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바야흐로 2011년 가을. 평소 가을을 심하게 타는 편이기도 하지만 이해 가을은 유난히 고되고 쓸쓸했다. 그저 아버지 사진관을 맡아서 하는 요즘 보기 드문 총각이었던 내가 그해 가을 갑자기 빨갱이 신세가 되어 창문 하나 없는 조사실에서 삼촌뻘의 아저씨들과 조서를 꾸미게 된 것도 고되고 힘들었지만, 또 다른 이유는 바로 친할머니 때문이었다. 나의 친할머니는 압수수색 이후 며칠 지나지 않아서 돌아가셨다. 손주가 이런 사달을 겪고 있는 것에 충격을 받아 돌아가신 것은 아니었고 그저 큰아버지 댁에서 조용히 낮잠을 주무시다 가셨다.
뭐하러 들여왔냐 핀잔 주시더니
큰 어른이 돌아가셨으니 가족과 친척들은 장례식장에서 서로를 위로하고 보듬으면서 좀더 나은 관계를 위해 애쓰는 모습을 보였고 마치 할머니가 생전에 가지고 있었던 기운이 가족에게 전해지는 듯한 느낌도 받았다. 그러나 하필이면 이때 발등에 큰 불이 붙었던 나는 입관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할머니를 보내야 했다. 맙소사, 결국 끝까지 돼먹지 못한 손주가 되어버린 셈이다.
다행히 발등의 불을 2년여에 걸쳐 끄고 나서야 다시 할머니를 생각할 여유가 생겼다. 할머니에 대해 생각해보니 그녀는 아주 교양 있는 사람이었다. 노래도 많이 알고 계셨고 책도 자주 읽고 사교성도 좋아서 주말마다 어딘가에 놀러 가시곤 했다. 심지어 필력도 좋아서 내게 편지도 종종 써주셨다. 매사 심드렁하고 둔해빠진 내가 유년 시절의 대부분을 이런 할머니와 보낸 덕에 그나마 사람 노릇을 하게 된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아 참, 그녀에 대해 또 하나 떠오르는 게 있다. 다름 아닌 영화다.
오래 앉아 있어도 편할 만한 곳이그렇게 영화를 즐겨 보는 분은 아니었던 걸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할머니는 아침연속극부터 일일연속극, 주말연속극도 보시고 심지어 주말 TV에 나오는 영화도 챙겨 보셨다. 해마다 명절이 되면 친척들과 함께 늦은 밤까지 하는 영화도 꿋꿋하게 보다가 주무시던 모습이 떠올랐다. 이것만 이야기한다면 단순히 밤잠이 줄어든 노인의 모습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집에 DVD 플레이어를 들여온 날, 이런 걸 뭐하러 샀냐는 핀잔을 하던 그녀가 며칠 안 지나 손수 어디서 구했는지 알 수 없는 DVD 타이틀을 대여섯 장 가지고 온 모습도 떠오르니 아뿔싸, 나는 할머니랑 극장 한번 가본 적 없는 돼먹지 못한 손주였구나 하는 생각이 또 들었다. 아이고, 할머니.
극장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앞서 말한 발등의 불을 끄는 2년여 동안 법원보다 자주 드나든 곳이 바로 종로 낙원상가 건물 옥상에 있는 서울아트시네마였다. 빨갱이 딱지 붙은 사진관이야 제대로 굴릴 여력이 없으니 어디 다른 데 가서 재밌는 거라도 볼 게 필요했다. 덕분에 시간은 아주 잘 갔고 고장난 라디오처럼 무슨 국가보안법 판례 이야기하는 횟수는 획기적으로 줄었다. 할머니가 DVD 타이틀을 모았듯 나도 언제부턴가 이 극장에서 본 영화 티켓을 모으기 시작했고 무언가를 보러 갈 시간을 비우는 것 또한 익혔다. 아, 역시나 영화만 한 게 없었다. 게다가 다른 곳보다 표값도 싸고 소중한 친구도 많이 만들었다.
생각해보니 두 시간가량 앉아 있으면서 시간 잘 간다고 느껴질 곳이 서울에 몇 곳이나 있을까? 보안수사대에서 지루하게 네다섯 시간을 앉아 있어야만 했던 내가 오래 앉아도 편할 곳이 서울에 몇 개나 있을까? 그런 게 있다면 오래오래 잘 굴러가면 좋겠는데 말이지. 가만, 이런 걸 애착이라고 하나? 그렇다고 하자.
그러고 보니 울 할머니도 DVD 플레이어 닦을 때 이런 생각이었을까?
박정근 사진관 사장 겸 국가보안법 피고인 1010호 주요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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