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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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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싸움과 자본

등록 2014-09-20 14:32 수정 2020-05-03 04:27

‘정규직 아내/정규직 남편, 정규직 아내/비정규직 남편, 비정규직 아내/정규직 남편, 비정규직 아내/비정규직 남편.’ 나열한 4가지 맞벌이 부부 조합은 우리 사회에 모두 존재한다. 우리나라 노동자의 비정규직 비율이 30~40%에 달하고 여성 비정규직 비율이 남성 비정규직 비율보다 2배 가까이 높다는 통계로 판단컨대 ‘비정규직 아내/정규직 남편’ 조합이 가장 많지 않을까 싶다.

“여보, 당신은 고용주가 아니라 노동자야”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몇 년 전 같은 동네에 살던 세 가족이 모였다. 이웃이었을 땐 2주에 한 번꼴로 함께 밥을 먹곤 했었다. 뿔뿔이 흩어져 살다보니 만나기가 쉽지 않았는데 그날 모처럼 모였다. 밥을 먹고 주점으로 자리를 옮겼다. 우연찮게 비정규직이 화제가 됐다. 내가 진보정당 당원인 걸 다들 알고 있었던지라 당의 입장은 뭐냐고 물었다. ‘비정규직 철폐’가 당론이라고 말했다. 가연이 아빠가 “사람마다 능력의 차이가 있고 고용주의 선택이라는 이유로 정규직·비정규직 차별은 정당하다”고 주장했다. 너무도 단호해서 “신자유주의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가 노동시장 유연화(labour market flexibility)다. 노동시장 유연화는 해고를 자유롭게 하기 위해 임시직과 계약직을 양산했다. 자본은 하청·용역 업체를 통해 노동자를 비정규직으로 고용하고 동일노동을 하는데도 임금과 대우를 차별했다. 자본에 날개를 달아준 이런 착취 구조를 합법화한 것이 ‘비정규직보호법’이다”라는 내 말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목소리가 커졌다. 중간에 내 옆지기가 말려 논쟁이 끝나는가 싶었는데 묵묵히 지켜보던 옆지기들이 말문을 열었다. 가연이 엄마는 은행에서 일하다 국제통화기금(IMF) 사태 때 구조조정으로 일자리를 잃은 처지였다. 동료들 대부분이 여전히 비정규직으로 차별받고 있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경영 악화의 책임을 고스란히 노동자에게 떠넘긴 은행의 행태에 분노했다. 학교에서 사무보조로 일하는 상철이 엄마가 비정규직이라는 굴레는 사람에게 모멸감을 주는 희대의 악법이라고 덧붙였다. 옆지기들과 가연이 아빠의 논쟁이 1시간 이상 계속됐다. 가연이 엄마의 마지막 말이 논쟁에 마침표를 찍었다. “자기 옆지기도 납득시키지 못하는 그런 주장은 허공에 대고 주먹질하는 것보다 더 허무한 일이야. 눈 뜨고 주변을 살펴. 구름 위로 걷지 말고 발을 땅에 딛고 걸으란 말이야. 여보, 당신은 고용주가 아니라 노동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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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가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갈린 오늘날엔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말보다 ‘처지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말이 더 현실적인 얘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경험이었다. 지금은 그때보다 비정규직 비율이 늘었다. 맞벌이 부부 중 ‘비정규직 아내/비정규직 남편’ 조합 비율도 당연히 그만큼 늘었을 것이다. 이에 반비례해 비정규직 대우를 둘러싼 맞벌이 부부의 말다툼은 줄지 않았을까? 처지가 같아졌으니 말이다. 자본에 고맙다고 해야 할지?

우리는 모두 개새끼들

“Now we’re all sons of bitches”(이제 우리 모두는 개새끼들이다). 1945년 7월16일 인류 최초로 핵폭탄 실험이 있었다. 핵폭탄 개발에 참여한 한 과학자가 자신들이 악마의 무기를 만들었음을 깨닫고 내뱉은 말이다. ‘비정규직보호법’을 만든 이들에게는 “Now we’re all sons of bitches”를 들려주고, 처지가 달라 아웅다웅하고 있는 맞벌이 부부에게는 “노동차별로 부부싸움 부추기는 자본주의와 결별하자”를 함께 외치자고 말하고 싶다.

이은탁 ‘데모당’ 당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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