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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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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목 잡는 건 정부와 여야

세월호 특별법 2차 합의안 거부하자 고개 드는 국정 파탄 주범 논리…

유가족들 “제대로 된 해결이 인간다운 삶의 출발”
등록 2014-08-26 17:55 수정 2020-05-03 04:27
새정치민주연합 박영선·새누리당 이완구 원내대표(오른쪽)가 8월19일 세월호 특별법 2차 합의안을 바라보며 웃음짓고 있다. 한겨레 김성광 기자, 김경호 선임기자

새정치민주연합 박영선·새누리당 이완구 원내대표(오른쪽)가 8월19일 세월호 특별법 2차 합의안을 바라보며 웃음짓고 있다. 한겨레 김성광 기자, 김경호 선임기자

기이한 변질이다. 여야의 세월호 특별법 2차 합의안(8월19일)을 유족들이 거부하면서, 세월호 대형 참사의 피해자들이 국정 발목이나 잡는 가해자로 둔갑하고 있다. 세월호 희생자 유족들이 국회 합의도 무시하는 초법적 존재, 민생·경제 살리기를 가로막는 국정 파탄의 주범으로 매도돼 벼랑 끝으로 몰리고 있다. 유족들을 생떼나 쓰는 집단으로 변질시킨 것은 정치권이 세월호 특별법 합의 과정에서 남긴 가장 나쁜 후유증이다.

피로감 부추기기, 공식의 결과물

이러한 변질은 현 정부·여당이 그간 누차 답습한 공식을 다시 밟은 결과물이다. ‘사회적 현안 발생→외면→갈등 장기화→피로감 부추기기→민생·경제 살리기 이슈로 뭉개기’의 단계를 거치면, 어느새 사태 해결을 요구하던 목소리의 본질은 옅어지고 정부에 적대적인 반대 진영의 과격하고 흥분된 주장이 국정을 혼돈에 빠뜨리는 것처럼 귀결된다. 우리 사회는 2009년 서울 용산 참사 당시 책임자 처벌을 바라는 유족의 절규도 결국 “사회를 흔드는 불순세력” “돈이나 뜯어내려는 떼잡이”로 폄훼되던 과정을 지켜본 경험이 있다.

세월호 정국에서 특이한 것은, 야당이 유족을 결과적으로 고립시키는 데 여권과 짝을 이룬 공범이 됐다는 점이다. 새정치민주연합이 세월호 특별법과 관련해 유족과 충분히 소통하지 못한 내용을 새누리당과 합의한 뒤 유족에게 ‘추후 수용’을 요구하고, 이에 유족이 반대하면 유족이 정국을 꼬이게 하는 유일한 장애물인 것처럼 비치는 상황이 반복됐다. 야당이 세월호 특별법 합의를 통해 여야 갈등의 전선에서 먼저 빠져나오려다, 유족들을 희생시키는 가혹한 형국을 초래한 것이다. 여야의 세월호 특별법 1차·2차 합의(16쪽 참조)를 유족이 모두 거부한 것은 합의 내용이 유족의 요구와 한참 거리가 먼데다, 진상 규명에 별 의지가 없어 보이는 여권과 철저한 진상 규명이 가능한 특별법 관철에 절박함이 없는 듯한 제1야당에 대한 불신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

유족의 불신과 실망감은 박근혜 대통령의 표변에서 우선 기인한다. 유족들은 지난 5월16일 박 대통령과의 청와대 면담에서 △특별법 제정 △유족 진상조사위원회 참여 △진상조사위의 수사권 보장 등을 요구했다. 당시 면담장으로 잠시 돌아가보자.

유족: (진상조사위에서) 실질적으로 수사되는 내용을 상시적으로 저희들이 볼 수 있고, 가장 중요한 가족들의 의견이 반영되고…. 그래야만 대한민국이 살고 싶은 나라가 되지 않겠습니까?

대통령: 네.

유족: ‘진상 규명을 위해선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성역 없이 수사가 이뤄져야 된다’고 말하면 꼭 사람들이 “그러면 대통령이 (수사의) 목표냐? 자꾸 그렇게 얘기하면 특별법도 안 만들 것이다’라고 말하는 분들도 있어요. 이런 부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대통령: 특별법은 필요하다, 그렇게 봅니다. 무엇보다도 진상 규명에 있어서 유족 여러분들의 여한이 남지 않도록 하는 것, 거기에서부터 깊은 상처가 치유되기 시작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속 시원하게 여러분들의 의견이 계속 반영되고, 투명하게 공개되느냐를 다시 의논드리겠습니다.

“제1여당 새누리당, 제2여당 새정치연합”

유족들은 특별법 협상 과정에서 ‘여한’이 계속 남는데도, 자신들의 의견이 속 시원히 반영되지 않는데도, 협상 과정이 불투명한데도 박 대통령이 뒷짐을 지고 있는 것에 분통을 터트린다. 새누리당은 박 대통령의 이런 태도에 발을 맞췄다. 참사 이후 출범한 세월호 국정조사 특위에서 진상 규명 노력을 보여주지 못한 채 “세월호는 교통사고”(홍문종·주호영 의원)라거나, 국회에서 농성 중인 유족들을 “노숙자”(김태흠 의원)라고 말하면서 유족들을 격앙시켰다. 특별법 합의 과정에서 유족들의 뜻을 반영하려는 시도도, 하물며 합의문 발표 이후 유족들을 만나 이해를 구하려는 과정도 생략했다. 세월호 희생자 가족대책위원회가 애초 요구보다 수위가 크게 낮은 안을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와의 면담에서 제시했지만, 새누리당은 이것마저 외면했다. 가족대책위는 여야가 진상조사위에 수사·기소권을 주지 않는 대신 특검을 임명해 수사를 보조하는 안으로 가닥을 잡자, 대통령에게 추천할 특검 후보 2명을 뽑는 7명의 특검추천위원 구성에서라도 유족이 원하는 인사를 많이 포함시킬 수 있는 안을 제시했다. 2012년 ‘내곡동 특검’처럼 야당이 대통령이 임명할 특검 후보를 모두 추천하거나, 2명의 여당 몫 특검추천위원 추천권이라도 야당에 넘겨주거나, 유가족이 4명의 국회 몫 특검추천위원을 모두 추천하는 3가지 안이었다. 유족으로선 상당히 후퇴한 안이지만, 청와대 눈치를 보지 않을 특검 후보를 제대로 추천할 기회라도 보장해달라는 요구였다. 하지만 여야는 ‘여당 몫의 특검추천위원 2명에 대해 야당과 유족의 사전 동의를 받는다’는 수준에서 절충했다. 여당은 통 큰 양보라고 주장하지만, 유족들은 동의가 어려운 인사를 여당이 거듭 제시하고 유족이 반대하는 상황을 반복시켜 특검을 파행으로 끌고 갈 수 있다고 여긴다. 세월호 국정조사 특위를 파행시키고 유족을 비난하던 여당의 그간 행태가 유족들의 이런 의심의 근거로 작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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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족들이 합의안을 수용할 수 없는 또 다른 이유는 새정치민주연합에 대한 극도의 실망감이다. 유족의 요구에 최대한 가까운 안을 따내기 위해 제1야당이 처절하게 싸웠다는 인식조차 심어주지 못한 탓이다. ‘그래, 야당도 할 만큼 했다’라고 양해할 만한 구석을 보여주지 못한 것이다. 유족들 중에는 “이제 야당은 없다. 새누리당은 제1여당, 새정치연합은 제2여당”이라고 말하는 이가 적지 않다. 특히 덜컥 1차 합의문을 발표해 ‘야합’이란 비난을 샀던 박영선 새정치연합 원내대표는 2차 합의 때도 ‘유족의 동의가 전제돼야 합의하겠다’는 다짐을 다시 지키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선 합의문 발표, 후 유족 설득’에 나선 박 원내대표의 행동이 유족들에게 수용될 리 없었다. 2차 합의 다음날인 8월20일, 박 원내대표가 경기도 안산에서 유족들을 설득하겠다며 만난 것이 상황을 악화시켰다는 말도 많다. 당시 그는 협상 과정을 설명하며 “이완구 새누리당 원내대표와 제가 최선을 다한 것”이라 주장했고, 유족들은 “가족대책위가 동의한 안을 들고 갔어야 했다” “우린 죽을 각오가 돼 있었다. 뭐가 두려워 그렇게 합의했느냐”고 되물었다. 수사권·기소권을 주장했던 박 원내대표가 야당과 유족이 특검 후보를 추천할 권한을 따낸 것도 아니고, 특검 후보를 추천하는 추천위원에 대한 유족의 ‘사전동의권’을 들고 와서 이완구 대표의 진정성을 두둔하며 최선을 다했다고 하니 유족들이 크게 반발한 것이다.

유족·여야 3자 협의체 마련 의견도 나와

유족을 구석으로 몰아세우는 정치권을 보면서 유족들은 8월20일 총회에서 진상조사위에 수사권·기소권을 부여하는 애초의 요구안을 관철하자는 결의를 다시 다졌다. 한 유족은 “수사권·기소권 관철을 위해 많은 시민들과 함께 여기까지 왔는데, 지금 포기할 수 없다. 해보는 데까지 해보고 안 됐을 때 다른 방안을 강구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문제는 ‘재협상은 없다’는 여당, 갈피를 못 잡는 야당, 특별법 관철 의지를 다시 다진 유족 등 3자가 접점을 이룰 출구가 잘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시민사회에선 유족이 요구하는 대로 여·야·유족 3자 협의체 또는 범시민사회가 참여하는 중재협력기구를 마련해 돌파구를 모색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다. 이처럼 특별법 제정까지 장기화될 수 있는 상황에서 유족들은 앞으로 ‘세월호 피로감’을 활용하려는 여권의 공세와 계속 맞닥뜨릴 수 있다. 그래서 유족들은 다음(8월20일 성명서)과 같이 당부하고 있다.

“어떤 분들은 ‘세월호 피로감’을 이야기하며 이제 그만 죽은 넋들을 놔주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도 지치고 힘든 우리들은 여기서 주저앉는 것이 죽은 넋들을 두 번 죽이고, 앞으로 있을지도 모르는 또 다른 죽음들에 눈감는 것임을 압니다. 어떤 분들은 민생을 챙기고 경제를 살리기 위해 세월호를 극복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누구보다도 민생고, 생계고에 시달려왔고 시달리고 있는 우리들은 세월호를 제대로 해결하는 것만이 참으로 인간다운 삶의 출발점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압니다.”

송호진 기자 dmzs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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