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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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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바다의 오명 이젠 벗겨줘야

에바다②–법인 장악한 최씨 일가의 패악질로 오랜 고통 겪은 학생들 정상화 뒤 10년… 경기 남부 장애인 복지의 중심 기관으로 거듭나다
등록 2013-04-19 19:56 수정 2020-05-03 04:27

에바다 투쟁을 영상으로 기록한 박종필 감독의 50분 분량의 다큐멘터리 가 만들어진 건 1999년이었 다. 나는 박 감독에게 이 영화의 제목을 잘 못 붙여서 투쟁이 끝나지 않는다고 구박하 고는 했다.
에바다 투쟁이 길어진 것은 궁극적으로 법인을 장악한 최씨 일가가 계속 장애 아동 들을 볼모로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했기 때문이고, 관리·감독 책임을 진 경기도 평택 시가 이들을 감싸고 돌았기 때문이다. 당시 김선기 평택시장(그는 현재도 평택시장이다) 은 국회에 나가 이사진을 전면 개편할 것을 약속해놓고도 번번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 다. 심지어 이성재 의원을 비롯한 국회의원 3명이 관선이사장과 이사가 된 이사회가 구 성되기도 했지만, 꼬인 문제는 여전히 풀리 지 않았다.
에바다 투쟁 주체들은 초기부터 비리 재 단의 완전한 축출을 주장했다. 2000년부터 이 싸움은 구체적으로 이사회를 어떻게 하 면 민주적으로 재편할 것인가에 모아졌다. 2000년 평택시청 앞 등에서 집회와 단식농 성, 걷기대회 등을 수없이 진행하면서 에바 다 투쟁을 전면화했다. 치열한 투쟁으로 대 학생연대회의 의장이 구속되고 많은 사람들 이 벌금형을 받기도 했다.

지난해 9월13일 경기도 평택시 호남향우회관에서 열린 에바다장애인평생학습학교 1회 졸업식에서 졸업장을 손에 쥔 졸업생들과 교직원이 함께 노래를 부르고 있다. 한겨레 홍용덕 기자

지난해 9월13일 경기도 평택시 호남향우회관에서 열린 에바다장애인평생학습학교 1회 졸업식에서 졸업장을 손에 쥔 졸업생들과 교직원이 함께 노래를 부르고 있다. 한겨레 홍용덕 기자

법원 명령에도 기존 이사장 편드는 경찰

마침 관선 나사렛대학의 김종인 교수가 관선이사장으로 선임된 뒤부터 이사회가 정 상화를 위한 가닥을 잡아갔다. 권오일 교 사의 출근과 구화전문가 김지원 교장의 취 임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일이었다. 하지만 김지원 교장의 취임식을 하기로 한 2001년 5월15일 새벽, 교장실은 처참하게 파 괴됐다. 학교에서 교장과 교사는 하찮은 존 재였다. 최씨 일가는 자신들이 장악한 학생 들을 동원해 그들에게 수시로 폭력을 행사 하도록 만들었다.

급기야 그해 8월 초, 김종인 이사장은 평 택시 안중 지역에서 치과의사를 해온 인제 대 외래교수 윤귀성씨를 신임 이사장으로 선임하고 김칠준 변호사, 김용한 평화운동 가, 박경석 교장과 인권운동을 해온 나까지 포함해 새 이사진을 구성한 뒤 자신은 물러 났다. 이로써 이사회에서 연대회의 쪽 인사 가 이사장이 됐고, 이사의 다수를 점하게 됐 다. 이렇게 되자 다급해진 것은 최씨 일가였 다. 그해 10월26일을 기해 그들은 학생들을 동원해 학교를 봉쇄하고 시설을 불법적으로 점거했다.

이런 상황에서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새 로 구성된 이사회였다. 학교에 갈 수 없는 아 이들을 해아래집에서 공부시키며 끊임없이 불법 점거세력을 퇴거시켜줄 것을 경찰에 강 력히 요구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돌아오는 대답은 법원의 퇴거 명령이나 출입금지가처 분을 받아오라는 것뿐이었다. 법원 집행관 이 법원의 명령서를 학교 정문에 고지하다가 발생한 폭력 사태 이후의 과정은 앞서 말한 바와 같다.

법원의 명령이 있었음에도 경찰은 여전히 최씨 일가의 편이었다. 충돌을 예방한다면 서 학교와 농아원을 장악한 그들을 그대로 방치했다. 끔찍한 폭력 사태 이후에도 경찰 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이사회 는 자구책으로 2차례에 걸쳐 직접 시설에 진 입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번번이 최씨 쪽 폭 력 학생들에게 폭행을 당하거나 경찰의 제 지를 당해 끌려나왔다. 불법이 합법을, 폭력 이 비폭력을 이기는 답답한 상황이 겨울 내 내 계속됐다.

해가 바뀌어 2003년 2월 학교가 비정상 적으로 운영될 수밖에 없자 경기도교육청은 신입생 배정 불가를 통보했다. 학교가 폐쇄 될 위기에 몰린 것이다. 이사회는 이 사태를 풀기 위해 장애인종합복지관에 임시 교사를 마련해 수업을 진행했고, 신입생으로 12명의 청각장애 학생을 확보해 교육청의 신입생 배정 불가 방침을 철회시켰다. 해아래집에서 아이들을 돌보며 가르쳐온 교사들에 대한 신뢰가 부모들의 마음을 움직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사랑으로 폭력 상처 씻은 아이들

학교에 볼모로 잡혀 있던 아이들도 하나둘 해아래집으로 넘어왔다. 그런 아이들은 처음엔 주눅 들어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수화도 안 하다가 해아래집의 따뜻한 분위기에 동화돼 곧 원래 그들의 표정을 되찾아갔다. 사랑받지 못한 아이들은 선생님과 선후배의 각별한 사랑 속에서 폭력의 상처를 씻어갔다. 해아래집 아이들이 시내에 나갔다가 최씨 쪽 학생들을 만나 매를 맞고 돌아오는 일도 있었지만 그래도 아이들은 해아래집을 떠나지 않았다.

이사들과 투쟁 주체들은 해아래집에서 이사회를 비롯해 수많은 모임을 수시로 열었다. 이사만이 아니라 투쟁 주체들도 함께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수시로 머리를 맞댔다. 경찰은 운동권 인사들로 구성된 이사회를 부정적 시각으로 보았다. 하지만 우리는 실없는 농담도 잘했다. 개그맨들의 집합장 같았다. 김칠준·김용한 이사의 수준 높은 개그에 비해 권오일 교사는 썰렁 개그의 대가였다. “금정 모 여고에서 학생들이 집단적으로 사망한 사건을 아시나요?” 또 뭔 헛소리를 하나 생각하다가 말해보라고 하면 “피구를 하는데 여학생들이 금을 밟아서 죽었다. 학교에서 피구는 금지해야 한다”고 말하는 식이었다. 웃음의 에너지는 에바다 투쟁을 오래도록 하면서도 지치지 않는 비결 중 하나였다.

노무현 정부 초기 청와대 참여혁신수석비서관은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출신의 박주현 변호사였다. 3월에 이사회는 박 수석을 면담했다. 그리고 답을 기다렸다. 5월 하순에야 답이 왔다. 평택 경찰의 양비론에 입각한 정보보고 때문에 판단이 늦어졌다고 했다. 청와대는 편향된 태도를 견지해온 평택 경찰을 배제하고 경기경찰청을 직접 움직여 이 문제를 풀고자 했다.

2003년 5월28일 경찰의 보호를 받으며 우리 이사들과 노동자, 학생, 활동가 등이 대오를 지어 학교 정문에 도착했을 때 여전히 정문은 쇠사슬에 칭칭 동여매져 있었고, 열쇠가 잠겨 있었다. 절단기로 이를 끊어내고 학교로 밀고 들어가자 곳곳에서 최씨 쪽 학생들이 폭력적으로 저항했지만 손쉽게 순식간에 학교와 농아원을 모두 접수했다. 학교와 최씨 일가들이 불법으로 만들어놓은 교회 시설들을 확인하고, 농아원에 들어갔을 때 아주 짧은 순간 최성창과 대면했다. 순간적으로 최성창은 농아원으로 들어가 문을 잠가버렸다. 그때 그를 붙잡아 밖으로 끌어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곧 평택 경찰이 개입해 문을 따고 들어가려는 우리 앞을 막았다. 다시 평택 경찰의 병이 도졌다.

2000년 8월 상경 시위를 벌이는 에바다학교의 청각·언어 장애아들. 에바다 투쟁이 길어진 것은 궁극적으로 법인을 장악한 최씨 일가가 계속 장애 아동들을 볼모로 삼아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장애인복지신문 제공

2000년 8월 상경 시위를 벌이는 에바다학교의 청각·언어 장애아들. 에바다 투쟁이 길어진 것은 궁극적으로 법인을 장악한 최씨 일가가 계속 장애 아동들을 볼모로 삼아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장애인복지신문 제공

최씨 쪽 인사들도 껴안으려 노력

5월31일, 경찰이 최성창 등을 퇴거시키지 않고 감싸고 도는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나는 농아원 건물로 직접 찾아가기로 했다. 농아원 앞에 이르자 다시 경찰이 가로막았다. 항의하는 나를 땅바닥에 눕히고 팔을 꺾었다. 이승헌 법인 사무국장은 경찰에 멱살이 잡혔다. 항상 이랬다. 하지만 최성창이 오래 버틸 수는 없었다. 6월3일, 최성창 등은 경찰버스로 에바다를 떠났다. 이로써 에바다에서 최씨 일가를 완전히 몰아내는 데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6월7일 새벽 4시께 60여 명이 습격해 들어왔다. 어둠 속에서 돌을 던지고 쇠파이프를 휘둘러댔다. 우리 쪽은 몇 명 없었고, 그래서 우리 쪽 사람들이 피를 흘리며 많이 다쳤다. 그중에 중상을 입은 노동자도 있었다. 쫓겨나간 최씨 일가가 시설을 탈환하기 위해 벌인 폭력극이었다. 그렇지만 그 뒤 그들은 더 이상 침탈하지 못했다.

감격할 시간도 없었다. 먼저 갈라진 사람들을 화합시키는 게 문제였다. 최씨 쪽에 붙어 온갖 나쁜 짓을 저지른 교사와 직원에 대해서는 징계를 최소화했다. 직원들의 화합을 위한 프로그램도 운영하려 애썼다. 학생들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금세 친해졌다. 최씨 일가를 따라나선 아이들은 그 뒤 에바다 주변에서 사라졌다. 그들마저 끌어안고 싶었으나 몇몇은 끝내 우리를 떠나갔다.

학교와 농아원은 처참하게 파괴돼 있었다. 성한 문짝이 하나도 없다시피 했다. 시설을 보수하는 것부터 일이었다. 돈 문제가 심각했다. 최씨 일가는 회계장부를 모두 빼돌렸다. 그들의 부정이 드러나는 것이 두려웠으리라. 그들이 몇 년 동안 납부하지 않은 건강보험료 등 각종 공과금 청구서를 비롯해 그동안 갚지 않은 수많은 청구서가 답지했다. 그 뒤 몇 년 동안 최씨 일가가 저질러놓은 일을 수습하느라 이사회는 다른 일을 못할 정도였다.

그로부터 10년, 에바다는 더 이상 비리 복지법인이 아니다. 전원 헌신적인 공익이사들로 구성된 이사회부터 다르다. 이제 법인을 통해 사적 이익을 추구할 수 없도록 시스템을 만들어놓았다. 에바다학교, 에바다마을(옛 농아원), 장애인종합복지관을 비롯해서 장애인자립생활센터, 장애인평생학교(야학) 등을 거느리고 평택시만이 아니라 경기 남부의 장애인 복지의 중심 기관으로 서고 있다. 가장 모범적으로 운영되는 사회복지시설을 만들자고 다짐했던 구성원들의 눈물겨운 노력이 결실을 맺고 있다. 탁구로 유명한 에바다학교에는 최근 청각장애인이 급감하는 추세지만 학생 수가 줄지 않고 있다. 지금은 학교와 기숙사를 신축했고, 농아원도 새로 지어 과거의 어두웠던 흔적은 찾아볼 길이 없다.

인권운동사 주요 사건 분출한 평택

이제는 에바다의 오명을 벗겨줄 때가 됐다. 지난 10년 동안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이사장을 비롯한 구성원들에게 박수를 보내줄 때다. 에바다는 사회복지시설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고 있다. 나는 지난해 말 에바다 이사직을 사임하면서 무거운 짐을 덜어놓았지만, 내 가슴속에는 그들과 함께했던 시간이 영원히 진한 여운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평택과의 인연은 에바다로 끝나지 않았다. 평택은 2000년대 인권운동사에서 한 획을 긋는 중요한 사건들을 분출해내던 그런 곳이었다.  

인권재단 사람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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