮겨 썼다. 그날 하루, 내 이름으로 기사 10개가 나갔다. 기자보다 스크립터에 가까웠다. 로봇 저널리즘의 도래가 가까워 보였다. 모든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현직 기자들도 그들만의 고충이 있었다. 일요일에도 A선배의 목에는 기자증이 걸려 있었다. 선배는 조용히 맥주만 마셨다. 이마에 손을 짚고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얼굴 보니 무슨 일 있네. 뭐예요? 말해봐요.”

“아니야, 무슨 일은….”

계속 캐물었다. 한숨 반, 욕 반. 선배는 거침없이 쏟아냈다. 쓰고 싶은 기사가 있는데 회사에서 반대한다고 했다. 겨우 기사를 쓰게 됐지만, 취재 기간이 충분하지 않았다. 겉핥기에서 끝날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우리는 500cc 맥주잔에 맺힌 물기만 바라봤다. 갈증이 일었다.

언론사에서 속보, 단독 경쟁은 여전하다. 깊이 있는 취재는 어렵다. 심층·탐사 보도는 긴 시간을 들여야 성과가 나온다. 인력난, 광고 등의 이유로 저지당하기 쉽다. 언론사 인력 개편만 봐도 그랬다. 늘 기획취재팀, 탐사보도팀이 가장 먼저 흔들렸다.

스스로를 위해 일하라
진실탐사그룹 <셜록>은 피플펀딩 오픈 3주 만에 후원자 196명을 모았다. 피플펀딩 화면 갈무리

진실탐사그룹 <셜록>은 피플펀딩 오픈 3주 만에 후원자 196명을 모았다. 피플펀딩 화면 갈무리

대학원 동기 27명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10명은 정규직 기자가 됐다. 5명은 언론사, 프로덕션 등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한다. 5명은 언론과 전혀 관계없는 일을 한다. 5명은 무직 상태다. 2명은 언론사 입사 준비를 포기했다.

‘언론고시’를 포기한 한 명은 지난해 9월부터 뉴미디어 창간에 뛰어들었다. 그는 이른바 ‘SKY’ 가운데 어느 대학의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했고, 나이가 어렸다. 취업하기에 괜찮은 조건을 가졌다. 그런 동기가 험난한 길을 걷겠다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얼마 전에야 이유를 알게 됐다.

“기성 언론은 시민들을 계도의 대상으로만 보잖아. 정작 언론은 대다수 시민들의 언어로 만든 뉴스를 내놓진 않으면서 말이야. 언론이 보는 세상이 좁다고 생각해. 단순히 언론고시가 힘들어서 시험을 안 보는 게 아니야.”

납득이 갔다. 그는 신문과 방송을 보지 않는 80% 시민을 위한 뉴스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는 사회 현안을 영상으로 재치 있게 풀어내는 매체였다. 아직 수익 구조가 제대로 잡히지 않았지만, 곧 좋은 소식이 들릴 거라 믿고 있다.

나머지 한 명은 나다. 나는 지난해까지 인턴기자로 일하다가 고민 끝에 언론고시 포기를 선언했다. 대신 1월부터 진실탐사그룹 에 합류하게 됐다. 10년을 근무한 를 퇴사하고 프리랜서로 활동하는 박상규 기자가 주도하는 프로젝트다. 그의 사직서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저는 사대문 안에는 없는, 있어도 잘 보이지 않는 이야기를 찾아, 사대문 밖으로 나가겠습니다.’

같은 생각이었다. 그렇게 새 출발을 하게 됐다. 은 뉴미디어가 아니다. 심층·탐사 보도, 르포를 통해 언론 본연의 임무로 되돌아가려는 시도다. 우리는 카카오 피플펀딩에 계획을 밝히고 정기 후원을 받았다. 3주 만에 196명의 후원자가 모였다(2016년 1월19일 기준).

입사 첫날, 일어나자마자 박상규 기자에게 카톡을 보냈다.

“선배, 뭐부터 하면 돼요?”

“의 방침은 회사보다는 기자를 키우는 거야. 회사가 아닌 스스로를 위해 일해야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읽고 있던 책을 펼쳤다가 다시 닫았다. 다른 일에 집중할 수 없었다. 이렇게 해서 회사가 굴러간다고? 너무 이상적인 것 같았다. 며칠 뒤, 선배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이런 글이 올라왔다.


1. 콘텐츠만 신경 써라. 좋은 기사는 통한다.
2. 돈 벌어오라는 소리 안 하겠다. 돈은 내가 벌어온다.
3. 네가 어디에서 뭘 하든, 신경 안 쓴다. 콘텐츠만 나오면 된다.
4. 클릭 수만 노리는 의미 없는 기사 쓰지 말라. 훗날 쪽팔려진다.
5. 웬만하면 일주일에 기사 하나만 써라. 대신 공부를 많이 해라.
6. 괜한 보고 하지 말라. 안 궁금하다. 우린 국정원이 아니다.
7. 큰일 아니면, 오전 9시 이전, 오후 6시 이후에 서로 카톡 보내지 말자.
8. 함부로 단체 카톡방 만들지 말라. 할 말 있으면 각자 끼리끼리 하라.
9. 회사 위해 일하지 말자. 좋은 저널리스트가 되도록 노력하자.
10. 최소 1년간 월급 안 밀리고 줄 수 있으니, 걱정 말고 하고 싶은 대로 해보자. 후회든, 반성이든, 조정이든 그때 하자.

이상적이라는 거, 나도 잘 안다. 하지만 현실론을 앞세워 이상을 추구하지 않기에, 우리 현실이 이 모양 이 꼴인지도 모른다. 이상을 추구해야, 생각이 현실이 된다.

이상을 현실로

1년 뒤, 나는 다시 언론고시를 준비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일은 없길 바란다. 이 ‘언론고시에 실패해도 기자가 될 수 있다’ ‘언론사 밖에서도 좋은 기자가 될 수 있다’고 말할 성공 사례가 됐으면 한다. 마지막으로 박상규 기자의 말을 곱씹어본다.

‘이상을 추구해야 생각이 현실이 된다.’

김다솜 진실탐사그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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