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내 노래가 쓸모없는 세상을 꿈꿉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기 위해 치열하게 사는 가수 윤영배
달리는 ‘위험한 세계’ 속 그의 가난하고 청량하며 재촉받지 않는 삶
등록 2014-05-09 11:22 수정 2020-05-03 04:27
낡고 좁은 시골집 내부를 ‘규모 있게’ 나눈 윤영배의 방들엔 음반보다 책이 더 많았다.

낡고 좁은 시골집 내부를 ‘규모 있게’ 나눈 윤영배의 방들엔 음반보다 책이 더 많았다.

난폭한 세계와 불화하며 ‘깨진 구럼비의 섬’에 이발사가 깃들여 산다.

거대한 배가 침몰했고, 착한 사람이 버림받았으며, 어린 꿈이 바다에 묻혔다. 손짓과 걸음과 마음을 독촉하고, 풀과 바람과 땅을 몰아붙여, 슬픔과 울음과 분노의 겨를마저 빼앗는 세계가 무심하게 질주한다. 수직은 가파르고, 수평은 빽빽하므로, 그는 노래한다. ‘틈 없는 세계는 위험하다’고 이발사는 노래하고 만다.

사람이 지네/ 아프게 지네/ 누구에게도 앞서려 하지 않고 지네/ 너마저/ 나마저/ 너를 얻지 못해 흩어지네/ 너마저/ 나마저.()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경면 고산리. 외지고 궁벽한 농촌 마을. 검고 가지런한 현무암 담장. 낡고 칠 벗겨진 시멘트 집. 마당에 쌓인 크고 작은 나무토막들. 냄새 없고 정갈한 재래식 화장실. 식용유 깡통에서 익어가는 오줌 거름. 방 천장 안에서 뛰노는 쥐들의 발소리. 방문 틀에 맞춰 짠 책장과 가득한 책. 두어 개의 앰프와 손과 친한 통기타. 원두 가는 소리와 은은한 커피향. 자유롭게 날고 기는 파리와 벌레들. 가난하고 청량하며 재촉받지 않는 삶. 이발사, 윤영배. 웃음 좋은 그가 사는 풍경.

잔혹한 세계서 기본소득이 반가운 대안

“올여름 태풍 오기 전엔 손 좀 봐야 할 텐데….”

그가 지붕을 올려다봤다. 서울에서 녹색당 ‘당가’ 녹음을 끝내고 내려온 이튿날(4월30일) 아침이었다. 2002년 제주로 내려온 뒤 얻은 세 번째 집이다. 노부부가 세상을 떠난 뒤 2년간 비어 있던 집에서 그는 4년째 공짜로 살고 있다. “집을 물려받은 분이 되레 살아줘서 고맙다고 하시네요.” 이사 올 때 만든 처마는 2012년 태풍 볼라벤이 와서 떼어갔다.

“자연사를 허락하지 않는 세계는 잔인하다”고 윤영배는 말했다. “사고와 산재와 자살로 사람이 수없이 죽어도 우리는 일해야 하고 달려야 합니다. 아파하려면 멈춰야 하고, 바로잡으려면 멈춰야 합니다. 멈출 여유를 주지 않는 사회는 잔혹합니다.” 그는 “우리가 꿈꾸는 세상은 세월호가 가라앉은 세상과 양립할 수 없다”고 했다. 빗질의 기억을 잊은 그의 곱슬머리가 바람에 쓸렸다.

윤영배는 세 번째 EP 음반 (2013)로 ‘2014 한국대중음악상’ 3관왕(올해의 음반·최우수 모던록 음반·최우수 모던록 노래)이 됐다. “세상에 들려주고픈 절실한 말이 살아 있는 노래”라고 누군가는 평했다. ‘자본주의’ ‘선언’ ‘점거’ ‘구속’ 같은 묵직하고 뼈있는 제목들이 음반을 채웠다. 메시지와 완성도가 조화를 이뤘다는 찬사를 받았다. 수상 소감도 화제를 모았다. 시상식 당일 그는 ‘세 모녀의 죽음’을 보도한 기사를 읽었다. 3개의 상을 받는 동안 3차례 무대에 설 기회를 얻었다. 기본소득 도입의 필요성을 한 번, 두 번, 세 번, 잇고 붙여 말했다.

두 차례 수술 뒤 반년을 입원했다 돌아온 옆집 할머니를 찾아 윤영배는 안부를 묻고 말벗이 됐다.

두 차례 수술 뒤 반년을 입원했다 돌아온 옆집 할머니를 찾아 윤영배는 안부를 묻고 말벗이 됐다.

“내가 속한 사회에서 가난 때문에 누군가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은 언젠가 나의 일이 될 수도 있잖아요. 기본소득이 가장 반가운 대안이라고 믿어요.”

몇몇 사람의 난폭한 결정 우워허/ 자본주의 신자유주의/ (…) 성난 사람이 폭도가 되는 우워허/ 국가주의 기회주의/ 추추추 춤추며 떠떠떠 떠들며 투쟁/ 차차차 참지만 마하하 마할고 투쟁.()

고양이 ‘망고’가 품으로 뛰어올랐다. 2집 음반() 사진에 새끼고양이로 출연했던 망고는 이제 늘씬해진 몸매를 비벼대며 꾸벅꾸벅 졸았다. 모슬포 오일장에서 한 할머니가 내놓은 갓난 망고를 이효리·이상순 커플이 안쓰럽다며 사왔다. 딱히 돌보지 않아도 혼자 쥐를 잡아먹으며 고양이는 씩씩하게 자랐다. 망고의 턱을 간지럽히며 윤영배가 담배를 말아 피웠다.

뚜렷해진 노래 속 정치적 지향

윤영배는 1993년 유재하음악경연대회에서 동상을 받았다. 조동진·조동익 형제를 중심으로 모인 ‘하나음악’에서 활동했다. 장필순 등의 음반에 작사·작곡·연주로 참여했다. 자기 이름의 음반을 갖는 데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어쩌다가’ 노래까지 한 곡들을 묶어낸 건 17년이 지나서였다.

그는 은유로써 노래했다. 직설보다는 우회를 선호했다. 1집 (2010)와 2집 (2012)은 그렇게 만들었다. 에서 그는 바뀌었다. “어느 순간 예전처럼 노래하는 게 불편해지더라”고 했다. “이런 세상에서 내 노래가 너무 한가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도 했다. 사회·정치적 지향을 선명하게 드러냈고, 그가 따라가는 마음길의 방향도 뚜렷하게 길어냈다. 강요하기보다 들려주고 요구하기보다 읊조리는 화법은 유지했다.

“고음이 나오길 하나, 음이 정확하길 하나…. 상을 주는 분들도 고민이 많았을 거예요.” 그의 입매가 빙긋했다. “다만 내 고민이 한쪽으로 쏠린 생각은 아니었구나 싶었습니다. 나처럼 이 세계를 불편해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고요.” 3개의 상으로부터 그가 읽어낸 의미였다.

어느 인터뷰에선가 말했다. “우리가 어딘가에 속해 있고 어딘가에 강제돼 있는지 최선을 다해 책임질 수 있는 한도까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는 자전거를 끌고 바다를 건너다녔다. 서울 마포의 두리반 철거싸움을 찾아갔고, 경기도 양평의 두물머리 농민들 곁에 머물렀다. 쌍용자동차·현대자동차 철탑과 재능교육 종탑 고공농성에 노래를 보탰다. ‘Vote For Green’과 ‘No 765,000V 초고압 송전탑’ 문구를 붙이고 달리는 그의 자전거는 가장 정치적인 자전거다.

“기대와 현실이 따로 노는 세계는 아주 위험합니다.”

윤영배는 ‘두려움’과 ‘위험함’을 구분했다. 두려움이 자연에 대한 경외에 가깝다면 위험함은 인위적·의도적으로 강제된 폭력이다. “자본주의는 절대 주어지지 않을 기회에 목매게 하는 허위의 시스템”이라고 그는 말했다. “추추추 춤추며 떠떠떠 떠들며 투쟁”으로 맞서야 하는 ‘위험한 세계’다.

나는 비매품이라/ 나를 팔지는 않아 언제라도/ 나는 거부한 거야/ 거절당한 게 아니야 누구라도/ 나는 하나뿐이라 거래할 수도 없어.()

이발사는 ‘필명’이다. 웬델 베리의 소설 에서 따왔다. 1999년 네덜란드 음악학교에서 공부할 때부터 머리를 직접 잘랐다. 그에게 이발은 ‘미용’이 아니라 불편한 부분의 ‘제거’였다. 머리를 직접 깎는 행위를 “시장에 예속되지 않겠다는 의지”라고 그는 “확대해석” 했다.

가난하고 넉넉한 삶에 대하여
1

1

제주도에 정착한 것은 ‘거부’였다. “나는 스스로를 팔지 않기 위한 거부라고 생각하는데 사회적 잣대로는 거절당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요. 가진 것도 없고 흔한 자격증도 없으니까요.” 그는 자신의 블로그에 ‘자발적 가난’이란 글을 써 친구들에게 말을 걸었다. “가난의 의미와 가치에 대한 너그러운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네. 상대적인 박탈감이나 비참함의 고정된 이미지를 벗어나, 소박하게 고르고 너그럽게 생태적인 풍요로움을 상상할 수 있는, 그런 넉넉한 삶에 대해서 말이네.” 저작권료만으로는 생활하기 힘들 때 그는 가끔 밭이나 공장에서 일을 하기도 한다. ‘저항하는 세계’란 제목의 글도 썼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얼마나 적극적인 행위인가에 대해,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없는 시대에 아무것도 하지 않기 위해 얼마나 치열해야 하는지에 대해….”

제주도에서 그의 노래는 오히려 강렬해졌다. “온통 공사판이에요. 재주해군기지 건설처럼 서울보다 훨씬 심각한 갈등의 현장들이 제주 도처에 있어요. 제주가 망가지는 속도는 도시보다 훨씬 빨라요.”

우영밭(‘텃밭’을 뜻하는 제주 방언)에서 그의 머리를 닮은 채소들이 삐죽삐죽했다. 콩과 옥수수와 마늘과 부추와 민들레가 이름 모를 풀들과 구별 없이 자랐다. 그는 자신의 농법을 ‘건달농’이라고 했다. 비료를 쓰지 않고, 땅을 뒤집지 않되, 잡초도 뽑지 않고 위만 잘라준다고 한다. 방치돼 호미도 들어가지 않던 땅이 지금은 생명을 틔워올릴 만큼은 회복됐다. 그가 담 너머 옆집으로 건너갔다. 두 차례 수술 뒤 반년을 입원했다 돌아온 할머니 앞에서 말벗이 됐다. 할머니는 “아주 부지런하고 착하다”면서도 “몇 살인데 흰머리가 이리 많냐”고 물었다. 할머니 밭에서 따온 머위나물에 제주 녹색당원들과 만든 된장을 올려 그는 현미밥 두 공기를 비웠다.

저기 철탑 위에 오르는 사람이 보이는가/ 내 마음보다 더 높은 다짐들/ 저기 망루 위에 서 있던 사람이 보이는가/ 내 눈물보다 더 뜨겁던 새벽을….()

윤영배는 ‘가수의 정체성이 없는 가수’라고 스스로의 가수됨을 설명했다. 노래하는 이유를 “상대적으로 쉽게 할 수 있어서”라거나 “생각을 노래로 정리하는 일에 익숙해서”라고 했다. “가수라는 것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아요. 이 바닥에서 저는 완전히 건달입니다. 그냥 음악처럼 살고 싶을 뿐이에요.”

그는 노래하는 일보다 땔감 마련하는 일을 더 중히 여긴다. 집안 마루 한가운데엔 커다란 나무 난로가 있다. 전에 살던 주인이 아궁이를 막아 바닥 난방이 안 된다고 했다. 동네 전체가 비슷하다. 주민 대부분이 독거노인인 마을에서 집을 덥힐 나무를 해올 사람이 없어서다. 윤영배는 적어도 하루 한두 리어카의 나무를 한다. 밑불거리와 중불거리를 따로 주워야 하고 비 오고 눈 올 때를 대비해 걸러선 안 된다고 했다.

가수 정체성이 없는 가수

“땔감을 할 줄 아는 음악을 하고 싶어요. 자기 집을 덥힐 땔감을 스스로 마련할 줄 아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음악은 전혀 다릅니다. 생활과 분리된 음악이란 전문적인 생산 영역이 되고 말아요. 정서적·감정적 소비의 도구일 뿐입니다.” 그의 관심은 “어떻게 노래하느냐보다 어떻게 살아가느냐”라고 했다. “결국은 ‘그래서 무엇을 노래할 거냐’입니다. 음악 지식과 기술을 갖고 있다, 그럼 이제 뭘 노래할래, 질문은 그렇게 향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윤영배는 노래 자체보다 그의 노래가 필요할 수밖에 없는 사회구조에 더 관심이 많다. “땔감 하고 밥해먹는 것 빼고 ‘인식의 폭을 넓히는 일’이 집에서 하는 일의 전부”라는 가수. 좁은 집을 규모 있게 쪼갠 그의 방들엔 음반보다 책이 많았다. 책장엔 그가 ‘최고의 교과서’로 꼽는 이 가득했다. 이 세계가 던지는 의문을 그는 을 읽으며 풀었다고 했다. 제주시 아라동(두 번째 집)에 살 땐 그의 집에서 독자모임도 열었다. 리 호이나키의 와 비비안느 포레스테의 가 책상에 내려와 있었다. 경남 밀양 할머니·할아버지들의 구술을 모은 는 직접 서평을 썼다. “하나의 생물체가 전혀 다른 종자로 거듭날 수는 없지만 대신 넓어질 순 있다”고 그는 믿는다.

천년의 숲과 천년의 강과/ 백년의 한 농부가 사는/ 이름은 길고 뜻은 많아도/ 한 가지 꿈 변함이 없네.()

윤영배는 자청해서 ‘녹색당가’를 만들고 있다. 행사 때 함께 부를 노래가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손을 들었다. 작곡, 편집, 녹음, 가수 섭외까지 도맡았다. 이상순, 이한철, 시와, 고찬용 등 친구들(이상순과 시와는 정식 당원)을 불러냈다. “정당의 일이라 약간 걱정하기도 했는데 다들 ‘녹색당이잖아’ 하며 흔쾌히 도와줬다”고 한다. 윤영배는 녹색당(2012년 3월 창당) 발기인대회 때부터 이름을 올렸다. 제주시 애월읍까지 자전거를 2~3시간 달려 대회에 참석했다. 녹색의 가치로 정치가 바뀌지 않으면 ‘위험한 세계’를 견제할 수 없다는 다급함이 컸다. 4월28일 당원들과 함께 가사를 쓰고 녹음한 노래는 지금 후반 믹싱 작업 중이다. “온 세상이 다, 온 마음이 다, 행복하고 소박하게 살 수 있는 길”이란 문장이 선율에 실렸다.

윤영배는 가난하다. 자신이 가난하므로 가능한 ‘가난한 쓸모’를 그는 믿는다. “세상일에 무심할 수 없고 천년만년 살 것도 아니라 내 가난한 쓸모를 찾아 떠돌고 있다.”(블로그 ‘가난한 쓸모’)

이상순 등과 함께 녹색당가 작업 중

“저의 노래가 쓸모없는 사회를 꿈꿉니다. 그런 사회에서 같이 살고 싶을 뿐입니다. 제 노래가 쓸모라면 노래를 할 것이고, 삽질을 하는 것이 쓸모라면 삽질을 하겠습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이야기를 들을 사람이 필요하다면 가만히 앉아 귀기울이겠습니다.”

인터뷰를 마친 그는 ‘같은 집에 사는 동무’와 맥주 두 박스를 챙겼다. 2주일치 저녁밥이라고 했다. 유럽에 일 보러 간 친구들 집에서 개와 고양이 6마리를 돌봐주기로 했다. 기자들의 렌터카에 맥주를 실어 애월읍으로 건너갔다. 두 사람이 이효리·이상순 부부의 집 대문을 열자 반려견 ‘구아나’와 ‘모카’가 반기며 달려나왔다.

제주=글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사진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1010호 주요 기사



  [표지이야기] 가만있지 마라
  [표지이야기] ‘짐이 곧 국가’ 다만 ‘국가 개조’에선 빠지겠소
  [표지이야기] 적어도, 김기춘·남재준·김장수
  [표지이야기] ‘음모론’이 믿을 만하다?
  [레드기획] 한국 재난영화와 세월호는 왜 이다지도 닮았나
  [사회] “내 노래가 쓸모없는 세상을 꿈꿉니다”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