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매체의 위기’라는 말이 지겨워진 시대에 창간호부터 완판을 기록해온 잡지가 있다. (이하 )이 그 주인공이다. ‘iiin’은 ‘나는 지금 섬에 있다’(I’m in island now)의 영어 문장을 줄인 말이다. 2014년 봄 창간한 계간지 에는 섬의 사계절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잡지를 펼치면 제주 사람들이 소곤소곤 말을 건다.
잡지를 발행하는 곳은 콘텐츠그룹 ‘재주상회’다. 7월26일 산방산이 올려다보이는 제주 서귀포시 안덕면 사계리 재주상회 사무실에서 고선영 대표를 만났다. 여행잡지 기자이자 작가로 활동하던 고 대표는 2010년 제주로 이주했다. 오랫동안 사진기자로 활동해온 남편 김형호씨와 함께였다. 처음부터 잡지를 만들 생각은 없었다. 고 대표 부부보다 1년 앞서 제주에 터를 잡고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던 이재하·하민주 부부와 우연히 만나 친하게 지내면서 함께 잡지를 만들자는 뜻을 모았다.
기자 출신 부부의 새 도전“해외 출장을 많이 다녔는데 호텔에 가면 꼭 로컬(지역) 잡지가 있었어요. 제주에서도 ‘누군가는 만들겠지’라고 생각했는데 2013년까지 아무도 안 만들더라고요. 진지하게 제주 정착을 고민하면서 새로운 일을 하고 싶었고 생각을 하다보니 잘하는 게 잡지 만드는 일이었어요.” 고 대표가 옛일을 떠올리며 말했다. 두 부부는 대표와 발행인, 이사, 편집장을 나눠 맡았다.
이를 악물고 열심히 할 생각은 없었다. 창간과 폐간은 운명에 맡길 요량이었다. 하지만 시련이 오기를 낳았다. 고 대표는 창간준비호를 들고 2013년 한 대기업을 찾았다. 지원금을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이게 잘되겠어요? 곧 없어질 것 같은데.” 담당자의 말에 자존심이 상했다. 혼신의 힘을 다해 2014년 4월 창간호를 펴냈다. 생각보다 반응이 훨씬 좋았다. 찍어낸 1만 부 모두 팔렸다.
‘팔리는 잡지’가 된 이상 남은 것은 좋은 콘텐츠를 담는 일뿐이었다. 외고는 필요한 분야에서 가장 잘하는 사람이 쓴다. “2015년 여름호에서 제주의 별에 관한 글을 쓴 사람은 우도에 사는 한 목수 아저씨였어요. 목공을 하거나 별 사진을 찍는 분이었죠. 필자들이 전문적으로 글을 쓰는 분이 아니니 외고를 다듬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지만 취재 기사와는 전혀 다른 느낌을 얻을 수 있어요.”
시간은 오래 걸린다. 외고를 청탁해서 받는 데까지 한 달 정도 걸린다. 게다가 그 글을 수정하는 데 공력을 쏟아야 한다. 느린 작업이지만 이젠 익숙하다. “저도 서울에서는 엄청 성격이 급한 편이었어요. 하지만 제주에 와 많이 느긋해졌죠. 이 섬이 그렇게 만들어줬어요.” 고 대표는 재주상회에서는 누구도 사람을 ‘쪼는 일’이 없다고 말했다.
‘사람 쪼는 일’ 없는 언론사잡지에는 제주 이야기를 담았다. 2016년 여름 의 커버스토리는 ‘물’이다. 폭포와 계곡부터 오랫동안 제주에서 먹는물로 사용되어온 용천수 이야기까지. 제주의 물에 대한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모두 담겼다. 제주의 봄을 알리는 고사리, 섬을 이루는 현무암, 좀처럼 발길 닿기 어려운 마을까지 모두 의 기삿거리다.
광고도 아무 데서나 받지 않는다. 은 제주와 인연 있는 기업이나 제주와 어울리는 가게의 광고만 실으려고 한다. 제주에서 나는 원료로 화장품을 만드는 기업이나 제주 특산물로 음식을 만드는 레스토랑 등이 대표적이다. 광고는 과 함께하는 작가들이 직접 그림을 그리거나 사진을 찍어 만든다. 에서만 볼 수 있는 광고가 탄생하는 것이다. 기자 세 명과 작가 네 명이 기사부터 광고까지 안팎을 꼼꼼히 채운다.
재주상회가 잡지만 만드는 것은 아니다. 제주 먹거리 관련 이야기를 담은 레스토랑 메뉴 컨설팅이나 여행 책자와 지도를 만드는 일도 한다. 제주에 모여든 젊은 작가를 발굴하고 이들을 기업과 연결해주는 에이전시 역할도 한다. 제주의 사람·음식·공간 등 여러 이야기를 담은 웹사이트도 조만간 선보일 계획이다.
여러 재주를 가지고 제주에 모인 사람들이 각자의 재능을 나누고 또 함께한다는 의미로 이름 지은 재주상회는 그 이름에 걸맞은 역할을 하며 이 섬에 단단한 뿌리를 내리는 중이다. 짧은 시간에 많은 성과를 이뤄낸 것으로 보이지만 고 대표는 손을 내젓는다. “우리가 잘해서 여기까지 온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아요. 지금 다시 창간호를 보면 얼굴이 화끈거려요. 부족한 부분도 많이 보이고요. 다만 디자인에 신경 쓴다거나 조금 더 믿을 수 있는 정보를 실으려고 노력한 걸 많은 분들이 좋게 봐주신 것 같아요.”
광고 없이 판매만으로 운영큰 욕심을 부리지도 않는다. 많은 인기를 끌고 있지만 잡지 발행은 1만 부로 유지하려 한다. 이 정도로도 광고 없이 판매만으로 잡지를 운영하겠다는 꿈은 거의 이뤄냈다.
마지막으로 고 대표에게 은 어떤 잡지냐고 물었다. 망설임 없이 그는 “제주를 알아가는 이가 제주를 알고 싶은 이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라고 정리했다.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는 아직 많이 남았다. “사람들이 그렇게 제주에 대해 말할 게 많냐고 물어요. 하지만 제주는 정말 이야기할 것이 많은 곳이에요. 한참 남았어요.” 고 대표는 이야깃거리가 떨어질 걱정은 전혀 없다며 환하게 웃었다.
정환봉 기자 bonge@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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