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구속됐을 땐 정말 오래갈 것으로 생각했다. 구속적부심을 마친 오후 구치소 로 들어가서 본격적인 징역살이를 준비했는 데, 이번에도 다시 나왔다. 열심히 변호해준 변호사들, 그리고 유엔의 문서까지 뒤져 ‘인 권옹호자’의 석방을 위해 국제적 네트워크를 조직해낸 후배들 덕분일 것이다. 조영황 국 가인권위원장은 개인 성명을 내서 나의 석방 을 촉구했다. 그 외에도 알게 모르게 힘써준 많은 이가 있었다. 그것은 내가 잘나서가 아 니라 그만큼 대추리 투쟁이 공감을 얻은 덕 분이었다.
그런데 누구나 인정하는 건 내 아내의 탄 원서가 판사의 마음을 울렸을 것이라는 점 이다. 지금도 내 아내의 절절한 탄원서가 석 방 탄원서의 모범처럼 인터넷에서 회자되고 있다. 아내는 탄원서에서 당사자인 내 입장 에서 보기에는 면구스럽도록 나를 한껏 추 어올려주었다. 아내는 “‘공무집행방해’라는 실정법보다 더 소중한 것은 이 땅의 평화이 고 농민들의 생존권”이라며 “얼마나 많은 악 이 그것에 저항한 사람들의 피와 눈물과 몸 부림 끝에 뒤바뀌었는지 역사를 돌아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 땅을 전쟁기지로 내어주 고 농민을 내쫓은 일도 부끄러운 역사가 되 리라는 것을, 실정법보다 더 소중한 가치를 용기 있게 지켜내려 했던 실천이 옳았음을 재판 과정에서 밝힐 것”이니 남편을 풀어달 라고 당당하게 요구했다. 나는 누구보다도 아내와 딸들의 이해와 지지를 받는 행복한 남편이자 아빠였다.
‘모범’으로 회자된 아내의 탄원서아내는 나의 불복종운동을 지지하고 있 었다. 인권운동은 불복종운동을 기본적인 행동으로 채택하고 있다. 직접행동이라고 도 하는 이 운동 방식은 실정법을 공공연히 어기며, 그에 따르는 피해와 희생은 감내한 다. 잘못된 실정법을 그대로 인정하는 게 아 니라, 그에 저항해 잘못을 바로잡으려는 행 동으로 정의를 세우는 일이다. 마틴 루서 킹 목사나 간디가 대표적인 이들이다.
나의 대추리 투쟁은 전형적인 불복종운 동이었다. 법원의 행정대집행을 연좌농성으 로 저지했고, 국방부가 용역과 경찰을 끌고 들어와 농로와 수로를 파괴할 때 포클레인이 나 레미콘 차량을 점거해 작업을 하지 못하 도록 행동했다. 이런 불복종운동은 대추리 투쟁 전반으로 번졌다. 평화적 생존권을 위 한 적극적인 불복종운동은 2006년 5월4일 대추리가 점령된 뒤에도 계속 이어졌다.
대추리의 불복종운동은 다양한 갈래로 전개됐다. 먼저 문화예술인들의 현장 예술 활동이었다. 미술·음악·연극·영화 등 예술 갈래를 망라한 예술인들이 번질나게 대추리 를 드나들며 마을을 평화예술마을로 변모 시켰다. 화가 최병수는 독불장군식으로 마 을 곳곳에 거대한 설치미술을 만들어 세웠 고, 화가 이윤엽은 마을에 눌러살면서 작품 활동을 했다. 예술인들은 시시때때로 이벤 트도 만들어냈다. 대추리에서 노래 한 자락 불러보지 않은 음악인이 없었다. 문화연대 는 달리는 영화관을 끌고 와서는 평화동산 에서 야외 영화 상영을 했다. 문화예술을 통 한 불복종운동은 이후 서울 용산으로, 제주 강정으로 이어졌다.
미디어활동가들의 활동도 이어졌다. 다큐 감독들은 대추리의 경험을 영화로 만들었 다. 농활을 온 성공회대 학생들은 ‘들소리 방 송’을 매일 제작해 촛불행사 때 주민들에게 틀어주고, 인터넷 사이트에 올렸다. 그리고 평화바람 식구들처럼 전국에서 달려와 아예 눌러앉은 지킴이들도 있었다. 그들은 국방부 와 합의하고 떠나간 주민들의 빈집을 수리해 살면서 문정현 신부님처럼 주소를 이전해 대 추리·도두리 주민이 됐다. 그들은 주민들에 게 농사짓는 법을 배워서 농사도 짓고, 투쟁 의 제1선을 담당했다. 매일 열리는 촛불행사를 풍성하게 만든 것도 그들이었다. 조약골은 기타를 치며 노래를 만들었다. 그가 만든 노래 중에 문정현 신부님의 연설 내용을 가사로 따서 만든 게 다.
한국 시민 불복종운동의 획을 긋다불복종운동의 백미는 아무래도 9월13일의 빈집 철거 저지 투쟁이었을 것이다. 부부 행세를 하고 들어온 활동가, 친척 방문을 하는 것으로 주민들과 입을 맞춰 들어온 사람도 있었지만, 포복으로 논둑을 1~2km 기어서 마을까지 들어온 이도 있었다. 인권활동가 5명은 인권단체들의 집인 ‘전망 좋은 집’의 네 기둥에 밧줄을 묶고 저항했다. 지킴이들과 활동가들은 철거 대상인 집들의 지붕 위에 올라가서 농성을 벌였다. 하루 종일 이어진 저항으로 국방부는 빈집의 일부만 철거했을 뿐이다.
이런 지킴이들과 활동가들의 다양하고도 집요한 활동으로 대추리에는 ‘솔부엉이도서관’이나 ‘대추리역사관’이 들어섰다. 이것은 주민들이 고분고분 물러나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정부에 전달하는 효과를 주었다. 마을은 고립됐어도 저항의 의지만은 불타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미국의 저명한 반전운동가 신디 시핸 일행과 일본의 평화활동가들이 찾아오기도 했지만 군과 경찰이 이들을 막아서 먼발치에서 대추리를 바라만 보다가 돌아갔다.
2006년 11월26일 ‘잊지 마, 기억해!’ 대추분교 운동회가 폐허가 된 대추분교 운동장에서 열렸다. 매년 해왔던 운동회를 하는 날, 경찰은 이날만은 외부인들의 출입을 허용했다. 하루 종일 언제 그랬느냐 싶게 즐겁게 주민들과 지킴이들이 어울려 놀았다.
하지만 그런다고 상황을 돌이킬 수는 없었다. 주민들은 4년간의 투쟁에 지쳐 있었다. 경제적으로도 궁핍해졌다. 농사에 의존해 살아온 이들이 농사를 짓지 못하니 당연한 결과였고, 이들에게 농협은 대출도 해주지 않아서 생활이 더욱 쪼들리게 만들었다. 운동 진영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저지 투쟁’에 총력을 기울이게 되어 평택 미군기지 확장저지 투쟁은 뒷전으로 밀렸다. 미국의 세계지배 전략에서는 FTA와 미군의 전략 변환이 같이 가는 것임에도 우리 운동 진영은 이것을 분리해서 대응했다. 주민들만 지친 게 아니라 운동 진영도 포기 상태였다. 고립된 마을, 대추리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정부와 협상을 통해 집단 이주를 하는 것이었다.
이런 분위기가 익자 김지태 이장이 병보석으로 석방됐다. 주민 대표를 감옥에 두고 협상하지는 못하므로 그리된 것이었다. 그리고 급격하게 정부와 주민들은 협상 절차에 착수했다. 2007년 2월23일, 합의문이 발표됐다. 떠나지 않고 남은 이들은 공동체를 유지하기로 했고, 정부는 이들의 마을을 조성해주고 저소득층 생계 대책으로 2014년까지 공공근로 등을 제공하기로 했다. 정부 당국자들은 환하게 웃었고, 주민 대표들은 침울했다.
“황새울아 우리 다시 돌아온다, 꼭”이제 떠날 일만 남았다. 2007년 3월25일, 935일째 촛불행사를 열었다. 대추리를 밝혀온 마지막 촛불을 드는 날에 400여 명이 농협 창고에 모였다. 촛불을 밝혀든 이들은 다른 날처럼 웃지 못했다. 결국 마지막이 왔다. 사회를 맡은 김택균 사무국장은 “우리는 꼭 이 땅을 찾을 것이고 내가 아니더라도 우리 자식들이 여기 와서 살 수 있는 날이 오길 기대하면서 촛불행사를 마무리지으려 한다”면서 “여러분의 힘찬 함성으로 935일째 촛불행사를 마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다른 때처럼 “와!” 하는 함성이 있었지만 행사가 끝나서도 아무도 일어나지 못했다. 문정현 신부님이 그예 엎드려 울음을 터뜨렸다.
협상대로 주민들은 3월 말까지 대부분 이주했다. 정말 대추리의 마지막 날이 왔다. 마을은 곧 사라지고 미군기지가 들어설 것이었다. 마지막을 담아두려는 이들이 모여 대추리와 도두리의 너른 들을 지키던 문무인상 앞에서 고사를 지내고 문무인상을 불태웠다. 그러고는 대추분교 운동장 한가운데에 파인 구덩이에 항아리를 묻었다. 항아리는 타임캡슐 대체물이었다. 다음에 향나무판을 묻었다. 향나무에 주민들은 “황새울아 우리 다시 돌아온다, 꼭 온다” “대추리 떠나기 싫다” 등의 문구를 적었다. 방승률 노인회장은 마이크를 잡고 울기만 했다. 문정현 신부님은 “노무현은 나라를 팔아먹은 부끄러운 대통령으로 기억될 것이다”라고 악을 썼다. 구덩이에 들어가서 향나무판을 받아놓던 신종원 신임 대추리 이장도 끝내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모두 울었다. 나도 울었다.
우리는 열병을 앓아왔다. 대추리·도두리 주민들이 전염시킨 병이어서 나는 ‘대추리·도두리 병’이라고 명명했다. 농촌공동체가 살아 숨 쉬는 그 마을에 왔다가 마을의 이력을 듣고 그들과 밥 한 끼 먹고, 술 한 잔 받아 먹다보면 생기는 병이었다. 짧게는 2년, 길게는 4년을 이 병을 앓아온 사람들, 그들은 대추리에 무슨 일이 있으면 달려가서 봐야 했다. 그 일이 설혹 잡혀가는 일이거나 검문소 앞에서 들어가지도 못하고 모기에 뜯기며 밤을 지새우는 일일지라도. 그 대추리·도두리 병도 끝났다. 문정현 신부님이 전북 군산으로 내려가기 전 밤새워 술을 마시며 노래를 불렀다. 모두 미친 것만 같았다.
마을을 마지막으로 떠난 이들은 지킴이들이었다. 4월9일, 10여 명의 젊은 지킴이들은 리어카에 짐을 싣고 서울로 향했다. 가는 곳마다 대추리를 기억하자며 낙서도 하고 노래도 불렀다. 그 초라한 행색이 보기 싫어서 끝내 그들의 발걸음을 외면했다.
도시빈민이 된 대추리 이주민들그 뒤 지독하게 아팠다. 생전 그때처럼 아픈 적이 없었다. 동생의 죽음 뒤처럼 가슴이 너무 아팠고 몸도 아팠다. 내가 이럴진대 그곳에서 마을을 이루고 논밭을 일구며 자식을 길러낸 대추리 주민들은 어땠을까? 대추리 주민들 중 44가구는 평택시 팽성읍의 노와리로 이주해서 가난한 도시빈민이 되어 근근이 살아가고 있다. 그들은 절대 대추리 쪽으로 가지 않는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한 마을을 지도상에서 지워버렸다. 그리고 2008년까지 끝낸다던 미군기지 확장공사는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 어마어마한 방위비 분담금을 대면서 미국을 위한 전쟁기지를 만들기 위해 마을을 없애고 주민들을 내쫓은 일을 나는 죽을 때까지 기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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