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세기에 발간된 신년호(1월6일치 290호)의 대부분 기사는 21세기 담론으로 집결했다. 먼저 새 시대를 살아갈 아이들을 주목했다. 표지이야기 ‘우리 아이들에게 웃음을!’은 학교·가정·사회로부터 보호가 아닌 유기·학대를 당하는 아이들의 권리를 고민했다. 현재를 분석해 미래를 점친 기사들도 눈길을 끌었다. ‘한국 경제의 5가지 화두’에서는 시장의 앞날을 예측했다. 벤처기업과 재벌의 승부, 외환위기 이후 본격화한 글로벌 경쟁, 첨단 기술을 배경으로 한 지식기반산업, 생명공학산업,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21세기형 직업 등을 화두로 꼽았다. 만화가들은 앞으로 다가올 21세기를 상상해 그렸고, 과학평론가 이인식씨는 21세기의 21가지 기술을 제시했다. 인간의 능력을 추월해 지구의 주인이 되는 로봇, 부모가 주문한 대로 만들어지는 맞춤 아기, 만취해도 곧바로 술을 깨게 하는 약 등이 발명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한편으론 섬뜩하고 한편으론 흥미롭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바야흐로 남북 화해의 시대</font></font>2000년은 한국 현대사에서 중요한 순간을 되새기는 해이기도 했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꼭 50년이 되었고, 광주항쟁 20주년이기도 했다. 292호 표지이야기 ‘대전시 산내 1800명 양민 학살’은 당시 비밀분류에서 해제된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의 대전형무소 재소자 학살 사건을 다뤘다. “인민군과 연합할까봐” 평범한 시민들이 군인들의 총탄에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은 좌익에 대한 무자비한 보복학살이란 이름으로 자행된 역사적 비극을 이제는 청산해야 할 때라고 기록했다. 309호 특집 ‘2000년에도 광주는 앓고 있다’는 “여전히 5·18 광주가 현재진행형인 사람들”에 대해 말한다. 강산이 두 번 바뀌고도 개인적 고통을 겪고 있는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의 악몽을 내밀하게 들여다봤다.
긍정적인 신호들도 눈에 띄었다. 총선 이슈 심층분석 시리즈 중 네 번째 ‘선거문화’를 다룬 304호에서는 새로운 정치문화의 단면으로 광범한 시민단체를 망라한 총선시민연대를 꼽았다. ‘함량 미달 정치인에 대한 낙천·낙선 운동’을 주도해 총선 정국을 가장 뜨겁게 달궜다. 비록 강고한 기득권 세력의 벽에 부딪히긴 했지만 시민단체가 정치 영역에 정면 도전해 여의도 정치 독점 타파에 큰 족적을 남겼다는 점에서 의미를 찾았다.
바야흐로 남북 화해의 시대이기도 했다. 313호와 314호에는 6월13~15일 남북 정상회담을 둘러싼 이야기를 담았다. 회담을 계기로 동북아 정세가 변화의 급물살을 타면서 복잡해진 미·중·러·일 등 주변 국가의 외교전을 분석하고, 다음호에는 6·15 선언이 이뤄지기까지 숨가빴던 비화를 재조명했다. 그 와중에 한국의 보수세력들은 길을 잃고 방황했다(315호 ‘방황하는 보수주의’). 한나라당은 딜레마에 빠졌고, 는 정상회담의 의미를 퇴색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2013년보다 더 미래적인 2000년</font></font>어느 시절이나 그렇듯 2000년에도 사회 한쪽에서 긍정의 신호탄이 터지면 다른 한쪽에서는 부정의 신호탄이 쏘아올려졌다. 1:99 시대가 오기 전에도 분배 구조의 왜곡을 다룬 기사가 있었다(330호 ‘빈부격차, 폭발전야!’). 그때는 그래도 20:80의 양극화를 걱정했다는 것이 다르다면 다른 점일까. 빈곤가구가 급증하고 중산층이 몰락했다. 표면적으로 보이는 경제 회복 또한 숱한 노동자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했음을 뼈아프게 지적했다. 기사는 “조만간 분배 왜곡에 따른 계층갈등이 심각한 사회문제가 될 것”을 우려했다.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화해모드의 남북관계는 퇴행했고 경제 양극화는 보란 듯이 더 심해졌다. 어쩌면 2013년보다 더 미래적인 2000년이었다.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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