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러스트레이션 슬로우어스
몇 년 전 새 학교에 부임했을 때의 일이다. 학기가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교장선생님이 나를 교무실로 부르셨다.
“김 선생, 혹시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해보게.”
처음엔 으레 하시는 말씀이겠거니 생각해 그저 잘 지낸다고만 답했다. 며칠 뒤 교장선생님은 다시 나를 불러 물었다.
“김 선생, 정말 필요한 게 없나? 내가 교육지원청에서 긴급 지원 명목으로 예산을 2천만원 정도 받아올 수 있을 것 같네.”
뜻밖의 제안이었다. 그날로 나는 내게 필요한 내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학교 주변을 둘러보니 점자 보도블록이 중앙 현관으로 연결돼 있기는 했으나, 내가 주로 다니는 쪽문에는 없었다. 수업과 업무에 사용하는 점자 정보 단말기인 ‘한소네’도 오래전 장애인단체에서 지원받은 구형 모델이 전부였다. 점자책을 무릎에 놓고 읽으면서 교실 전체를 조망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 높이에 맞는 의자도 없었다. 행정실과 여러 차례 협의하며 품목들의 견적을 받아 교장선생님께 제출했다.
며칠 뒤 새 한소네와 의자가 배달됐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학생들 앞에서 새 기기를 자랑하며 어깨를 쫙 펴고 수업했다. 점자 보도블록 시공은 첫 여름방학 때 진행됐다. 개학 뒤 학생들이 먼저 알아보고 교실로 들어오며 “선생님, 학교에 노란 선이 새로 깔렸어요!”라며 탄성을 질렀다. 나는 그저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 파격적인 지원은 내가 위원장으로 있는 함께하는장애인교원노동조합에도 두고두고 귀감이 되었다. 노조 차원에서 교육부와 교육청에 지원 확대를 요구하고 있지만, 학교장이 발 벗고 나서서 먼저 장애인 교원을 챙기는 일은 무척 드물기 때문이다.
이 사례가 이전과 다른 점은, 무엇보다 지시가 아닌 질문으로 시작됐다는 것이다. 이런 소통은 매일 마주하는 관계 속에서만 가능하다. 교육청에서 시작되는 톱다운 방식은 효과적일 수 있지만 현장의 요구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할 때가 많다. 하지만 아래로부터의 접근은 숨은 요구를 정확히 파악해 필요한 만큼만 지출하므로 효과적일 뿐만 아니라 효율적이다.
학교 현장에는 이처럼 세심한 리더가 많이 필요하다. 자기표현이 미숙한 어린 학생부터 서로 다른 배경의 학부모 그리고 나와 같이 장애가 있는 교직원까지, 우리 사회의 축소판이라 부를 만큼 다양한 사람이 공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순히 법에 정해진 것을 준수(compliance)하는 것만으로는 그 다양성을 품을 수 없다. 먼저 다가가 함께하려는 포용(inclusion) 정신이 필요하다. 그것이야말로 교육계 리더가 반드시 갖춰야 할 덕목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교육계에는 현장에서 검증된 리더가 드물다. 제도적으로 막혀 있기 때문이다. 우선 교육 분야에서 유권자의 손으로 뽑을 수 있는 선출직은 교육감이 유일하다. 기초단체장 선거가 광역과 기초 단위로 나뉘어 다층적 제도를 택하는 것과 대비된다. 더 큰 문제는 교육감 선거에 현직 교육자가 출마할 수 없다는 점이다. ‘지방교육자치에 관한 법률’ 등은 교육자의 출마를 엄격히 금지하고 있다. 결국 현장에서 직접 만나고 경험한 자질 있는 리더를 선택할 기회가 원천적으로 차단된 것이다.
결국 이 모든 문제는 우리 사회의 ‘미성숙한 교육 민주화’라는 한 단어로 요약된다.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라는 ‘민주주의의 꽃’이 다가오고 있지만, 정작 현장의 교육자들에게 이번 선거가 여전히 ‘남의 집 잔치’처럼 느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좋은 리더를 선택하기를 포기한 조직에는 미래가 없다.
김헌용 신명중 교사·함께하는장애인교원노동조합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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