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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의 이계삼에게

등록 2013-11-30 15:20 수정 2020-05-03 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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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삼에게. 경남 밀양의 송전탑 공사가 재개된 지 어느새 두 달. 그사이 밀양에서 들려오는 절박한 소식들을 접하면서도 여태 가보지 못했구나. 일흔넷 이치우 어르신의 분신 자결 이후 2년 가까이 혼신의 힘을 다한 노력에도 공사가 기어코 재개됐단 소식을 접했을 때 두려웠어. 그래서였나. 그 고통의 현장에서 비껴서 있고 싶었어. ‘대처해야 할 다른 현안도 얼마나 많은데….’ ‘밀양은 그래도 전국적 관심사이기라도 하지, 청소년 인권 의제는 누가 챙겨!’ 변명거리를 찾고 나니 밀양에서 전해오는 다급한 타전들을 멀리하는 게 좀더 쉬워지더라. 무서운 속도로 공사 구간이 느는 모습을 보면서는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무력감마저 찾아들었어. 그리고 어느 순간 밀양 싸움이 빨리 끝났으면 하고 생각하는 나를 발견하곤 흠칫했어. 주민들이 견뎌낸 울분과 불면의 시간들 속에 제대로 젖어본 적도 없던 내가 온전히 내 것이어선 안 될 체념 앞에서 서성인다는 게 순간 부끄러웠어. 깊어가는 추위보다 사람들의 냉담과 섣부른 체념이 더 차디찼을 주민들에게 미안했다.

내 섣부른 체념과 냉담이 부끄러웠다

계삼아. 얼마 전 16일간의 도보순례를 마치고 서울 대한문을 찾아온 그대와 주민들은 웃고 있더구나. 얼마나 막막할까, 얼마나 고단할까, 얼마나 시릴까 싶었는데 웃더구나. 그날 대책위 김영자 총무님이 밤하늘과 비닐 한 자루 이불 삼아 그대와 할매들이 산속의 밤을 지새운 이야기를 들려주셨지. 마치 세상에서 가장 슬프도록 아름다운 로맨스처럼. 주민 한 분은 밤늦게까지 대한문 화단을 지키고 선 경찰들을 보고 한 말씀 하시더라. ‘엄마야~ 와 이 늦은 시간까지 사람을 이리 세워놓노. 추운데 어여 집에 들어가라 카지!’ 숱하게 짐짝처럼 들려나가고 내쳐졌을 분들이 경찰이라면 치가 떨릴 텐데, 그 순간 제복이 아닌 사람을 보시더라. 그리고 알겠더라. 그 맑고 따뜻한 단단함이 지금까지 밀양 싸움을 지탱해온 힘이었음을. 떠올랐어. 쌍용차 해고자들,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고압 송전탑 위에 올라 고립무원의 싸움을 이어갈 때 ‘우리는 그래도 땅 위에서 안 싸우나. 저분들은 저 위에서 얼마나 힘들겠노’라며 그들을 찾아갔던 밀양 주민들의 모습이. 밀양에 공수부대를 파견해라, 송전탑이 싫으면 아궁이나 때며 살라는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말들을 녹이는 건 바로 그런 마음들 아니겠니. 그리고 감사했어. 바로 그 노동자들이 밀양으로 가는 희망버스를 다시 제안해주어서.

지난해 밀양으로 가는 첫 번째 탈핵 희망버스를 준비하면서 그대가 그랬었지. 앞으로도 지금처럼 외롭게 싸울 각오를 하고 있다고. 밀양의 이야기가 점차 사람들의 관심과 기억에서 멀어지고 있는 지금, 그대는 또 어떤 각오를 하고 있을지 궁금하다. 최근 칼럼에서 “나는 내 자식에게 좋은 삶의 본을 보여주지 못할 것을 두려워할 뿐, 자식 교육에 무심한 것을 자책하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썼더구나. 밀양으로 가는 희망버스가 내게도, 내 청소년 친구들에게도, 그대의 아이에게도 서로를 감전시킬 좋은 삶의 본이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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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이 되어 밀양으로 가자

최근 연극 워크숍에서 경이로운 체험을 했어. 아까까지 번쩍 들리던 사람이 대지에 넓고 깊게 뿌리내린 나무가 되었다고 상상하고 나자 잘 들리지 않더라고. 대지를 딛고 일어서려 하지 않고 대지 속으로 깊이 내려앉아 결속할 때 더 큰 단단함으로 일어서게 된다는 역설. 뿌리내림이란 그런 것일까. 빼곡한 햇살이 되어 밀양으로 내려앉는 사람들, 서로의 약함과 고통을 유대로 손 맞잡은 사람들의 힘이 생명과 마을을 짓밟고 세워지는 76만5천V짜리 송전탑보다 단단할 것임을 믿는다. 이달 30일, 밀양에서 만나자.

배경내 인권교육센터 ‘들’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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