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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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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하라” 아닌, “대피하라”였다면

광주지법 형사11부서 열린 이준석 선장 등에 대한 재판서 증인신문 나선 생존자들…
“너무 미안해서 따뜻한 물로 샤워를 못했다”
등록 2014-07-29 16:23 수정 2020-05-03 04:27
지난 4월16일 전남 진도군 관매도 인근 바다에서 좌초된 ‘세월호’에서 해양경찰 등이 승객을 구조하고 있다. 서해지방해양경찰청 제공

지난 4월16일 전남 진도군 관매도 인근 바다에서 좌초된 ‘세월호’에서 해양경찰 등이 승객을 구조하고 있다. 서해지방해양경찰청 제공

아비규환 속에서 겨우 살아나온 사람들은, 그날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세월호 이준석(69) 선장과 선원 등 15명에 대한 재판을 진행 중인 광주지법 형사11부(재판장 임정엽)는 7월22~24일 일반인 승객 10명, 서비스직 승무원 2명, 아르바이트생 1명에 대한 증인신문을 했다. 증인석에 선 승객 가운데 ‘탈출하라’ ‘대피하라’는 선내 안내방송을 들었다는 사람은 없었다. ‘가만히 있으라’거나 ‘구명조끼를 입고 대기하라’는 방송만 있었다는 것이다. ‘대피하라’는 방송만 있었어도 많은 생명이 살 수 있었을 것이라 했다.

<font size="3">‘대기하라’ 안내방송 1시간 뒤 들이친 바닷물</font>

사고 당일 선내 안내방송을 한 세월호 전 승무원 강아무개(32·남)씨가 7월23일 공판에 증인으로 출석했다. 그동안 나온 증언과 동영상을 종합해보면, 강씨 외 다른 승무원도 안내방송을 한 것으로 보인다. 세월호에는 고 양대홍 사무장, 고 박지영씨, 고 안현영씨 등 여객영업부 직원 5명이 있었다. 이들은 객실 안내, 시설물 관리, 불편사항 접수, 이벤트 업무를 맡았다. 강씨는 여객영업부 직원 중 유일한 생존자다. 안내데스크가 위치한 3층 중앙 로비에 있던 그는 물이 차오르자, 4층으로 떠오른 뒤 오른쪽으로 밀려와 구조됐다. 당시 승무원들은 구명조끼를 입지 않았다고 했다. 선장·선원 앞에서 증언을 하기가 부담스럽다는 요청에 따라, 피고인들은 201호 법정 밖에서 증언을 들었다. 사고 직전 그는 고 박지영·안현영 승무원과 함께 안내데스크 안에 있었다. 처음 배가 기우는 느낌을 받았을 땐, 방향을 바꾸는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다 강한 흔들림과 함께 배가 기울기 시작했다. 첫 안내방송을 한 건 그즈음이다. 그러고 나서 약 1시간 뒤, 3층에 물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font color="#008ABD">검사</font>- 수사기관에서 진술한 내용을 확인해달라. 배가 갑자기 기우는 것을 보고 임의로 최초 안내방송을 했고, 그 후 박지영 무전기로 양대홍 사무장과 교신한 뒤 양 사무장의 ‘안전방송을 하라’는 지시로 ‘움직이면 더 위험할 수 있으니 움직이지 마라’는 2차 안내방송을 2회 정도 했다. 08시55분께 안내데스크 바깥쪽으로 넘어가 112에 신고했다. 112로부터 ‘해경 구조정과 주변 어선이 가고 있다’는 얘기를 들은 뒤, 임의로 이러한 내용을 알리는 3차 안내방송을 했다. 청해진해운 홍○○ 대리와 통화한 뒤 ‘해경 구조정과 주변 어선이 오고 있으니까 현 위치에서 대기해달라’는 4차 안내방송을 했다. 9시20분경 양대홍 사무장으로부터 무전으로 구명조끼를 입히라는 지시를 듣고 ‘구명조끼를 입고 대기해달라’는 5차 안내방송을 했다. 그리고 한두 차례 더 안내방송을 했다. 이러한 내용이 맞나?

<font color="#008ABD">강 아무개</font>- 맞다.

강씨는 사고 직후, 갖고 있던 무전기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바로 앞에 있던 고 박지영 승무원이 무전기와 선내전화로 조타실에 ‘대피 여부’를 수차례 문의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조타실에선 답변이 없었다는 것이다. “조타실로부터 정확한 지시가 있었거나, 침몰 상황을 전달받았다면 계속 ‘대기하라’는 방송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날 승객 최아무개씨는 승무원들에게 탈출 방송을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여자 승무원이 무전기를 통해 계속 어디론가 연락했다고 증언했다. 변호인 쪽은 해양경찰청 헬기와 구조정이 도착한 이후인 9시50분까지 2회가량 더 ‘대기하라’는 방송을 한 것이 납득이 가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조타실에서 응답이 없다면, 사무장에게라도 조처를 요청했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강씨는 “내가 할 수 있는 건 대기방송까지다. 그 이후에 할 수 있는 건 조타실 지시가 있어야 한다”며 “사무장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반박했다.

<font size="3">살아남은 자의 지옥 같은 100일 </font>

아내에게 ‘지금 아이들 구하러 가야 한다. 길게 통화 못한다’라는 말을 남기고 한 달 뒤 배 안에서 숨진 채 발견된 고 양대홍 사무장의 마지막 모습으로 추정되는 증언이 있었다. 올해 4월10일부터 세월호 식당과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송아무개(19)씨는 7월24일 공판에서 증인으로 나와 탈출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사고가 있던 시각, 송씨는 3층 식당 주방에 있었다. 아침 8시50분 이후 배가 크게 기울자 몸도 기울어지면서 식당과 주방 사이 문턱에 기대 30~40분을 기다렸다. 그 뒤 인근 선원 전용식당으로 들어가게 된다. 5분쯤 지나자 양 사무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떻게 하냐’고 소리쳤다. 양 사무장이 ‘빨리 나가야 된다’며 식당 안으로 들어왔다. 물이 차오르던 급박한 상황이었다. 식당 안에는 갑판으로 통하는 창문이 있었다. 양 사무장은 창문으로 송씨를 밀어올렸다. 몇 분 뒤 배는 가라앉았다.

<font color="#008ABD">검사</font>- 본인은 나갔는데 양 사무장은 뒤따라 나왔나?

<font color="#008ABD">송아무개</font>- 이미 물이 다 고여 있는 상황이어서 아무것도 손쓸 수가 없었다. 양 사무장은 못 나왔다.

<font color="#008ABD">검사</font>- 양 사무장은 3층, 4층 여객구역 어딘가에 있다가 사고가 발생하자 5층까지 올라갔고 3층과 4층을 왔다갔다 하다가 마지막 순간에 증인을 만난 것 같은데.

<font color="#008ABD">송아무개</font>-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송씨가 배 안에서 마지막으로 머무른 선원 전용식당엔 이름도 모른 채 ‘이모’라고 부르던 여성이 있었다. 참사 94일째인 지난 7월18일 주검으로 발견된 조리원 이묘희(56)씨다. 참상을 생생히 목격한 증인이기도 한 생존자들은 사고 100일이 지나도록 정신적·육체적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마른 체구의 화물차 운전기사 김동수(52)씨는 7월23일 공판에 증인으로 출석했다. 증언을 하기 전, 유가족이 앉아 있는 방청석을 향해 돌아섰다. “끝까지 자리를 지키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김씨는 사고 당시 4층 갑판으로 올라가 배에 있던 소방호스를 풀어 단원고 학생을 비롯한 승객들을 구해냈다. 그의 마음은 지옥 속이다. 4층에 위치한 키즈룸에는 어린아이에서 어르신까지 미처 구하지 못한 사람이 많았다. “바다에서 나온 뒤 사우나에 갔는데, 너무 미안해서 따뜻한 물로 샤워를 못했다. 사고 이후 제 자신이 망가졌다는 생각을 한다. 침몰하는 배 안에서 학생들이 객실 창문을 두들기는 장면이 자주 떠오른다. 지금도 버스 창문을 보면 ‘뛰어내려’라고 한다. 지금, 중간 기억이 없다. 이제는 길도 헷갈린다.”

<font size="3">7월28~29일, 생존 단원고 학생들 증인신문 </font>

김씨가 증언을 마치자 임정엽 재판장은 위로의 말을 전했다. “재판부도 동영상을 보면서 소방호스로 구하는 것을 보고 굉장히 감탄했습니다. 저희가 본 사람 중에 가장 책임감이 강한 분 같습니다. 사람들을 많이 구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정신적 고통을 받고 계신 것 같은데요. 자부심을 갖고 정신적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바랍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재판부는 7월28~29일 이틀간 경기도 수원지방법원 안산지원에서 생존한 단원고 학생들과 필리핀 가수 부부 등에 대한 증인신문을 이어간다.

광주=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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