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만났던 하와이안 멜레 트리오 ‘마푸키키’의 조태준은 이렇게 말했다. “(하와이는) 전혀 다른 공간이었어요. 바쁜 것도 없고, 다들 놀러왔고. 사는 사람도 바쁘다고 해봤자 안 바쁜 거 있잖아요? 현실감이 없는데 채광은 양기로 선명한 색깔이고. 제일 웃긴 게, 소나기가 오잖아요? 저기 먹구름이 보여요. 그리고 비가 와요. 또 저 너머로 햇살이 보여요. 그러면 개어요. 그리고 무지개가 딱 뜨고. 뭔가 선명한 거 있잖아요. 계획 안 해도 저절로 되는 것 같고….” 부산에서 올라와 서울 홍익대 앞에서 나름 잘나가는 뮤지션으로 10년을 보냈지만 “매년이 3년같이 느껴졌던” 청년은 그렇게 하와이에서 위로를 받았다. 그러나 정작 돌아와 그리운 것은 자연이 아니었다. “그 음악, 여유 있는 분위기, 그런 게 그리웠죠. 자연은 우리나라도 좋잖아요? 하와이 덕분에 한강의 하늘도 다시 보게 되고, 부산 고향 동네 매력도 다시 느끼게 되고.” 그렇게 여행은 “보는 눈이 커지게” 했다.
<font size="3">언젠가 암스테르담에 간다면 이건 꼭</font>조태준에게 우쿨렐레와 악보가 있다면, 그녀에겐 자전거와 카메라가 있다. 우연히 여행한 하와이가 청춘에 위로를 주었던 것처럼, 첫 책인 을 쓰느라 골방에 틀어박혀 머리를 쥐어뜯던 한 여성이 무심코 선택한 자전거는 또 다른 길을 열어주었다. 2008년 첫 자전거로 미니벨로를 구입한 그녀는 집에서 가까운 홍제천을 달렸고, “길을 달리다보니 한강이 나타났”고, “그저 페달만 굴렀는데 어느새 분당에 와 있었다”고 돌이켰다. 자전거를 타기 시작한 지 1년 만에 그녀는 미니벨로와 함께 네덜란드로 떠났다. “이것은 내가 자전거를 통해 구경한 세상 이야기다.” 만화가 김혜원씨가 그리고 찍고 쓴 (씨네21북스 펴냄)은 그렇게 시작된다.
마침 경기도 분당이었다. 그녀가 일하는 회사 근처 카페, 지난 7월31일 만난 그녀는 9kg짜리 자전거를 어깨에 메고 2층 커피숍으로 올라갔다. 미니벨로에서 갈아탄 로드바이크였다. 라이딩을 시작한 지 1년쯤 지난 2009년, ‘동네 라이더’는 네덜란드와 벨기에로 9박10일의 자전거 여행을 떠났다. 스히폴 공항에 내린 그녀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박스 포장해 부친 미니벨로를 조립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공항에서 시내까지, 언니는 달렸다. 작은 체구의 동양 여성이 작은 미니벨로를 타고 거리를 달리니, 너도나도 쌀집(구식)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네덜란드 남녀들이 힐끔거렸다. 그래도 그녀는 암스테르담, 로테르담, 안트베르펜, 브뤼셀을 자전거로 누비고 다녔다. 페달을 밟다가 눈길이 멈추면 멈춰서 만화와 일러스트를 그리기 위한 자료 사진을 찍고 메모를 했다.
지구는 둥글지만, 네덜란드는 평평하다. 그녀가 유럽의 자전거 수도, 암스테르담으로 먼저 간 까닭이다. 은 마리화나 향기 풍기는 운하의 도시에서 보았던 창문과 발코니, 하우스보트, 미스터리 조각상 등을 그녀의 분신인 캐릭터가 그림과 함께 소개한다. 자전거 바퀴 같은 안경을 쓴 그녀를 따라서 네덜란드 음식 팔라펠, 반고흐 뮤지엄 등을 ‘누리다’보면 어느새 다음 도시인 로테르담으로 떠날 시간이 된다. 만화와 사진이 이끄는 여행은 재미가 쏠쏠한데 실용성도 상당하다. 언젠가 암스테르담에 간다면, 그녀가 손으로 그리고 명소만 콕콕 집어넣은 암스테르담 약도는 꼭 가지고 가야지 싶을 정도다. 로테르담으로 장거리 라이딩을 떠나기 전에 다리를 쭉쭉 펴며 몸을 푸는 캐릭터도 귀엽지만, 이따금 글로 숨겨놓은 유머도 만만찮다. 로테르담으로 가다 길을 잃고 고생한 다음날에 먹은 아침상을 그리는데 ‘커피’ 대신 ‘코피’라고 슬쩍 비트는 식이다.
<font size="3">쓸모없게 된 여행이 가장 예뻤다</font>‘피식’ 하는 웃음은 책을 덮은 다음에도 새어나온다. 그녀가 만났던 사람들을 분류하는 방식이 생각나서다. 자전거를 타느라 문물을 익히느라 여념이 없는 와중에도 그녀는 만났던 사람을 대략 ‘매우 친절’ ‘심보 고약한’ 같은 말로 분류한다. 여행지에서 친절에 예민할 수밖에 없었던 우리들 자신이 떠올라 웃음이 나온다. 불친절한 네덜란드 ‘영감님’의 말을 듣고 가다 길을 잃고 헤맨 다음 발견한 신세계도 우리의 경험과 다르지 않다. “잘못된 방향이었지만 무척 예뻤던 길, 결국 쓸모없게 된 길이 여행 중에 가장 아름다운 길이었다”는 것이다. 이 책에는 제주도·오키나와 여행기도 나오는데, 제주도에서 자전거 타이어를 고쳐주는 아저씨의 폐부를 찌르는 말에 “악마가 빠져나갔다”는 경험도 남의 일 같지 않다. 이렇게 은 28살에 자전거를 만난 한 여성의 성장담으로 읽힌다. 가장 먼저 그린 제주도 여행기를 보면서 김혜원 작가의 그림이 변해온 여정이 보여서 더욱 그렇다.
2009년 시작한 여행기를 그리고 고치며 공을 들였다. 만화와 사진 못지않게 정보를 중요하게 여기는 작가는 여행의 전후도 담으려 애썼다. 벨기에 안트베르펜 동물원에 유독 많은 영장류가 어디서 왔을까, 궁금한 그녀는 아프리카를 혹독하게 착취한 벨기에의 흑역사를 공부했다. 이렇게 한 공부가 담겨서 작가는 자신의 책을 “나름의 견문록, 성인용 학습만화”라고 말했다. 자전거를 타면서 숙성된 생각은 여행기 사이에 삽입된 ‘싱크 바이크’(Think Bike)에서 우러난다. 자전거를 타면 자동차가 가장 무서울 줄 알았던 통념은 “행인이 제일 무서우니까!!”라고 경악하는 캐릭터를 통해 깨진다. ‘쫄쫄이냐 일상복이냐’는 자전거 복장 논란에 대해 그녀가 내리는 “스포츠 용품에는 죄가 없다”는 쿨한 결론은 어떤가.
<font size="3">세계의 끝은 결국 여기</font>그녀는 자전거를 타면서 자전거를 생각했지만, 자전거만 생각하지는 않았다. 세계에 마실 나갔던 ‘동네 라이더’는 자전거를 통해 “폭발적인 에너지로 도약하는 것은 없지만, 끈질기게 꾸준히 나아가는 것”이라는 생각을 얻었다. 20대 중반 “아무것도 잘 되지 않던 시간”을 통과한 그녀는 “만약 내가 자전거를 타지 않았다면 지금의 나와는 조금 다른 내가 되었을 거라고 생각한다”고 다짐 아닌 다짐을 한다. 자전거로 다녔던 세계의 끝에는 결국 여기가 있었다. “태어나서부터 살았지만 잘 알지 못하던 서울이라는 나의 도시가 처음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자전거 타기에는 어디론가 나아가고 있다고 믿게 하는 힘이 있다.” 그것은 하와이의 하늘을 보고서야 한강의 하늘을 다시 보게 된 어느 뮤지션의 성장담과 다르지 않았다.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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