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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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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바다, 끝나지 않은 투쟁

에바다 ①- 온갖 비리도 모자라 장애 학생에게 폭력을 사주한 재단
늪과 같은 사회복지시설과 싸움에 빠져 똥물을 뒤집어쓰다
등록 2013-03-30 10:48 수정 2020-05-03 04:27

“춥고 배고파서” 농성을 시작한 장애 학생 들이 있었다. 늘 폭력과 학대에 시달리던 아 이들은 한창 자랄 나이에 너무 배가 고파서 시설을 나가 동네 쓰레기통을 뒤지기도 했 다. 자주 찾아오던 미군들에게 성추행을 당 하기도 했던 그 아이들은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청각장애 학생들이었다. 에바다는 지 금까지도 대표적인 인권유린 사회복지시설로 낙인찍혀 있다. 벌써 10년 전에 에바다 사태 가 종결돼 정상화 과정을 걸어왔음에도 인터 넷에서는 지금까지 그렇게 검색되고 있다. 그 만큼 에바다는 사회복지시설이 갖는 모든 문 제점을 고스란히 안고 있던 곳이었다.

사회복지시설 ‘에바다농아원’ 사태가 터지자 장애인단체 활동가 등이 1999년 7월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공원에서 집회를 열었다. 에바다 사태는 장애인 시설의 심각한 문제를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한겨레 이정우 기자

사회복지시설 ‘에바다농아원’ 사태가 터지자 장애인단체 활동가 등이 1999년 7월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공원에서 집회를 열었다. 에바다 사태는 장애인 시설의 심각한 문제를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한겨레 이정우 기자

피하고 싶지만 피할 수 없었던

미국의 선교사가 운영하던 시설을 이어받 은 최성창을 비롯한 최씨 일가는 곧 그 시설 을 사유화했다. 한 교단의 목사이기도 했던 최씨는 누나를 비롯한 형제와 친·인척을 시 설의 임원 자리에 앉혔다. 경기도 평택시 진 위면에 위치한 에바다복지회였고, 그 복지회 가 운영하는 에바다학교와 에바다농아원과 에바다장애인종합복지관에서 온갖 비리와 인권유린이 벌어졌다. 국가와 시의 지원금을 착복하고 각종 후원금도 착복하면서 농아원 내에 불법으로 교회와 신학교까지 만들어서 교주 노릇을 했다.

그들이 저지른 비리는 가히 종합판이었 다. 유령 직원, 이중 등록된 원생, 사망하거 나 퇴소한 아이들까지 그대로 인원으로 잡 아서 지원금을 타 썼다. 청각장애 아동들을 제책소에서 혹사시키기도 했다. 맞아 죽었 다는 아이, 실종된 아이, 팔려나갔다는 아 이들에 대한 소문도 돌았다. 학교는 학교대 로 정상적으로 운영될 수 없었다. 청각장애 아이들을 볼모로 자신들의 재산을 불리기에 급급했던 비리재단과의 투쟁은 7년 동안 이 어졌다.

1996년 11월27일 새벽, 당시 김영삼 대통 령에게 “대통령 할아버지께” 보내는 편지를 쓴 뒤 에바다농아원에서 학생회장이던 이경 훈을 비롯한 청각장애 아이들이 농성에 들 어갔다. 출동한 경찰은 농성하는 학생들의 얼굴에 권총을 들이대기까지 했다. 이후 권 오일을 비롯한 선생님들이 농성 대오에 합류 했다. 그들은 서울의 한 장애인 단체 사무실 지하에서 6개월 이상 농성했고, 그 뒤에는 평택시 진위면의 한 가옥을 세내어 오갈 곳 없는 장애 학생들의 기숙사로 쓰면서 농성 을 이어갔다. 그 집의 이름은 해 아래 평등 을 추구한다는 뜻으로 ‘해아래집’으로 지었 다. 나중에 이곳은 학생들의 교실이 되기도 했다. 그 후 김대중 대통령이 TV에 나와 에 바다 비리의 해결을 약속했지만 그 약속은 실현되지 않고 있었다.

명확한 비리, 힘센 양비론

나는 솔직히 에바다 문제를 잘 알고 있었 지만, 이 문제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사회복 지시설과의 싸움은 늪과도 같았다. 너무 어 려운 문제였기 때문이다. 적당한 거리를 두 기로 했다. 그런데 운명처럼 나는 이 사건을 피해가지 못했다.

1999년 여름, 박경석 노들장애인야간학 교 교장이 나를 찾아왔다. 지금은 꽁지머리 지만 스포츠형 머리를 하고 휠체어에 올라앉 은 그의 단단한 모습과 지금도 잊지 못할 형 형한 눈빛으로 그는 에바다의 상황을 설명 했다. 농성 1천 일이 다가오고 있음에도 아 직까지 비리 재단이 장애 학생들을 앞세워 시설을 장악하고 있는데 인권단체들이 나서 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내 양심을 바늘로 콕콕 찔러대는 그의 말을 듣기가 괴로웠다.

그로부터 나는 도망갈 수 없었다. 나는 인 권단체와 시민들에게 제안서를 보냈고, 설 명회를 진행한 뒤 ‘에바다 정상화를 위한 연 대회의’를 구성하고 집행위원장직을 맡았다. 농성 1천 일을 앞두고 반전의 계기를 만들어야 할 필요성이 커졌다. 비리 재단을 통해 시설을 장악한 최씨 일가와 그들과 찰떡궁합을 이루는 김선기 평택시장을 비롯한 평택시청, 평택경찰서와 검찰, 그리고 그 위의 정치권력과 싸워야 했다. 시설장 중심으로 운영할 수 있게 만들어놓은 사회복지사업법을 비롯한 복지정책과 법과도 싸워 이겨야만 하는 투쟁이었다.

구재단의 비리 문제는 명확했다. 그들과 결탁한 공무원, 심지어 김선기 평택시장이 구재단 쪽과 한 이면계약도 SBS가 폭로했다. 그런데도 사태가 해결되지 않는 데는 양비론이 큰 구실을 했다. 구재단 쪽도 문제지만, 강경한 운동권이 주도하는 이쪽도 문제라는 식의 물타기 논리를 극복해야 했다. 경찰도, 검찰도, 정치권도 모두 이같은 입장이었기 때문에 에바다 문제의 해결 시기는 뒤로 미뤄졌다.

1999년 8월18일 에바다농아원 원생들의 농성 1천 일째를 맞아 경기도 평택역 앞에 설치한 선전판을 한 시민이 유심히 보고 있다. 에바다 사태는 일부 장애인을 앞세워 기득권을 놓치지 않으려는 기존 재단 쪽의 저항으로 장기화됐다. 한겨레 박승화 기자

1999년 8월18일 에바다농아원 원생들의 농성 1천 일째를 맞아 경기도 평택역 앞에 설치한 선전판을 한 시민이 유심히 보고 있다. 에바다 사태는 일부 장애인을 앞세워 기득권을 놓치지 않으려는 기존 재단 쪽의 저항으로 장기화됐다. 한겨레 박승화 기자

에바다에서는 폭력이 일상화돼 있었다. 해아래집 여선생님들이 당한 고초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학교 교실에서 제자들에게 뺨 맞고 얼굴에 침을 맞는 것은 하찮은 일이었다. 농성 초기에 임신한 여선생님이 폭행을 당하기도 했다. 뜨거운 물세례를 받아 실신해서 119 구급차를 타고 병원에 가고, 교실에서 똥물 세례를 받고는 했다. 그럴 때마다 선생님들은 눈물로 그들을 용서했다. 그들에게 잘못이 있는 게 아니라 그들을 앞세워서 폭력을 행사하도록 배후에서 조종하는 최씨 일가가 문제라는 점을 그들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

기독교 목사였던 최성창과 그 일가에게 종교인으로서 일말의 양심이 있었다면 자신들의 잘못이 드러났을 때 그걸 인정하고 물러가면 될 일이었다. 그렇지만 청각장애 학생들을 너무도 잘 이용할 줄 알았던 그들은 그 반대의 길을 택했다. 2001년 8월 이후 우여곡절 끝에 공익이사들이 다수를 점하고 그들을 대표하는 윤귀성씨가 이사장을 맡은 상황에서는 더더욱 폭력에 의지했다.

법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밀릴 수밖에 없던 최씨 일가는 청각장애 학생들을 철저히 세뇌시켰고, 그들에게 위계적인 질서를 만들어서 관리했다. 졸업한 선배가 후배들을 집합시키고 지휘했다. 몽둥이로 때리고 담배로 지져대는 선배들 앞에 후배들은 점점 길들여져서 다시 아래 후배들을 그렇게 대했다. 성폭력도 다반사로 이루어졌다. 아이들을 ‘폭력기계’로 만들어갔다.

“차라리 저를 패십시오”

구재단 쪽은 학생들을 앞세워 정문을 잠가버렸다. 쇠사슬로 묶어놓고, 그 앞에서 쇠파이프를 들고 지키게 했다. 그러니까 합법적인 이사들이 시설과 학교에 들어갈 수 없고, 오히려 법적으로 권리가 없는 구재단 쪽이 장애 학생들의 힘으로 시설을 불법 점거하는 상황이 되었다. 우리는 경찰에 수없이 불법 점거 세력들을 퇴거시켜줄 것을 요구했다. 그때마다 경찰은 우리 요구를 묵살했다. 그러다 법원에 퇴거 가처분 신청을 내게 되었고, 그것이 받아들여졌다.

2002년 2월 말, 법원 직원이 퇴거 명령 가처분 결정문을 고지하러 오자 사주를 받은 장애 학생들이 우르르 몰려나와서 법원 직원과 에바다복지회 남정수 사무국장, 권오일 교사를 폭행했다. 권오일 교사는 농성 교사와 학생들의 핵심으로 지목돼 늘상 폭력에 시달려야 했는데, 이때는 심하게 당해서 전치 6주의 부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했다.

그 뒤 그간의 에바다 사태에 대한 문제점을 파헤치는 MBC <pd>이 방영됐다. 장기화된 사태의 원인을 짚고, 문제를 풀기 위해서 관련 기관과 정치권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pd> 방영 다음날인 2002년 3월16일 자정, 해아래집에서 곤히 잠을 자던 20명의 청각장애 학생들과 선생님들이 괴한들에게 피습을 당했다. 각목으로 무장한 괴한들은 사람들을 어둠 속에서 폭행하고 집기를 부순 뒤 사라졌다. 그중에 이성존이라는 학생은 덩치가 크고 유도를 해서 힘도 셌지만 고스란히 폭력을 감내하다가 부상이 심해 병원에 입원했다. 습격 사건은 구재단이 사주한 일이었음이 나중에 드러났다.
그대로 둘 수는 없었다. 연대회의 집행위원장이기도 했고 2001년부터 이사가 된 내 책임을 통감했다. 갈수록 폭력기계가 돼가는 아이들을 구재단의 손아귀로부터 빼내려면 뭐라도 해야 했다. 인터넷 신문 에 절절한 호소문을 싣고 평택으로 박경석 교장과 함께 내려갔다. 우리는 피켓을 들고 정문 앞에 섰다.
“선생님과 학생들을 패지 말고 차라리 저를 패십시오.”
“배후세력은 장애 학생들에게 폭력을 사주하지 마라!”
30분쯤 가로막힌 정문 앞에 서 있었을까? 한 아이가 바가지에 뭔가를 들고 와서는 우리를 향해 뿌려댔다. 나는 피켓을 들어올려 얼굴을 가렸다. 그러자 지독한 냄새…, 똥물이었다. 척추장애로 휠체어에 앉아 있던 박경석 교장은 미처 피하지 못하고 얼굴과 머리, 옷에 고스란히 똥물을 뒤집어썼다.
똥독 오른 얼굴로 허허 웃던
물수건으로 똥물을 닦아내고 다시 정문 앞에서 피켓을 들었지만, 박 교장의 얼굴에 똥독이 올라서 어쩔 수 없이 그날은 철수했다. 박경석 교장은 “이놈들이 장애인인 나에게 똥물을 퍼붓네” 하면서 허허 웃었다. 그리고 “고마워” 하고는 인사를 했다.
똥물을 뒤집어써서 고마운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똥물을 뒤집어쓰고 나니 오히려 홀가분했다. 이제 나도 똥물을 뒤집어썼으므로 그들과 나란히 어깨를 할 수 있는 동료가 되지 않았는가. 그래서 나도 고맙다고, 그렇지만 폭력에 굴할 수는 없다고 다음날 다시 호소문을 썼다. 우리의 뒤를 이어 다른 이사들이 학교 정문 앞에서 대화로 문제를 풀자고 호소했다. 이런 일련의 폭력 사태는 비리 재단이 저지른 악수였음이 서서히 드러났다. 열릴 것 같지 않던 에바다의 문을 우리는 열어갔다. (다음회에 계속)
인권재단 사람 상임이사

*인권센터 건립 기금 모금인 ‘주춧돌’ 마감이 3월31일로 다가왔습니다. 주춧돌 참여는 전화(02-363-5855) 또는 홈페이지(www.hrcenter.or.kr)에서 가능합니다.

*인권센터 건립 기금 모금인 ‘주춧돌’ 마감이 3월31일로 다가왔습니다. 주춧돌 참여는 전화(02-363-5855) 또는 홈페이지(www.hrcenter.or.kr)에서 가능합니다.</pd></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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