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법개정안 정국은 일단락됐지만 ‘증세’라는 중요한 화두를 남겼다. 복지 시민단체들이 중심이 되어 증세불가피론이 나왔고 진보개혁 진영 내 논쟁으로 확산되고 있다. 증세를 둘러싼 찬반 양쪽의 주장을 요약해보자. 증세찬성론 쪽은 복지국가 수립을 위해 증세는 불가피하며 이번이 증세라는 난감한 이슈를 공론화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민주당이 세금폭탄론으로 잘못 대응하면서 소중한 기회를 날렸다는 것이다. 반면 증세반대론 쪽은 진보개혁 진영이 고복지·고부담이라는 당위론에 몰두하면서 증세에 부정적인 현실을 가볍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요약하면 당위론과 현실론이다.
증세 논쟁, ‘엔지니어’ 대 ‘책상물림’의 대결
증세 논쟁에서 나타난 당위론과 현실론을 파고들어가면 진보개혁 진영 내에서 정책을 중시하는 쪽과 현실정치를 우선시하는 쪽 사이의 갈등이 드러난다. 두 입장 사이의 불화는 적잖이 커서 결합이 쉽지 않아 보인다. 정책중시론자는 상대에 대해 ‘정치공학에만 몰두하는 사람들’이라 폄하하고, 정치우선론자는 상대를 ‘현실도 모르는 책상물림들’이라며 백안시한다. 세금폭탄론의 지각없음에 대해서는 일단 논외로 하자. 여기서는 증세론의 감각없음을 논하고 싶다.
사실 정책중시론과 정치우선론의 대립은 한국 정치에서 정책의 비중과 영향력이 예전보다 꽤 커졌음을 방증한다. 1997년 DJP 연대론, 2002년 후보단일화론 등 정치공학이 선거를 지배하던 시절을 환기해보자. 적어도 2010년 이후에는 무상급식 같은 정책 노선이 선거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난 대선이 보여주듯이 정치적 에너지와 결합하지 못한 정책의 파괴력은 가냘프기 짝이 없다.
왜일까? 대중의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개별적인 정책이 아니라 그것을 엮는 큰 전략이기 때문이다. 언제부턴가 한국 정치를 둘러싼 담론에서는 정책을 둘러싼 합리적 토론과 설득, 합의가 정치의 본질인 양 칭송되기 시작했다. 정책이 훌륭하면 대중이 따라오리라는 순진한 사고가 그 뒤를 받치고 있었다. 맞다, 합리적 토론과 설득이 지향해야 할 소중한 가치임은 불문가지다. 하지만 정치의 본래적 출발 조건은 합의 이전에 존재하는 갈등이다. 이 냉엄한 현실을 외면하는 순간 합리적 토론의 꿈은 고담준론이 되고 만다.
갈등하는 세력들이 칼의 합 대신 말의 합을 겨루는 곳이 민주정치다. 말로써 우리 편과 상대 편을 나누고, 전선을 긋고, 가운데 선 사람들을 우리 편으로 끌어들이는 게 정치다. 그래서 정치는 능동적 실천이다. 정세의 유불리를 판단해서 진퇴를 결정하고, 지향점은 잊지 않되, 때로 돌아갈 길도 생각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정치는 과학보다 예술에 가깝다. 정치가 받은 영광된 천형의 자리는 가장 낮은 세속의 자리다.
세속의 세계로 하강해야 할 증세론에 “나라와 집을 다스리는 사람은 부족한 것을 걱정하지 않고 고르지 못한 것을 걱정한다”는 유명한 구절이 있단다. 지금 다수의 국민이 증세론을 반대하는 것은 서민에만 집중된 증세론이기 때문이다. 대기업, 부자들은 빠져 있다. 사람들은 이미 고르지 못함 때문에 화가 나 있는데, 그걸 바로잡지 않은 채 증세해서 복지를 하면 고르게 될 거라고 말하면 부아만 돋는다. 증세론이 애초에 욕먹는 아이템이라고 순교자 같은 마음가짐으로 증세를 외쳐도 곤란하다.
그래도 나는 진보개혁 진영 일각에서 나온 증세론이 반갑다. 정책중심론과 정치우선론이 부딪치면서 서로를 향해 나아갈 가능성을 보여줘서다. 이왕 논란이 된 김에 증세론은 더 아래로, 세속의 세계로 내려왔으면 한다. 적진을 칠 수 있는 날카로운 칼도 품었으면 한다. 그리하여 아무쪼록 다수 대중의 열정과 에너지를 끌어모아 세상을 바꿀 파괴력을 지녔으면 한다.
한귀영 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 연구위원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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