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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있지 마라

따로 함께 모인 광화문 1인시위, 유모차와 행진한 엄마들, 실명으로 건 현수막…

사회를 질식시켜가는 정부의 대응 전략에 ‘가만히 있지 않겠다’로 응답하는 사람들
등록 2014-05-06 14:46 수정 2020-05-03 04:27
대학생들과 고교생들이 30일 오후 서울 중구 명동 거리에서 세월호 침몰 사고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명확한 책임처벌을 요구하는 행진을 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대학생들과 고교생들이 30일 오후 서울 중구 명동 거리에서 세월호 침몰 사고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명확한 책임처벌을 요구하는 행진을 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가만히 있어라. 혼자서 울어라.

세상은 그렇게 말한다. 세월호를 통해 깨달은 뼈아픈 자각, ‘대한민국은 세월호다’. 세월호 안에서 가만히 있으란 말밖에 듣지 못했던 희생자처럼, 세월호 같은 사회에서 정부는 ‘혼자서 울어라, 가만히 있어라’ 조용한 신호를 보낸다. 경찰이 세월호 관련 유언비어를 엄단한다고 발표한다. 그러면 시민은 인터넷에 글을 올리고 댓글을 달기가 무섭다. 방송통신위원회는 재난상황반을 편성해 ‘방송 오보 내용’을 모니터링한다는 내부 문건을 만든다. 이것은 방송 통제로 읽힌다. 불행하게도 이것은 경험을 통해 얻은 교훈이어서 설득력을 얻는다. 그래서 박근혜 정부의 안전사회는 질식사회다. 공권력은 조용히 집에서 방송을 보며 혼자서 울라고 권한다. 그러나 숨죽여 울지 않겠다, 혼자만의 슬픔으로 남기지 않겠다, 눈물을 닦으며 세월호가 세월에 묻히지 않도록 행동에 나선 이들이 있다. 혼자서 혹은 모여서.

여기, 1인이 있다. 봄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지난 4월29일, 서울 광화문 이순신 동상은 외롭지 않았다. 동상 옆에서 단발머리 여성이 초록색 우산을 쓰고 앉아 하염없이 책을 읽고 있었다. ‘This is not red’. 근조 리본이 달린 노란 팻말을 놓고 그녀는 버트런드 러셀의 , 해나 아렌트의 를 읽었다.

“페이스북 밖으로 나오고 싶었다”

이날 아침 그녀는 경기도 안산 임시분향소에 들렀다. 그리고 광화문 거리로 향했다. 대학원에서 문화콘텐츠와 지역연구를 공부하는 조은진씨는 “막상 손팻말을 펴기가 너무 힘들어 한참을 망설이다 여기에 앉았다”고 말했다. 이날의 경험을 그녀는 페이스북에 “이걸 한다고 세상이 달라질까, 누가 알아주기나 할까… 사절지에 글씨로 쓰고 그것을 광화문에서 펼치기까지 저는 끊임없이 제 자신과 싸워야 했습니다”라고 적었다. 그렇게 자신과 싸우면서 광화문에 앉은 이유를 조씨는 “페이스북 밖으로 나오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눈물을 글썽이며 그녀는 덧붙였다. “‘좋아요’만 눌러서는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경계, 그게 나 자신의 경계가 아닐까 생각했다. 그걸 넘고 싶었다. 세월호 참사가 무엇을 위해 살아왔나, 자각하는 계기가 됐다. 무엇을 위한 희생인가, 답을 찾고 싶었다.”

걸핏하면 선동 혐의를 씌우는 사회에서,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공공영역 회복’이었다. 혹시나 오해가 있을까 ‘빨갱이가 아니다’라고 써야 했다. 그러나 경찰서 정보과 직원은 그녀에게 다가와 “이거 무슨 뜻이에요? 방사능 반대예요?” 물었다. “목적이 뭐냐. 언제까지 할 거냐”고 다그쳤다. “우선 책 한 권 다 읽을 때까지”라고 답했지만, 염려는 현실이 되었다. 광화문에 와서도 머뭇거렸던 그녀가 자리에 앉을 용기를 냈던 것은 “도착하니 1인시위를 하는 두 분이 먼저 와 계셨기” 때문이다. 그녀는 “따로 왔는데 묘한 연대감이 들었다”고 말했다.


“조문을 갔다가 나오는데 학생 어머니가 ‘잊혀지겠죠’ 하셨어요.” 오아무개씨는 울먹이며 약속을 전했다. “어머니, 제가 뭐라도 할게요. 안 되면 광화문 사거리에 피켓이라도 들고 서 있을게요.”


그렇게 그녀의 오른편에 비옷을 입은 여성이 앉아 있었다. 중학교와 유치원에 다니는 자녀를 둔 오아무개(38)씨다. 검은 정장을 입은 그녀는 집에서 가져온 의자에 앉아 비닐로 감싼 팻말을 들었다. ‘세월호/ 다 밝히라’. 다른 엄마와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녀는 여기에 나왔다. “안산성모병원에 조문을 다녀왔어요. 나오는데 학생 어머니가 ‘잊혀지겠죠. 지금까지도 그랬잖아요’ 하셨어요.” 그녀는 울먹이며 약속을 전했다. “어머니, 제가 뭐라도 할게요. 안 되면 제가 절대 잊혀지지 않도록 광화문 사거리에 피켓이라도 들고 서 있을게요.” 약속을 위해 ‘언제까지 할 거냐’고 물었다. “실종자가 모두 가족 품으로 돌아갈 때까지는 하고 싶어요.”

“우리 아가랑 대한민국에서 살고 싶어요”

교회를 다니는 그녀는 ‘정치는 가이사의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이번 사고로 정치가 남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며 “그래도 세상을 향해 싸운다기보다는 뭔가 행동한다는 의미로 나왔다”고 말했다. 그녀는 매일 막내가 유치원에 갔다가 돌아오는 시간(오전 11시~ 오후 3시)에 나올 생각이다. 3시가 다가와 자리를 정리하는 그녀에게 조은진씨가 “내일도 나오신다고요?” 묻자 “내일은 조금 일찍!” 하면서 자리를 뜬다. 이렇게 혼자서 울었던 ‘1인들’은 서로를 만나서 ‘우리들’이 됐다.

다음날인 4월30일은 눈부시게 화창했다. 이날은 엄마들이 유모차를 밀고 나왔다. 세월호를 생각하는 엄마들의 집회가 열리는 강남역 가는 길에도 엄마들은 보였다. 사당역에서 지하철을 탄 엄마들이 미는 유모차에는 노란 리본이 붙어 있었다. 4명의 엄마들은 그릇에 담아온 이유식 과자를 서로의 아기들 입에 넣어주었다. 다가가 물으니 “경기도 안양·과천·의왕에서 왔다”고 답했다. 집회가 열리는 10번 출구로 가다가 엄마들은 “수유실에 잠시 다녀와야 한다”며 다른 쪽을 향했다.

이날 정오의 10번 출구, 엄마와 아기들 행렬이 있었다. 앞에는 유모차를 미는 엄마들, 뒤에는 아기를 안은 엄마들이 두 줄로 행진을 시작했다. ‘우리 아가랑 대한민국에서 살고 싶어요’ ‘마지막 시신까지 엄마의 품으로’. 아기를 안은 손으로 든 팻말은 여기에 왜 왔는지 말하고 있었다. 유모차에서 칭얼대는 예나를 달래며 걷는 최홍이(37)씨는 팻말에 ‘Miss President, Keep your promise’라고 썼다. 그는 “슬로베니아 출신인 남편과 함께 문구를 정했다”며 “안전사회를 약속한 대통령이 이럴 수가 있느냐”고 말했다. 촛불집회도 나간 적이 없다는 그녀는 “집에서 슬퍼하는 것밖에 할 수 없어 화가 났는데 마침 집 주변에서 이런 행진이 있어서 나왔다”고 말했다.

멀리서 온 이들도 있었다. 자신을 ‘정글맘’(34)이라고 소개한 엄마는 아침 8시30분 강원도 춘천을 출발해 강남역에 도착했다. 그녀의 슬로건은 ‘알고도 보고도 눈감지 않겠습니다. 간접적인 가해자가 되지 않겠습니다’. 그녀는 전날도 남편과 함께 춘천 촛불집회에 갔다. 28개월 아들을 유모차에 앉히고, 8개월 딸을 품에 안고 걷는 엄마도 있었다. ‘아이를 둘이나 데리고 나오기 어렵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하운이맘(35)은 “당연히 나와야 한다고 생각했다”며 “같이 모여서 나올 수 있었다”고 말했다. 얘기를 나누며 걷는 사이 유모차 행렬은 점점 길어졌다.

유령처럼 떠도는 침묵

1시간 동안의 행진이 끝나자 전주영씨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전씨는 “지난밤에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나 걱정이 밀려와 밤잠을 설쳤다”고 말했다. 이날 집회는 그녀가 활동하는 인터넷 카페 ‘자연주의 출산 가족모임’ ‘방배마담’ ‘서초 엄마들의 모임’에 제안글을 올리면서 시작됐다. 그녀는 행진하는 엄마들에게 “자극적인 문구를 삼가달라”고 부탁했다. “자칫하면 아이들이 공격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아이를 업고 생전 처음 집회 신고를 하기 위해 경찰서에 들락거린 이유는 분명했다. “엄마들도 집회하는 것 어렵지 않다. 밖에서 함께 이야기하자.” 공감한 이들이 늘면서 집회 신고도 다시 했다. 참가 인원을 20명에서 100명으로 늘린 것이다. 그렇게 세월호 참사 시위 ‘엄마라서 말할 수 있다’는 성사됐다.

다시 과천·안양·의왕 엄마들을 만났다. 12개월 도현이, 15개월 이레 등을 자연출산하며 만난 이들은 “혹시 자기만족을 위해 나오는 것이 아닌가를 고민했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살아서 행복하다, 아이들에게 그렇게 생각하게 해주고 싶어요.” 이들이 말하는 그래도 나와야만 했던 이유다. 아기를 보면서 손팻말 만드는 일도 쉽지 않아 서로 아기를 봐주는 사이에 얼른 만들었다. 이들은 매일 촛불을 밝히는 엄마의 얘기도 전했다. 이레 엄마 ‘춤추는 기린’은 “카페 회원 한 분은 매일 정오 의왕 용화사에서 촛불 기도를 드리고 우리도 시간이 되면 함께한다”고 말했다. 그녀는 “절에서 촛불 기도를 올리는 엄마는 교회에 다니는 분”이라고도 전했다.

이날 강남에서 엄마들이 나섰다면, 강북에선 청년들이 행진했다. ‘가만히 있으라’. 이날 오후 4시, 검은 옷을 입은 청년들이 명동 밀리오레 앞에 모였다. 그들은 손에 ‘가만히 있으라’고 적힌 종이를 들었다. 입가엔 흰 마스크를 썼다. ‘가만히 있으라’고 하는 정부에 대한 항의의 표시인 것이다. 이날 침묵 행진의 제안자인 용혜인(25)씨는 청와대 게시판에 이렇게 썼다. “교훈을 잊은 결과 우리가 얻은 것은 여전한 죽음과 뻔뻔한 대통령뿐입니다. 그런데도 세상은 조용하기만 합니다. 사람들은 열심히 모금을 하고,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며 ‘착한 추모’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래도 괜찮은 걸까요?” 그의 제안에 공감한 이들이 이날 홍익대 앞, 명동, 시청에서 행진을 벌였다. 지나던 이들도 지나치지 못했다. 명동에 쇼핑을 나왔던 중학생들이 한참을 기다려 행진에 함께했다. 조카와 명동 나들이를 나온 삼촌도 명동성당까지 행진에 참여했다. 이날 발언한 이종혁(23)씨는 “정부는 분향소를 외곽에 설치하고, 실내에서만 추모를 강요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정민주(21)씨는 “저는 분노보다 슬픔보다 무섭습니다”라고 울먹였다.

경희대생 용혜인씨에게 세월호 참사는 “남의 일이라고 말할 수 없는 일”이다. 그녀는 단원고가 있는 안산시 단원구 고잔동에서 중학교를 다녔다. 지금도 집이 안산시 상록구다. 한때는 조용히 살기로 결심한 그녀지만 세월호 참사 앞에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유령처럼 떠도는 침묵’ 속에서 그녀는 학교에 대자보를 붙였다. 다음날은 대자보 앞에서 리본을 나눠줬다. 참담한 정부의 무능력과 자본의 극악한 행태를 바꾸는 행진을 벌이자고 청와대 게시판을 통해 제안했다. 그녀는 “무엇을 할 것인지, 정해진 것은 없다”며 “무기력을 극복하는 것에서 새로운 합의가 시작된다”고 말했다.

자원봉사는 거부당하고 경찰은 출석 요구

여전히 공권력은 ‘가만히 있으라’는 신호를 보냈다. 용씨는 “오늘 행진을 추모행사로 보아도 무방한데 경찰이 쫓아와 ‘불법집회’라고 했다”며 “이렇게 모이고 움직이는 사람들을 위축시킨다”고 말했다. 이명박 정부 때부터 심해진 제약은 자유의 공기를 질식시키고 있다. 청와대 게시판에 올라온 ‘당신이 대통령이어선 안 되는 이유…’라는 제목의 글은 ‘자진’ 삭제됐었다. 세월호 실종자 무사귀환을 바라는 촛불집회는 불허됐다. 법원이 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여 당분간 촛불집회는 열 수 있게 됐다. 이런 일들이 불러온 위축효과는 상당하다. 엄마들의 행진을 기획한 전주영씨는 “혹시 불이익을 당할까 집안 어른들이 한 번만 하라고 당부한다”고 전했다.


심영섭 교수는 “경찰이 계속 이러면 당당히 감당할 의지가 있다”고 말했다. 구조에는 철저히 무능했던 국가는 시민을 ‘족치는’ 일에는 여전히 열심이다.


29일 오후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일반 시민들이 세월호 침몰 참사에 대한 애도와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1인 시위를 벌이고 있다. 한겨레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29일 오후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일반 시민들이 세월호 침몰 참사에 대한 애도와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1인 시위를 벌이고 있다. 한겨레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심리적 위협을 넘어서 실질적 위험을 느끼는 사람도 있다. 심영섭 대구사이버대 상담심리학과 교수는 “자원봉사 전화인 줄 알고 반갑게 받았는데 경찰의 전화였다”며 분노했다. 심리학자이자 영화평론가인 그는 “이번 참사를 설명하는 ‘상징적 경험’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대학원 시절부터 25년 동안 심리상담을 해왔다. 세월호 참사가 터지자 당연히 무언가를 조용히 해야 한다고 느꼈다. 그래서 안산시 교육청에 심리상담 자원봉사를 신청했다. 그러나 “다음날 오라”는 답변만 받았다. 하지만 다음날은 대구에서 수업이 있었다. 그는 “한 번만 만나게 해달라. 휴일에 했으면 좋겠다”고 민원을 넣었다. 애타게 기다린 자원봉사는커녕 경찰의 전화를 받은 ‘외상’은 아직도 가시지 않는다. 출석요구서도 날아왔다. ‘귀하에 대한 정보통신망법 위반(명예훼손) 사건에 관해 문의할 일이 있으니 5월13일 경찰에 출석하라.’ 심 교수는 “정부는 전문가로서 나에 대한 관심은 전혀 없고, 조사만 하겠다고 한다”고 말했다.

그는 세월호 참사에 대해 “미친 듯이 진실에 다가가려고 노력했다”고 돌이켰다. 그의 트위터는 온통 세월호 참사에 대한 걱정과 울분과 분노와 슬픔으로 채워졌다. 이렇게 수많은 메시지 중에서 경찰은 단 하나만 주목했다. ‘한모양이 페이스북 메시지로 구조 요청을 한 게 사실이랍니다. 이게 사실이면 배도 넘어지고 있고 나라도 넘어지고 있네요. 청문회를 열어야 합니다.’ 그가 올린 글은 그만 올린 글이 아니었다. 진도의 진실이 전해지지 않는다는 의혹이 가득한 가운에 수많은 이들이 리트위트한 글이다. 나중에 구조 요청이 조작으로 밝혀지자 그는 ‘제가 올린 트위트가 사실이 아니라네요’라고 밝히고 글을 삭제했다. 이것을 문제 삼아 뒤늦게 경찰은 출석요구서를 보냈다. 그가 상담한 변호사는 “피해자도 특정되지 않고, 비방의 목적도 없다”며 “출석할 필요가 없다”고 조언했다. 심 교수는 “경찰이 계속 이러면 당당히 감당할 의지가 있다”고 말했다. 구조에는 철저히 무능했던 국가는 시민을 ‘족치는’ 일에는 여전히 열심이다.

촛불집회 가까운 데 어디서?

이렇게 자유의 숨통을 조이는 정부에 시민은 실명으로 응답했다. 지난 5월1일, 서울 망원역에서 마포구청 사이의 도로에 노란색 현수막 70개가 줄지어 나부꼈다. 성미산 공동체 주민, 섬돌향린교회 교인, 망원시장 상인, ‘민중의 집’ 민중이 문구는 달라도 같은 마음을 담아 내건 현수막이다. ‘게이가족 권&석’은 ‘희생자분들을 잊지 않겠습니다’라고 다짐했고, 신북초등학교 5학년 이찬영군은 ‘형과 누나들이 하루빨리 돌아오기를 두 손 모아 기도드립니다’라고 소망했고, 섬돌향린교회 영욱은 ‘슬픔의 띠 두르고 분노로 타오르자!’고 호소했다. 마포 ‘민중의 집’ 정경섭 대표는 “인간으로 우리의 존재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사건”이라며 “개인이 직접 추모할 기회를 갖기로 했다”고 실명의 취지를 설명했다. 그러나 마포구청은 현수막 70개 중 50개를 철거했다.

벌써 서울 30곳, 전국 154곳에서 세월호 촛불집회가 열리고 있다(5월1일 기준). 이렇게 곳곳에서 벌어지고 확산되는 촛불집회와 시민들을 연결하는 ‘사이버 오작교’도 만들어졌다. 진보넷 활동가들이 위치를 검색창에 넣으면 가까운 촛불집회 장소와 분향소가 검색되는 ‘우리동네 촛불’(candlelights.kr)을 개발한 것이다. 경남 밀양 송전탑 지도를 만든 경험이 바탕이 됐다. 뎡야핑 진보넷 활동가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어떻게 연결할까 하는 고민에서 시작됐다”고 말했다.

‘당신이 대통령이어선 안 되는 이유…’를 쓴 박성미 영화감독은 “시민들이 정말 예쁘다”고 말했다. 이렇게 빨리 시민들이 움직일 줄은 몰랐다는 것이다. 박 감독은 “세월호 참사를 극복하려 애쓰며 우리는 서로의 선의를 확인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몫을 하기 위해 ‘우리의 책임’을 주제로 글을 쓰고 있다. 그는 “세월호 참사는 진행형”이라며 “진도에서 눈을 떼서는 안 된다”는 각성도 잊지 않았다. 이렇게 세월호를 위해 움직이는 사람들의 행동은 시작됐다. ‘무엇을 할 것인가’는 모이고 움직이는 사람들이 결정한다.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김성환 기자 hwan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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