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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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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에서 나온 사람들 그들은 어디로 갔을까

납치·성폭행·암매장·불임시술 등 난무한 생지옥 ‘양지마을’ 사건
데리고 나온 사람들 거리에서 죽어갈 때 인권운동에 대한 회의 일어
등록 2013-08-21 10:36 수정 2020-05-03 04:27

1998년 7월, 무더위가 한창이던 어느 날 저녁 한 남자가 대학생들의 손에 이끌려 사무실에 들어왔다. 15년 전이었으니까 대략 40살쯤 돼 보였다. 온몸은 할퀴고 찢긴 상처투성이였다. 상처에서는 누런 농이 곪았고, 온몸에서 살 썩는 냄새가 진동해 코를 막아야 할 지경이었다. 온몸의 상처는 좁은 쇠창살을 잘라낸 틈으로 빠져나오면서, 또 뒷산을 뛰어넘을 때 나무들에 찢기고 긁힌 것이었다. 그러니까 박아무개라는 그는 사회복지시설에서 탈출한 사람이었다.

“죽을 때까지 나갈 수 없어요”

나는 그에게서 일주일 동안 지옥 얘기를 들었다. 그 지옥에는 노재중이라는 ‘악마’가 군림하고 있었고, 그가 만드는 규칙에 따르지 않으면 죽도록 맞아야 했다고 했다. 백주에 조치원·천안·대전역 등에서 강제로 사람을 탑차로 납치하고 고문을 가하고 죽도록 일을 시키면서도 월 8천원에서 1만여원만 준다고 하는, 그리고 입소나 퇴소 심사는 아예 기대할 수도 없고 가족이 면회 한 번, 전화 한 통화도 할 수 없다는, 여성은 수시로 성폭행당하고 강제로 불임시술도 당해야 한다는, 대드는 사람에게는 CP라는 신경안정제를 의사 처방 없이 마구 투입한다는 그런 기가 막힐 일들을 그는 진정을 다해 말했다. 군대 조직처럼 철저한 위계가 있고, 이사장에게 잘 보이면 여자와 같이 살게도 해준다는 충남 연기군 전동면의 양지마을이라는 부랑인 시설의 얘기를 처음에는 믿을 수 없어서 묻고 묻고 또 캐물었다. 그의 말을 확인하기 위해 충남 조치원에 가서 지역신문의 함아무개 기자도 만났다. 함 기자는 여러 가지 인권유린 의혹이 있어 시설에 대한 취재를 하고 있지만 방송사 카메라도 들어갈 수 없었다고 했고, 박씨의 말이 모두 사실이라고, 매우 상세하게 잘 알고 있는 사람의 얘기라고 확인해주었다.

1998년 9월 쇠창살 안에 갇힌 양지마을 입소자들의 모습. 양지마을은 인권유린과 비리로 얼룩진 ‘생지옥’이었다.한겨레 자료

1998년 9월 쇠창살 안에 갇힌 양지마을 입소자들의 모습. 양지마을은 인권유린과 비리로 얼룩진 ‘생지옥’이었다.한겨레 자료

‘햇볕작전’이라고 내 멋대로 이름 붙인 작전에 참가한 이는 대략 40명 정도였다. 인권운동사랑방·천주교인권위원회 활동가들과 당시 여당 의원인 새천년민주당의 이성재 의원과 김병후 정신과 원장으로 이뤄진 조사단과 방송사·신문사의 취재기자들이었다. 천안에서 만나 하룻밤을 같이 지낸 다음 조사단은 7월16일 부슬비가 내리는 지방도를 10여 대의 차량에 나눠 타고 달려 문제의 그 지옥으로 향했다.

그곳은 사설 교도소였다. 노재중이란 자가 이사장으로 있다는 그곳은 박씨의 말 그대로 3m도 넘는 콘크리트 담이 둘러쳐져서 완강하게 외부인의 접근을 차단하고 있었다. 그곳의 철문을 지나자 다시 담과 철문이 있고, 또 하나의 철문을 지나서야 ‘양지마을’이라는 이름의 사회복지시설이 나왔다. 아침에 급작스럽게 닥친 우리 조사단 앞에서 시설 사람들은 어쩔 줄 몰라 했다. 처음에는 국회의원이 포함된 조사단이 요구하는 대로 그들은 문을 땄다.

남자 생활실이라는 곳에 가니 밖에서 열쇠를 잠근 탓에 입소자들은 쇠창살 사이로 손을 내저으며 나가게 해달라고 울부짖었다. 대부분 비쩍 마른 몸매에 고단한 노동으로 찌든 것 같은 중년의 남자들이었고, 노인들과 젊은 사람까지 쇠창살에 매달렸다. “여기는 감옥보다 더해요. 죽을 때까지 나갈 수 없어요.”

그들은 처음 보는 우리에게 5년 동안, 10년 동안, 20년 가까이 이곳에 갇혀 있었다고 말했다. 군대 내무반처럼 양옆으로 나무 침상이 있었다. 그대로 군대 내무반이었다. 그 생활실 앞쪽에는 쇠창살이 질러진 독방도 있었고, 벽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을 묶을 때 쓰는 밧줄과 가죽 채찍 같은 게 걸려 있었다.

겨우 3년형을 선고받은 노재중

노재중이 나타난 다음에는 직원들의 태도가 돌변했다. 우리는 막무가내로 내모는 직원들의 완력에 의해 양지마을 문 밖으로 쫓겨났다. 이성재 의원의 요청으로 경찰이 오고 난 뒤에야 우리는 다시 시설의 조사를 진행했다. 노재중은 당시 대전과 연기군에서 8개의 사회복지시설을 운영하는 사회복지법인 천성원의 이사장이었고, 모든 시설의 장과 임원들은 그의 처와 첩, 아들딸이 차지하고 있었다. 전형적인 족벌 운영 체계였다. 알고 보니 노재중은 1987년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이 있을 때 시설 조사를 위해 나온 야당 국회의원들까지 폭행해 말썽을 빚은 인물이었다. 그는 높은 담장과 감금 시설로 운영되는 게 불법임을 알고 있었다. 그는 “다른 시설들도 다 이렇게 하는데 왜 나만 문제 삼냐. 억울해서 못한다”고 되레 항변했다.

조사단은 부랑인 수용시설인 양지마을과 인근 정신지체자 보호시설인 송현원을 돌며 조사를 했다. 원생들이 우리에게 양지마을 직원들이 감춘 서류가 있는 장소를 알려줘서 서류 더미를 찾아내기도 했다. 그날로 양지마을과 송현원에서 살던 이들 23명을 버스에 태우고 나왔다. 그 뒤 이 문제가 대대적으로 보도되면서 보건복지부에서도 조사하고 검찰도 수사에 나서는 상황이 되었으며, 양지마을에 있던 이들 400명 중에서 300명은 퇴소를 희망해서 나오게 되었다. 조사단은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과 함께 나중에 퇴소한 사람들까지 포함해 60명가량을 일대일로 면담한 뒤 그곳에서 일어난 인권유린을 종합적으로 조사해 검찰에 고발했다.

검찰의 수사와 기소는 매우 실망스러웠다. 납치·특수감금·암매장·불임시술 같은 심각한 인권 문제는 제쳐두고, 폭행과 공금횡령 등으로 노재중과 박종구 원장 등만 기소했다. 인권단체가 애써서 조사한 내용만 확인하더라도 되는데 검찰은 전혀 그럴 의지가 없었다. 나아가 법원은 노재중의 형을 선고할 때 그가 지금까지 사회복지를 위해 헌신했다면서 정부로부터 표창을 받은 일을 참작해 감형해주기까지 했다. 그런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노재중은 겨우 3년형을 선고받았고, 대부분의 사람들과 뇌물을 받은 공무원은 모두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손해배상 청구소송도 겨우 몇십만원에서 몇백만원씩 배상하라는 것으로 끝나버렸다. 십수 년을 지옥 같은 그곳에서 노예처럼 살고 그로 인해 그들은 직장도 잃고 가족도 해체되고 인생 자체가 거덜 났는데, 누구도 책임지지 않았다.

“죽을 자유밖에 얻은 게 없어!”

시설에서 나온 사람들도 문제였다. 그들 중 몇몇은 이산가족 상봉처럼 감격스럽게 가족의 품에 안겼다. 그렇지만 알코올중독자로 집에서 칼 들고 난동을 부리고 불도 질러서 어쩔 수 없이 그곳에 보냈다는 가족들은 10년이 지났음에도 공포에 떨었다. 알코올중독자들은 문제였다. 시설에서 10년 넘게 술을 하지 못했음에도 한잔 마시기 시작하자 돌변했다. 갈 곳 없는 사람들을 우리 사무실에서 보호하고 있었는데, 술기운이 떨어지면 발발 떨어대는 사람들, 곳곳에 똥 묻은 팬티를 쑤셔박고 불쑥불쑥 알몸으로 사무실을 내려오는 사람들, 아침 출근 때면 사무실 문 앞에 똥을 질펀하게 싸놓는 사람들 때문에 기겁을 해야 했다. 그런 이들에게 나도 사무실 활동가들도 모두 질렸다. 그럴 때 그들은 죽어도 시설에는 다시 가고 싶지 않다면서 거리로 떠나갔다. 마침 국제통화기금(IMF) 사태 직후인지라 어디 가서 날품팔이하기도 어려웠던 시절, 그들은 자연스레 거리의 노숙인이 되었다.

노재중 전 이사장의 패악질을 규탄하는 양지마을 입소자들.한겨레 자료

노재중 전 이사장의 패악질을 규탄하는 양지마을 입소자들.한겨레 자료

그리고 가끔 전화가 왔고, 직접 사무실까지 찾아오는 이도 있었다. 와서는 손을 벌렸다. 돈을 주는 족족 술부터 사먹는 걸 안 뒤로는 꼭 내가 보는 앞에서 밥을 먹여 보냈다. 그런 그들이 점점 소식을 전하거나 찾아오는 일이 뜸해졌다. 그런 뒤 듣는 부고는 대개 비참했다. 술 먹고 거리에서 죽어간 그들, 너무도 끔찍했던 시설 생활이 싫어서 자유를 찾아나섰던 그들은 하나하나 거리에서 죽어갔다. 정말 단단하게 생겼던 박종문이란 사람도 죽었다. 1997년 조치원역에서 잡혀온 그는 수없는 폭력에도 굴하지 않았다. 노재중의 폭력과 불법을 고발하기 위해 가스통을 모아놓고 불을 질러서 2년형을 받고 감옥에 갔다. 그런 그가 출소해 우리를 찾아왔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자기 교통사고로 죽었다.

양지마을 사건을 겪으며 나는 내가 하는 인권운동에 대한 깊은 회의에 빠졌다. 거기에 있었다면 그들이 거리에서 죽어가지 않았을 텐데…, 분노만으로 자유를 찾을 수 없고 자유를 찾기 위해서는 경제적 여건도 같이 마련해야 했는데… 나는 무슨 짓을 한 것일까 하는 회의였다. 한 양지마을 사람이 악에 받쳐서 했던 말이 계속 귓가에 맴돌았다. “양지마을로 당신들은 유명해졌지. 우리는 죽을 자유밖에 얻은 게 없어!” 너무도 괴로운 나날들이었다. 탈시설 운동이 본격화되면서 시설을 나온 뒤의 대책까지 세우게 됐지만, 그것은 2003년 이후의 일이었다.

양지마을 사건 이후 사회복지법인 천성원도 많은 변화를 겪었다. 2004년에 천성원에서 ‘사회복지법인 이화’가 분리돼 독립했고, 여기에 양지마을이었던 금이성마을을 비롯한 5개 시설이 들어 있다. 법인은 확대 발전됐고, 여전히 노재중 일가가 2개 법인의 주요 임원을 장악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양지마을의 높디높은 담은 철거되었고, 시설도 정비하고 프로그램도 여느 사회복지시설처럼 나름 운영되는 것처럼 보인다.

한스러운 원혼들이 묻힌 개미고개

그런데 그곳을 나와 거리에서 죽어간 사람들은 차치하고라도 거기서 죽어간 사람들이 암매장된 개미고개는 지금 어떤 모습일까? 개미고개에는 양지마을에서 죽은 한스러운 원혼들이 묻혀 있다. 얕게 묻혀서 큰 비라도 오면 묻힌 주검이 곧 드러날 것 같은 험한 꼴이었다. 아직도 그대로 방치돼 있다면, 노재중을 비롯해 사회복지 사업으로 잘나가고 있는 그의 일가들이 개미고개에 묵힌 원혼들을 수습하는 일을 하도록 했으면 좋겠다. 어떻게 할 수 없을까? 개미고개를 생각하면 15년이 흐른 지금에도 여전히 내게 양지마을은 진행형이다.

인권중심 사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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