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24일 오전 세월호 선내에서 경기도 안산 단원고 2학년2반 윤민지(17)양의 주검이 발견됐다. 세월호 참사 70일째이자 단원고 남학생의 주검이 발견된 지 16일 만이었다. 세월호 희생자는 293명, 실종자는 11명이 됐다. 같은 날 오전 광주지법 형사11부(재판장 임정엽)는 세월호 이준석(69) 선장과 선원 등 15명에 대한 세 번째 공판준비기일을 열었다. 생존한 단원고 학생의 부모가 나와 학생들이 증언하기로 결심했다고 전했다. 증인신문은 기말고사가 끝난 뒤인 7월28~30일 이틀 또는 사흘간 안산(수원지법 안산지원)에서 진행하기로 했다. 학생들은 법정이 아닌 화상증언실에서 진술해 선원들과 마주 앉지 않는다. 재판도 비공개로 진행한다.
화재감지기 오작동에 그날을 떠올리는 생존자들오전 10시 광주지법 201호 대법정에서 생존한 단원고 학생의 아버지가 “지금도 세월호 사건은 진행형”이라고 말했다. “친구 3분의 2를 잃은 우리 아이들 마음이 어떨까. 지금도 죄책감에 시달리고 누가 자기를 알아보지 않을까 걱정한다. 일요일(6월22일) 저녁, 학생들이 함께 지내는 숙소에서 화재감지기가 오작동했다. 사이렌이 울리고 비상방송이 나왔다. ‘침착하게 밖으로 대피하라’는 내용이었다. 아이들은 당황해서 씻고 있는 부모를 데리고 나오다 넘어져 다치고 일부는 꼼짝도 못했다. 세월호 안에서 들었던 방송과 똑같아 친구들을 두고 왔다는 죄책감에 그랬다고 하더라. 너무 놀라 119에 실려가기도 했다.” 하지만 심리적 충격에도 아이들은 법정에서 진실을 말하기로 했다. “살아 있는 학생들이 친구들을 생각해서 더 간절하게 진실을 말할 준비가 됐다. 먼 곳까지 내려와 (증인) 진술하는 것은 힘들지만 가까운 곳에서 몇 명이 같이 증언할 수 있게 해달라.”
재판장은 “학생들이 미성년자이고 대부분 안산에 거주하는 점, 사고 후유증으로 장거리 이동이 어려운 점을 고려해 안산지원에서 증인신문을 하겠다”고 결정했다. ‘공판기일 외 증인신문’ 형식으로 학생 10~20명이 참여한다. 재판은 비공개지만 일부 희생자 가족과 언론인 방청은 허용된다.
공판 준비 절차를 오전에 마무리하고 오후 2시부터 정식 공판에 들어갔다. 첫 공판에서는 세월호와 쌍둥이 여객선으로 불리는 오하마나호에 대한 검경합동수사본부의 검증 동영상이 상영됐다. 이 동영상에서 오하마나호 선장은 세월호의 1차 침몰 원인을 조타 미숙으로 짐작했다. 화물 과적이나 고박 불량은 그다음 문제라고 했다.
“기계는 거짓말을 안 한다. 조타수가 그 순간에 타를 15도 이상 쓰면 선체가 진동한다. 대각도가 되면 선체 떨림 현상이 나타난다. 선수가 급격히 오른쪽으로 돌고 배가 좌현으로 기운다. 그러면 반대 타를 써도 타력이 있어서 듣지 않는다. 오른쪽으로 더 돌고 경사각은 더 커진다. 배가 정상적인 상황이면 전복되지 않는다. 1800t 짐을 실어도 안 넘어간다. 문제는 30도 이상 기울어졌고 화물이 쏠리면 반대 타를 써도 일어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검찰이 기운 배를 복귀할 수 있는 방법을 물었다. “엔진을 반대로 운항한다. 우현 전속 후진, 좌현 전속 전진하면 (배가) 넘어가는 속도를 제동할 수 있다. 엔진을 다 끄면 회복할 방법은 없다. 넘어가는 속도만 조금 늦춰질 뿐이다.” 공소장을 보면, 박기호(54) 기관장은 선수 갑판 위에 컨테이너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엔진을 임시로 정지시켰다. 이후에는 이준석 선장의 지시를 받아 엔진을 완전히 껐다.
제때 방송만 했으면 탈출했을 것선내 방송 방법은 간단했다. 조타실 마이크를 들고 ‘All’ 버튼을 누르면 끝이었다. 검사가 “세월호도 같은 방송 장비가 있었다”고 설명하자 방청석에서 한숨이 터져나왔다. 검증해보니 구조 장비는 오하마나호에서도 무용지물이었다. 구명뗏목과 강하식 탑승장치가 있었지만 줄로 엉켜 있고 페인트에 눌어붙어 있었다. 망치로 때렸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검찰은 “관리 부실 탓”이라고 했다. 화물(컨테이너) 고박(고정·결박) 장치는 허술했다. 그나마도 고박용 쐐기를 세월호 사고 이후 부랴부랴 신품으로 교체했다고 한다. 컨테이너 크기가 들쑥날쑥해 바닥 틀에 고정하지 못하고 로프로 묶어야 했다. 승용차도 흠집이 나면 배상 문제가 있어서 제대로 고박하지 않는다고 선원들이 진술했다. 사고 하루 전날인 4월15일에 찍힌 세월호의 화물 적재 모습이 딱 그랬다. 세월호 운항사인 청해진해운이 세월호를 처분하려고 내놓자 선박중개인이 이날 세월호 구석구석을 150여 장에 담았다.
사진을 보면, 세월호 곳곳에는 선체가 기울어도 잡고 이동할 수 있는 손잡이(안전봉)가 설치돼 있었다. 이준석 선장과 선원들이 탈출하라고 제때 방송만 했더라면 승객이 탈출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또 조타실에는 선실을 비롯해 선체 내부를 보여주는 폐회로텔레비전(CCTV) 모니터가 있었다. 희생된 단원고 학생의 아버지는 재판이 끝날 즈음 요청했다. “선장과 선원들이 모니터로 아이들을 보고 있었는지 확실히 밝혀달라. 구명조끼를 입고 (선실에 아이들이) 누워 있는 상황을 눈으로 보고도 탈출했는지 말이다.”
오후 5시 재판이 마무리되자 희생된 학생의 어머니가 방청석에서 손을 들었다. “(재판부가) 아이들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지 않느냐. 바쁜데 안산까지 차마 와달라고 할 수는 없고, 신문사에서 영정사진을 찍은 것이 있다. 보여주고 싶다.” 스마트폰을 법정 내 화상 시스템에 연결해 286명의 영정사진을 대형 스크린에 띄웠다. 끝없이 이어지는 사진에 선장과 선원들이 일제히 고개를 떨궜다. “얼굴을 들어 우리 아이들을 봐라. 이 아이가 내 아이다.” 부모들이 소리쳤다. 재판장은 “볼 때마다 슬프다”며 “피고인들도 고개 들어 보라”고 말했다. 어머니는 딸의 영정사진을 확대하며 말했다. “정말 반성을 하고 있다면 거짓 없는 증언을 해달라. 나는 밤마다 제대로 잠을 못 잔다. 자다가도 눈물을 흘린다.” 또 다른 어머니는 국화꽃만 놓인 텅 빈 단원고 교실 사진을 법정에서 보여줬다.
정말 반성한다면, 거짓 없는 증언을재판부는 6월30일 오하마나호의 현장검증을 열고 7월8일과 15일에는 검찰이 제출한 서증 2575건을 검증한다. 이후 50여 명의 증인을 차례로 신문한다. 7월22~23일에는 생존한 일반인 승객과 단원고 교사를, 28~30일에는 생존한 단원고 학생을, 8월12~13일에는 사고 현장에 최초로 도착한 목포해경 123정 소속 해경 13명을 부른다.
광주=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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