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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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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이 끝나고

등록 2013-12-25 14:38 수정 2020-05-03 04:27

뻔한 말이지만 사람이 살다보면 본업이 배우가 아니어도 연극을 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 가장 최근에 오른 무대는 내 개업식이었는데, 내가 신세가 좀 나아져서 서울 끄트머리 강동구에서 서울의 중심인 중구로 온 것처럼 꽤나 괜찮고 뻔뻔한 연기를 했다. 앞날은 알 수 없지만, 나는 이제 어떤 자리에서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정도는 알 나이가 되었고 알 정도의 경험도 조금은 했다고 생각한다.

북이나 남이나, 거기가 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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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간이 훌쩍 넘는 연극을 마친 뒤 탈진한 나는 며칠 동안 남의 무대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렇게 말하면 거창하고 막말로 하자면, 실은 ‘먹고살기 바빠죽겠는데 남의 일에 신경 쓸 여유가 어딨겠느냐’는 것이다. 한 일주일 정도 지나서야 다시금 인터넷 뉴스 창을 뒤적이고 남이 만든 무대들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그중 큰 무대 몇 가지를 이야기하면 대학가엔 이런 난세에 ‘안녕들 하시냐’는 안부로 시작하는 대자보들이 무대를 이루고 있다는 소식이 있었고, 또 누군가는 그 대자보에 악의적으로 북쪽 마을의 젊은 최고 존엄의 사진을 붙이고 있다는 소식도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누가 보면 이제 국가보안법이 폐지됐다고 해도 믿겠구나 싶었다. 세상에 김정일 사망 2주기에 인공기와 김정은의 사진이 버젓이 대자보에 붙어 있는 남한 대학가라니.

북녘에서도 뭔가 대단한 무대를 만드셨었다. 평양에서 2인자로 일컫는 장성택이라는 아저씨가 갑자기 설설 끓는 보일러에 삶아버려야 하고 전기로에 넣어 흔적도 없이 태워버려야 하는 존재가 돼 있었다. 지은 죄목은 남한에도 이미 재판 중인 사람이 있는 내란 음모라고 한다. 그리고 보란 듯이 이젠 만고역적이 된 그가 수갑을 차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습이 찍힌 사진이 공개됐고 나는 평소 궁금했던 북한의 법정 사진을 구경할 수 있었다. 법정도 하나의 무대라고 생각하는지라 흥미로운 사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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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북한 정부는 제대로 재판부가 구성돼 재판을 진행한 적이 있을까?’ 하는 의심이 컸다. 법원에 들락날락한 경험이 있는 나로선 장성택이 있는 재판정 내부는 마치 사진을 찍기 위해 엉성하게 만든 세트 같다는 느낌이 강했고, 역시나 항소나 상고심 따윈 없이 그가 나흘 만에 사형 집행을 받았다는 뉴스가 전해졌다. 사람들은 “고모부도 저렇게 보드마커만 한 총알 90발로 쏴 죽이는 북한 정부 잔혹하다”는 댓글을 덧붙였다. 하긴 박격포로도 사형 집행을 하는 나라니 저런 댓글은 양반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여튼 통일의 동반자이자 반국가단체인 북한 역시 남한 못지않게 블록버스터급 무대를 만들어 체제 유지를 위해 힘쓰고 있었다.

굳이 남북을 대결 구도로 해서 쓰고 싶진 않지만 이것은 한번 비교해보고 싶다. 과연 남한과 북한 둘 중 누가 더 그럴싸한 무대를 만들고 있을까? 2인자인 장성택이 실각 나흘 만에 기관총 사형을 당한 것도 물론 상상 못한 공상과학소설(SF) 같은 사건이지만 이미 남한 역시 대법원 판결 뒤 하루도 안 지나 8명의 목을 매달아놓은 전적이 있는 나라 아닌가.

반도에 넘쳐나는 예능과 애드리브

인터넷은 됐고 이제 TV를 틀어봤다. TV에서도 맙소사 에서 나오는 김정일 사망 2주기 추도식 영상을 송출하고 있었다. 심지어 김정은의 머리가 헝클어지고 눈의 초점이 풀려 있다는 등 디테일한 소식마저 속보로 방송하고 있었다. 나는 “아, 대통령께서 용단을 내리시어 이제야 낮은 수준의 연방제 통일이 되었나보다” 하는 깨달음을 얻을 뻔했다.

알 나이가 되었고 알 정도의 경험도 했다는 말은 취소한다. 반도 전체가 말도 안 되는 예능과 애드리브로 넘쳐나니 무엇이 무대고 무대가 아닌지 알 수가 없다. 관계없이 무대는 뻔뻔하게 다시 막이 오를 것이다. 연극을 즐겨 보는 편이지만 이런 무대는 사양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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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근 사진관 사장 겸 국가보안법 피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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