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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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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국가인권위 설립 위해 천막도 없이 한겨울 단식농성 벌였던 2000~2001년
쓰러지는 활동가들 지키려 찾아온 손길들이 만들어낸 독립성 흔들려
등록 2012-12-28 12:05 수정 2020-05-03 04:27

그해 겨울은 정말 추웠다. 30년 만의 강추위와 폭설이라고 언론이 떠들어대는 영하 10℃ 이하, 체감온도 영하 20℃ 이하의 날씨 아래 서울 명동성당 들머리 계단은 골목길에서 몰려오는 삭풍 때문에 더욱 추웠다. 들머리 계단에서 침낭과 비닐을 덮고 잠을 잔다는 것은 거의 미친 짓이다. 그 짓을 13일 동안 한 적이 있다.
2000년 말과 2001년 초의 13일 동안 진행된 거리 단식농성! 지금까지도 가장 기억에 남는 농성이다. 1998년부터 진행해온 국가인권위원회 설립 투쟁이 법무부와 검찰 등 국가 권력기관에 부딪혀 무산되려던 상황이었다. 그해 정기국회에서 법안이 통과됐어야 하는데, 김대중 정부와 여당은 국회에서 이를 관철하지 못했다. 거기에는 야당인 한나라당의 반대도 있었지만, 법무부가 국가인권위원회를 입법·사법·행정부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독립기구로 만드는 것에 악착같이 반대했는데 김대중 대통령조차 그것을 꺾지 못했기 때문이다. 마지막 국회였던 정기국회는 여야 간 설전만 벌이다가 다시 시간을 까먹고 말았다.

2000년 12월31일 서울 명동성당 들머리에서 인권단체 회원들이 국가인권위원회법 제정과 국가보안법 철폐를 요구하는 단식농성을 벌였다. 이들은 유난히 한파가 매서웠던 그 겨울, 천막도 없이 농성을 벌였다. 한겨레 김봉규 기자

2000년 12월31일 서울 명동성당 들머리에서 인권단체 회원들이 국가인권위원회법 제정과 국가보안법 철폐를 요구하는 단식농성을 벌였다. 이들은 유난히 한파가 매서웠던 그 겨울, 천막도 없이 농성을 벌였다. 한겨레 김봉규 기자

 

정말 이러다 죽을 수도 있었던

물 건너가는 국가인권위원회 법안을 재론하게 하려면 무슨 방법이 있을까? 이미 한 차례 인권활동가들의 단식농성으로 위기를 넘겼는데, 다시 단식농성? 몸을 던져서 호소하는 것밖에 없나 회의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결국 초강수의 투쟁, 천막 없는 거리 단식농성으로 가기로 했다.

전국의 인권활동가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12월28일 명동성당 쪽은 그 며칠 전 한국통신(현 KT) 노동조합원들이 파업을 하며 성당을 난장판을 만들어놓고 빠지자 경찰에 시설보호 요청을 했고, 경찰은 성당 들머리에서부터 신도가 아닌 사람들을 막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텐트를 성당 안으로 들일 수도 없었다. 울산, 광주, 전북 전주, 경기 수원 등 전국에서 활동가 18명이 경찰 봉쇄를 뚫고 삼삼오오 성당 들머리에 모였다. 계단에 종이 상자 한 장 깔고서 온몸으로 겨울바람을 이기며 버텼다. 밖에서는 이러다가 우리 애들 다 죽는다며 전국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유가협) 아버님들이 경찰과 싸우며 침낭을 들여보내주었다. 그날 밤 침낭과 비닐 한 장을 덮고 상자를 바닥에 깐 채 잤다. 뻣뻣하게 얼어붙은 투명한 비닐 너머로 밤하늘의 별이 참으로 시퍼렇게 빛났다. 그날부터 얼음장이 된 비닐이 코끝을 찌르는 바람에 기겁해서 눈을 뜨고, 새벽이면 얼음이 되는 침낭과 이불을 덮고 한뎃잠을 잤다. 온몸이 얼어붙는 강추위에서도 잠을 잤다. 새벽녘 화장실 가는 일로 눈을 떠서는 너무 추워 다시 잠들지 못하고는 했다.

우리 요구는 분명했다. 국가인권위원회를 독립기구로 세우라는 것. 우리는 외쳤다. “가라, 국가보안법! 오라, 국가인권위원회!” 국가인권위원회법 제정, 국가보안법 폐지, 거기에 부패방지법 제정까지 내걸었다. 이틀 뒤에는 무릎까지 빠질 정도의 폭설이 쏟아졌다. 잠시 천막을 쳤지만, 애초 거리 단식농성을 결의했고 쓰러지는 활동가가 있으면 누군가 대체하며 완강하게 버티기로 한 대로 천막을 다시 걷었다. 그 농성의 상황실장을 맡았던 나는 이 투쟁의 결말이 어떻게 날지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연말연시를 거리 단식농성을 하며 보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그곳에서 단식을 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없었다. 그때만 해도 신년 휴가가 3일이나 되었다.

2001년 1월4일, 새해 들어 첫 출근을 한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은 기겁을 했다. 연말연초 강추위 속에서 우리가 단식농성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모두 달려왔다. 우리의 힘은 갑자기 늘어났다. 매일 열리는 저녁 8시 촛불집회에는 참가 인원이 불어났다. 하루 릴레이 단식농성자 수도 100명 이상으로 늘었다. 국회에서도 개혁 입법과 관련한 논의가 시작됐고, 국가인권위원회 법안에 대한 재논의가 있었고, 김대중 대통령에게도 건의가 올라갔다.

 

폐기종 앓았던 고 윤한봉 선생도 달려와

그렇게 13일간 단식농성을 했다. 우리를 응원하러 온 사람들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이가 고 윤한봉 선배였다. 우리가 혹한기에 단식농성을 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그는 폐기종을 앓고 있었음에도 광주에서 한달음에 달려왔다. 지금은 감옥에 가 있는 당시 국가인권위 설립 공동대책위원회 공동집행위원장이었던 곽노현 한국방송통신대 교수(전 서울시 교육감)와 이덕우 변호사 등은 우리와 함께 성당 들머리 계단에서 잠을 자기도 했다. 그리고 박선영 열사의 어머니 오영자씨 등은 우리와 같이 단식농성을 하다가 쓰러져 병원에 후송된 뒤 다시 나와 합류하기도 했다.

나도 9일째 되던 날 갑자기 머리가 핑 돌며 서 있던 자리에서 그대로 무너져 인근 의원으로 앰뷸런스를 타고 후송됐다. 단식농성을 하며 이런저런 일들을 해야 했기에 체력이 달렸던 때문이다. 의원에서 죽을 한 그릇 주는데, 조금만 먹어야지 하면서도 다 먹어버렸다. 죽이 한 숟가락 들어갈 때마다 배가 불룩불룩 채워지는 느낌이 좋았고, 오랜만에 음식을 담아본 배가 자꾸 더 달라고 재촉해서 큰 그릇 하나를 다 비워버렸다. 사실 얼마나 미련한 짓이었는지, 젊을 때는 이런 미련한 짓을 많이도 했다. 단식을 끝내고는 곧바로 소주를 마실 때도 있었으니, 얼마나 무식했던가.

단식농성 12일째였던 2001년 1월8일, 41개 시민사회단체와 종교인들이 우리를 지지하는 기자회견을 자청해서 조직했다. 이들과의 합의로 단식농성은 13일째인 1월9일 접기로 했다. 소수의 인권활동가들이 벌인 단식농성이 전체 시민사회를 움직였다. 시민들의 지지와 격려, 정치권에 대한 항의도 빗발쳤다. 마지막 날인 1월9일, 명동성당에서 시민사회단체 대표들은 한목소리로 당시 김대중 정부에 “민심이 사납게 일렁이고 있다”며 개혁 입법의 추진을 강력히 요구했다. 국가인권위원회의 실질적인 독립성과 실효성을 보장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처를 취할 것, 적어도 국가보안법 7조는 삭제할 것, 부패방지법 제정 등을 촉구했다. 그리고 13일 동안 배고픔과 추위에 떨었던 인권활동가들은 국회에 기습적으로 쳐들어가서 시위를 벌이는 것으로 사상 초유의 혹한기 단식농성을 정리했다. 그 농성으로 국가인권위원회 법안이 국회에서 재논의됨에 따라, 2001년 4월 말 국회에서 부족하지만 국가인권위원회법이 통과됐다. 실로 3년 동안의 투쟁 끝에 쟁취한 국가인권위원회법이었다. 그해 11월25일 역사적인 국가인권위원회가 출범했다.

 

점거농성이라도 들어왔으면 좋겠다

온몸을 내던진 투쟁 끝에 획득한 국가인권위원회였지만, 지금의 국가인권위원회를 보면 참 한심스럽기만 하다. 3년을 싸워 획득한 국가인권위원회의 독립성은 이명박 대통령이 임명한 현병철 현 국가인권위원장에 의해 헌신짝이 되어버렸다. 정권의 눈치나 보고 정권의 입맛에 맞는 결정이나 하는 국가인권위원회를 보려고 혹한기 단식농성을 하며 얼굴에 동상까지 걸린 것이 아닌데, 참 씁쓸하다.

이명박 대통령은 대통령직인수위원회를 통해 국가인권위원회를 대통령 직속기구로 삼겠다고 발표했다. 다시 인권활동가들은 명동성당에서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릴레이로 진행했다. 그때도 2008년 1월이었으니까 2000년에 이어 다시 혹한기 거리 단식농성을 진행한 것이었다. 유엔 인권고등판무관실을 비롯해서 국제사회도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의 방침에 적극적으로 반대했다. 인권활동가들의 단식농성과 항의집회, 국제사회의 움직임 등이 합쳐져서 국가인권위원회를 대통령 직속기구로 만들려는 시도는 폐기됐다. 인권활동가들은 국가인권위원회 설립 이후에도 계속 국가인권위원회와 날카롭게 대립각을 세우며 비판해왔다.

며칠 전 국가인권위원회 직원들과 만났다. 연말이면 같이 보는 얼굴들이다. 그들은 현병철 위원장 체제에서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 없다는 사람들이다. “확실히 진정 접수가 줄었다”는 게 그들의 말이었다. 이제는 인권활동가들과 인권침해를 당했다는 시민들이 찾아오지 않는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외면당하고 있다는 말이다. 도리어 인권활동가들이 점거농성이라도 들어왔으면 좋겠다고 했다. 신뢰를 잃어버린 국가인권위원회의 초라한 모습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자기 뜻대로 국가인권위원회를 개조했다. 그 일을 맡은 장본인이 현병철 위원장이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조사 권한도 없고 할 수도 없는 북한 인권기구를 자처하고 있다. 그렇지만 실적이라는 것이 있을 리 없다. 촛불집회나 서울 용산 참사, 쌍용자동차, 한진중공업 등의 사건에서 보듯이 정권의 인권침해에는 아예 입을 닫아버리는 기구가 되었다. 정권의 눈치나 보고, 권력의 인권침해와 차별에 침묵하는 국가인권위원회는 오히려 인권의 발전을 막는 독버섯이다. 독버섯은 포자를 곳곳에 퍼뜨린다. 인권은 후퇴하기 마련이다.

 

박근혜 대통령에 거는 최소한의 기대

이명박 정권에서 인권은 후퇴를 거듭했는데 정반대의 현상도 있다. 전국의 광역시·도와 시·군·구 단위에서 인권조례와 인권기구가 만들어지고 이 추세가 확산되고 있다는 점이다. 학교에서도 인권 교육이 부쩍 늘었다. 이를 통해 국가인권위원회를 넘는 활동이 다양하게 전개될 수 있으리란 기대가 높아지고 있다. 아래로부터의 변화다. 거기에 발맞춰 인권재단이 만들려는 민간 독자의 인권센터도 터를 잡고 리모델링 작업에 들어가 2013년 3월이면 개관한다.

박근혜씨가 18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그에게 많은 것을 기대할 수 없다. 훼손된 국가인권위원회의 독립성을 바로잡아달라고 요구하겠지만, 기대하는 것이 적으니 목소리도 높지 않을 것이다. 다만 대통령 직속기구로 만들려다 망신이나 당하지 않았으면 한다. 앞으로 5년, 국가인권위원회는 어디로 갈 것인가? 얼음장 밑으로도 물은 흐르듯이 이명박 정권 내내 인권의 한겨울임에도 봄을 준비하는 물은 흐르고 있다.

인권재단 사람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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