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였다. 분명 낡은 것은 죽어가고 있는데 새로운 것은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
DJ노믹스 1년,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1999년 400만 명의 실업자가 발생해 실업률이 20%를 넘겼지만 정부는 400억달러의 역대 최대 경상수지 흑자를 자랑하고, 500억달러가 넘는 외환보유고를 선전했다. 실직과 건강 악화로 노동력과 재활 의지를 잃은 이들의 자해·자살(제249호 ‘IMF가 뚫어논 죽음의 터널’)이 잇따랐다. 어느 40대 가장은 1천만원의 보험금 때문에 10살배기 아들의 새끼손가락을 잘랐다. "구제금융 한파가 몰고 온 사회적 위기는 사람에게 최후의 자산인 몸도 망가뜨리고 있다"고 은 썼다.
희미하게 명멸한 신세기의 징후들
극적인 반전에 대한 평범한 사람들의 열망은 때로 엉뚱한 방향으로 튀었다. 그해 7월 탈옥수 신창원이 탈주 2년6개월 만에 경찰에 붙잡혔다. 한날 임창열 전 경기도지사가 뇌물사건으로 구속 수감됐다. 은 신창원과 임 전 지사를 대칭으로 묶어 보도했다(제268호 ‘극과 극! 신창원 대 임창열’). 당시로선 흔치 않게 네티즌의 의견도 모았다. “탈옥 뒤 신출귀몰한 탈주극을 벌이면서 무능한 경찰들에 대한 구조조정도 했으니 정상을 참작해서 죄를 일부 탕감해야” 한다는 등 신창원에 대한 동정 여론이 많았다.
세기말 드라마의 주인공은 또 있다. 정치인 노무현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링 위로 올라왔다. 그해 7월1일 제264호에서 공개한 ‘대중이 선호하는 차세대 리더십’ 여론조사에서 당시 국민회의 부총재였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를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 2000년 총선을 부산·경남 지역에서 치르겠다고 공언한 뒤였다. ‘새로운 시대의 맏형’을 꿈꿨던 정치인은 자신에게 닥칠 희망과 절망을 아직 예감하지 못했을 것이다.
불확실성 속에서, 다가올 세기의 새 징후들은 희미하게 명멸했다. 은 그 불확실의 구덩이로 도발적인 질문을 던지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등급보류 판정을 받은 장선우 감독의 영화 의 편에 서서 ‘불온한’ 이미지와 대사들을 잡지에 그대로 게재했고, ‘간통죄’ 논란을 통해 국가가 개인의 성풍속을 감시하는 것이 옳은지 질문(제274호 ‘20세기 유물, 간통죄’)했다. 동거, 한부모, 동성 결합 등 다양한 커플을 통해 결혼과 가족, 이혼에 대한 고정관념을 넘어서기도 했다(제266호 ‘아빠는 꼭 있어야 하는가’).
그러나 오래된 것들은 끝내 청산되지 못한 채 여전히 21세기를 떠돌고 있다. 이 베트남전 24년 만에 처음으로 현지 고발했던 한국군 양민학살(제273호 ‘베트남의 원혼을 기억하라’) 문제는 양국 간 공식 조사조차 이뤄지지 않았다. 1999년 1월 국가안전기획부에서 국가정보원으로 이름만 바꿨을 뿐, 야당 국회의원을 사찰(제241호 ‘안기부 사찰 시비’)하고, 상대의 정치 성향에 따라 공작하고 보복(제254호 ‘탈북자는 인간도 아닌가’)하는 정보기관의 행태 또한 달라진 것이 없다. “산림파괴 마을파괴 송전철탑 반대”를 부르짖는 노인들의 곡소리는 그저 14년 전 강원도 횡성(제256호 ‘횡성군 유동리 한국전력과 힘겨운 싸움’)에서 경남 밀양으로 터를 옮겼을 뿐이다.
21세기 희망 여전히 유효한 오늘“인간의 존엄성이 숨 쉬는 사회, 상식과 순리가 지배하고 소외된 사람들이 없는 따뜻한 공동체.” 누구도 가본 적 없는 시대를 눈앞에 두고 당시 김종구 편집장은 희망을 담아 적었다. 그것이 21세기라면, 우리는 아직 새로운 세기에 도달하지 못한 것일 테다.
엄지원 기자 umkija@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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