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펠탑을 배경으로 오월에 개화한 프랑스 파리 마르스광장의 오동나무. paulownia-maroc.blogspot.com
저런 색을 도대체 어떻게 내지. 둑에 선 오동나무 꽃을 먼발치에서 보며 혼잣말한다. 상투적이지만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 연보라 물감을 푸른 하늘에 풀어놓은 것만 같은, 지금은 오동나무 꽃이 아름다운 시절이다.
내가 사는 경북 봉화군 춘양면 서벽리에는 사과나무 과수원이 많다. 과수원과 과수원 사이 경작하지 않는 땅에는 군데군데 스스로 뿌리 내리고 사는 오동나무가 있다. 그중 내 거주지와 가장 가까운 곳의 오동나무 한 그루 주변을 요즘 자주 찾아간다. 오동나무는 높이 자라고 가지가 많이 벌어지기에 나무의 중심에서 어느 정도 물러나야 수형이 한눈에 들어온다. 내가 그 나무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서 꽃을 감상하는 이유다. 나무가 만든 그늘과 꽃의 색감은 볕이 드는 정도에 따라 달라서 한 번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또 한 번은 그 반대 방향으로 서서, 또는 같은 방향이어도 시간대를 바꿔가며 그 나무를 바라본다. 똑같았던 적은 한 번도 없다. 매번 다른 모습으로 찬란하니 신기할 따름이다.
에펠탑 앞 마르스광장의 오동나무가 생각났다. 프랑스 파리를 여행하던 지인이 지금 핀 이 꽃이 무슨 나무냐며 보내온 사진에는 에펠탑을 배경으로 오동나무가 서 있었다. 오월 중순에 오동나무는 꽃이 핀다. 옅은 보랏빛 종 모양이고 여러 송이가 모여 나뭇가지에 드리운 샹들리에처럼 보인다. 내가 사는 이 동네가 아니어도 우리나라 거의 전역에서 볼 수 있는 풍경일 것이다. 민가 주변 그 어디에서나 오동나무는 잘 산다.
딸이 태어나면 집 근처에 오동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우리 문화이고 옛날의 일이다. 오동나무는 다른 나무에 비하면 빨리 자라는 속성수(速成樹)다. 심은 지 10년이 지나면 목재로 쓸 수 있을 만큼 서둘러 몸집을 불린다. 딸이 결혼할 나이가 되면 그 나무로 장롱이나 서랍장을 만들어 혼수품을 장만했다고 들었다. 자식이 태어날 때 심은 나무가 출가하는 그 아이를 오래 지켜주기를 바라는 부모의 마음이 가구에 담겼을 테지.
오동나무는 나무 자체가 가볍다. 세포 하나하나가 얇고 큼직한 공기주머니처럼 생겨서 목재의 밀도가 낮아 그렇다. 가구로 만들면 옮기는 것이 다른 나무를 썼을 때보다 수월할 수 있다. 목재 표면은 짙은 베이지 톤에 연한 금빛이 돌아서 그윽한 분위기가 난다. 뒤틀림이나 갈라짐 또한 적다. 수분 투과율이 낮아 습도 변화에 둔한데 그 덕에 수축과 팽창을 잘 않는다.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나무 중에 가구재로 이만한 재목이 또 있던가.
가지가 잘리기라도 하면 오동나무는 상처 부위 주변에 움이 잘 튼다. 그 여린 움싹은 얼마 지나지 않아 제법 굵은 나뭇가지가 된다. 출퇴근길에 내가 만나는 오동나무도 그랬다. 꽃이 무척 근사했던 이 나무는 2024년 누군가의 손에 잘려나갔다. 폭우에 나무가 길 쪽으로 쓰러질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근무하는 연구동은 국립백두대간수목원 안에 있기는 하지만 방문자센터에서 꽤 떨어진 산속에 있다. 관람객 통제구역이라 연구동으로 진입하기 위한 길목에는 차량용 차단기가 있다. 그곳을 통과하려면 앞을 가로막는 막대기가 내 차에 붙은 출입 인식기를 읽고 길을 터주는 동안 잠시 멈춰야 한다. 그 짧은 시간에 나는 10여m 앞 산비탈에서 찻길 쪽으로 비스듬히 기운 오동나무에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그러면 직장 생활 힘들더라도 버텨보라는 나무의 격려가 들리는 것만 같았고 불끈 용기가 솟기도 했다.
매일같이 만나던 그 나무가 어느 날 아침에 보이지 않았다. 처음엔 내가 잘못 본 줄 알고 차단기를 통과한 뒤 차에서 내려 다시 확인했다. 인사도 없이 사라진 걸까. 그의 부재를 알아채고 나서야 자취를 더듬었고 잘리고 남은 그루터기를 발견했다. 허망하고도 너무 서운해서 눈물이 다 났다. 당혹스러운 마음을 추스르고 잘려나간 부위를 어루만졌다. 오동나무는 분명 기운이 있었다. 잘린 단면에서 촉촉한 물기가 느껴졌으니까. 이 나무가 대사(代謝)를 멈추지 않은 게 틀림없었다. 몸 밖에서 섭취한 영양물질을 체내에서 분해하고 합성해 생명 활동에 필요한 에너지를 만드는 행위를 가느다랗게나마 이어가는 걸 확인하니 희망이 보였다. 일주일 정도 지났을까, 그루터기 한쪽 귀퉁이에서 더듬이처럼 한 뼘이나 쑥 자란 녹색 줄기가 잎을 내고 있었다. 며칠 더 지나자 잎은 내 손바닥 4개는 겹친 크기로 면적을 넓혀 빛을 양껏 받아들였다. 이내 우산을 펼친 만큼 잎을 키우더니 키가 쑥쑥 자랐다. 이 속도로 멈춤 없이 자란다면 내후년이면 꽃이 필 것도 같다.

오동나무의 꽃. 허태임 제공

오동나무 열매. 허태임 제공

오동나무 잎은 크다. 허태임 제공
이상하게 들릴지 몰라도 오동나무는 물을 건너고 하늘을 날 수 있다. 잘리고 나서야 그럴 수 있다. 파도타기용 서프보드와 항공기 내장재로 오동나무 목재를 쓰기 때문이다. 최근 오동나무의 그런 쓰임의 수요가 더욱 커지는 분위기다. 환경을 먼저 생각하려는 의지가 기존 탄소섬유를 자연 소재로 바꾸자는 운동으로 번지고 있으므로. 오동나무로 만든 보드가 인기를 끌고, 극도로 가벼워야 하는 항공기 내장재로 오동나무가 떠오르는 것이다.
그래서 오스트레일리아와 독일은 오동나무를 대규모로 재배해 전세계에 수출도 한다. 국내에서 자라는 오동나무와 자매지간인 서로 다른 두 나무를 교배해 얻은 종(Paulownia tomentosa×Paulownia fortunei)을 주로 키운다. 이들 나라가 동양 기원의 오동나무로 플랜테이션을 하게 된 이유는, 나무를 베어낸 밑동에서 다시 새순이 돋아나기 때문이라고 한다. 새로 심을 필요 없이 베어낸 자리에서 나무가 자라주니 몇 년 주기로 계속 목재를 생산할 수 있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유명한 어느 서프보드 제조사는 자신들의 상품을 광고할 때 오동나무를 앞세운다. “오동나무는 나무 중의 알루미늄이지요. 가벼우면서도 파도의 진동을 부드럽게 흡수하는 탄성이 있어요. 화학물질인 폼(Foam) 보드와 달리 탄소 흡수량이 엄청나고 생분해되는 친환경 소재예요. 우리는 오동나무를 존경합니다.”
한반도에서는 1천 년도 더 전에 오동나무로 악기를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현미경이나 음파를 분석할 장비가 없던 시절에 윗대의 분들은 어떻게 알았을까. 오동나무는 세포 구조가 균일하고 밀도가 낮으니 악기로 만들면 소리의 전달 속도가 빠르고 잔향이 풍부해진다. 가야금·거문고 같은 현악기의 울림통으로 안성맞춤인 것이다.
수백 년 전의 고문서를 오늘날까지 보존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오동나무 덕분이란 말을 들은 건 경북 안동에 있는 한국국학진흥원에서다. 10여 년 전 그곳에 보관 중인 목판의 수종 분석을 의뢰받고 시료를 채취하러 갔을 때다. 오동나무는 발화점이 높고 열전도율은 낮아서 불에 쉽게 타지 않을뿐더러 뜨거운 열로부터 내부를 보호하는 성질이 있다고, 이 수장고의 서가와 벽을 오동나무로 만들었으니 든든하다며 담당 학예사는 평온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2025년 3월 경북 의성발 산불 피해를 입은 안동 임하댐 부근의 오동나무. 허태임 제공

개화 중인 오동나무. 세계생물다양성기구
살아 있는 오동나무 역시 불에 강하다. 정확히는 불에 다 타고 나서도 부활한다. 2025년 경북 의성발 산불피해지 현장 조사를 다니면서 다시 살아난 오동나무의 생명력에 깜짝깜짝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잎이 대형인 건 알았지만 재건을 위해 저렇게까지 커지다니. 산불이란 역경을 겪고 나서 항복 없이 전보다 더 싱싱한 잎을 활짝 펼쳐내는 그 모습을 기록하며 도리어 내가 생기를 얻는다.
생활 방식이 바뀌면서 오동나무를 직접 심는 풍습은 사라졌지만, 기회가 된다면 나도 과거의 그들처럼 갓 태어난 한 생명을 위해 오동나무를 심고 싶다. 그 생명이 10살 정도 되면 나무를 잘라 무엇이라도 만들어서 주고 싶다. 그가 그 물건을 소중히 여기며 나이 든다면, 내가 죽고 나서도 그런다면, 참 기쁠 것 같다. 더 큰 바람도 있다. 내게 목재를 내어준 그 나무가 움싹을 틔우고 또 틔우는 방식으로 누구보다 오래오래 살았으면 하는.
연보라로 개화 중인 오동나무 한 그루를 멀찍이 바라보며 별별 생각이 다 든다. 오동나무 꽃이 좋아서다.
허태임 식물분류학자·‘숲을 읽는 사람’ 저자
*식물학자가 산과 들에서 식물을 통해 보고 듣고 받아 적은 익숙하지만 정작 제대로 몰랐던 우리 식물 이야기. 4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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