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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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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에 나부끼던 외로운 ‘평화’ 깃발


세 차례 행정대집행 무산되자 새벽 군사작전 돌입
저항의 상징 대추분교는 포클레인 삽날에 무너지고
마을 둘러싼 철조망에 주민들 고립감은 날로 심화
등록 2013-07-10 04:34 수정 2020-05-02 19:27
2006년 11월 군인들이 경기도 평택 대추리 미군기지 예정지에서 철조망 추가 설치 작업을 하고 있다. 국방부는 세 차례의 행정대집행이 실패로 돌아가자 군병력을 투입해 대추리를 외부로부터 고립시켰다.한겨레 박종식

2006년 11월 군인들이 경기도 평택 대추리 미군기지 예정지에서 철조망 추가 설치 작업을 하고 있다. 국방부는 세 차례의 행정대집행이 실패로 돌아가자 군병력을 투입해 대추리를 외부로부터 고립시켰다.한겨레 박종식

지난 6월29일 미국에서 들어온 한국현대 사 연구자, 평화활동가 등 60여 명을 인솔하 고 경기도 평택 대추리를 방문했다. 미군기 지 확장공사 현장을 언덕에 올라 멀리서 바 라보았다. 2008년까지 미군기지 확장공사 를 완료하기로 한-미 간에 합의했기 때문에 국가 간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라며 서둘 러 주민들을 내쫓은 기억이 떠올랐다. 공사 는 지금도 진행 중일 뿐만 아니라 완공 목표 도 2014년에서 다시 2016년으로 늦춰졌다.

국방부, 군사작전 앞두고 돌연 대화 제의

2005년 11월17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APEC) 회의에 참석한 조지 부시 미국 대통 령을 맞아 노무현 대통령은 미국의 중대한 군사전략 변화를 가져오게 되는, 따라서 한 반도에 전쟁 위기를 고조시키는 ‘전략적 유 연성’에 합의하는 회담을 했다. 그리고 2006 년 워싱턴으로 날아간 반기문 외무장관은 이를 발표했다. 이로써 한국은 세계 최초로 미국의 새로운 군사전략 변화를 인정한 국가 가 되었다.

대추리는 더 이상 평택의 한 작은 마을이 아니었다. 이 마을을 구하면 한반도의 평화 를 지키고, 동아시아의 평화에 기여할 만큼 중요해졌다. 주민들을 신속하게 쫓아내겠다 고 윤광웅 국방부 장관은 연초부터 벼르고 있었다. 여기에 맞서 대추리 주민들은 2006 년 1월 보름 동안 전국 도시를 트랙터로 돌면 서 “오는 미군 막아내고 올해도 농사짓자”고 외쳤다. 전국의 농민회·노동조합·시민사회 단체에 평택 미군기지 확장 저지 투쟁 소식 을 알리고 가는 지역마다 촛불을 들었다. 그 리고 그들에게 농사지을 때 연대해줄 것을 요청했고, 지역의 농민들은 그에 화답했다.

내가 첫 번째 구속됐던 3월15일의 행정대 집행은 대추리 주민들과 평택미군기지확장 반대범국민대책위원회(이하 평택범대위)가 3월17일부터 논갈이를 본격적으로 하려던 것을 막기 위한 조처였다. 경찰이 막아댔지 만 경찰의 포위망을 뚫고 들어온 전국의 트 랙터와 함께 100만 평 가까운 논을 갈고 그 봄에 씨를 뿌렸다. 그러자 국방부는 경찰과 용역을 앞세워 4월7일 3차 행정대집행을 단 행했다. 이번에는 경찰 5천 명이 동원됐다. 수로를 파괴하고, 거기에 레미콘을 부어서 논에 물을 대지 못하게 하려고 했다. 하지만 주민들은 밤새 레미콘을 모두 걷어내고는 들 도깨비가 한 짓이라며 즐거워했다. 세 차례 의 행정대집행이 무산되자 국방부는 군사작 전을 준비했다. ‘여명의 황새울’ 작전이었다.

이 작전을 앞두고 국방부는 갑작스레 대화 를 제의해왔다. 그러고도 볍씨를 뿌린 들판 에서 헬기가 이착륙 연습을 하고, 경찰 지휘 부로 보이는 이들이 곳곳에서 지형을 익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군에서 진압작전을 위 해 훈련 중이라는 얘기가 들려왔고, 급기야 는 서울역 등지에서 노숙인을 대거 모집해 용 역으로 쓰려는 정황도 포착됐다. 의심이 가시 지 않았어도 평택범대위는 두 차례의 실무회 의에 응했다. 하지만 끝내 대화는 결렬됐다.

5월3일 밤, 곳곳에서 지킴이들이 달려왔 다. 노동자·농민·학생·종교인만이 아니라 시민들이 개별적으로 달려왔다. 마을은 1만 명 넘는 경찰에 의해 포위되고 있었다. 군인 들은 밤새워 군용트럭을 타고 마을 주변에 포진했다. 5월4일 새벽 4시, 마을회관의 사 이렌이 밤공기를 갈랐다. 저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구속적부심에서 석방된 나는 평택범대위 의 언론담당으로 기자들 앞에 섰다. 군이 민 간인을 진압하는 상황이 시작되고 있다, 우 리는 끝까지 평화적인 시위로 막아낼 것이라 는 등의 말을 했던 듯싶다. 날이 밝자 군인 들이 안성천에 부교를 띄워 불도저와 포클 레인 등의 장비를 운반하는 게 눈에 띄었고, 헬기는 도두리 방향에서 수없이 날아와서는 들판에 철조망 묶음들을 내려놓았다. 훈련이 잘된 군인들은 신속하게 볍씨가 움터서 자라나고 있는 황새울과 도두리 등의 들에 거침없이 철조망을 쳐갔다.

여자들은 통곡하고 남자들은 담배만

그리고 경찰은 내리 방향에서 다짜고짜 폭력을 휘두르며 짓이기고 쳐들어왔다. 방패에 찍히고 곤봉에 머리가 깨진 노동자와 학생들은 예상을 뛰어넘는 폭력 앞에 대추분교로 쫓겨왔고, 대보름 행사에서 쓰다 남은 대나무봉을 들고 경찰에 대적했다. 하지만 그놈의 대나무봉이라는 게 경찰 방패를 몇 번 건드리면 갈라져버려서 무용지물이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비폭력으로 철저히 깨지는 게 좋았을 성싶다. 아니나 다를까, 언론에는 경찰에 의해 피범벅이 된 노동자와 학생들의 모습보다는 우리 쪽이 죽봉으로 경찰을 때리는 모습만 나갔다. 낭패였다.

그날 오후 대추분교는 교실 벽과 바닥에 유혈이 낭자했다. 처절한 저항도 소용없이 500명 넘는 사람들이 연행됐다. 주민들이 지켜보는 앞에서도 폭행하고, 온갖 욕설을 퍼붓던 악귀 같은 경찰의 모습, 거기에 비명밖에 지를 게 없던 사람들이 줄줄이 끌려나왔다. 대추분교 지붕 위에 올라가 있던 신부님들이 더는 버티지 못하고 내려오자 그들은 대추분교를 부수기 시작했다. 주민들의 애환이 서려 있던 그곳은 거대한 장비에 의해 맥없이 부서져내렸다. 할머니들은 땅을 치며 통곡하고, 할아버지들은 담배만 뻐끔뻐끔 피워댔다. 대추리 투쟁의 상징과도 같던 그곳 대추분교가 무너지는 현장을 운동장에 서서 비통한 심정으로 지켜봤다.

어둠이 깔리기도 전에 대추분교의 잔해는 큰 무덤을 이루었다. 다음날 아침이 되자 대추분교의 잔해 더미 위에 누군가 ‘평화’란 깃발을 세워놓았다. 처참하게 무너져내린 대추분교 위에서도 나부끼던 평화, 평화는 참으로 멀었다.

다음날 전국에서 수천 명이 소식을 듣고 달려왔다. 그들은 본정리 농협 앞에 집결해서는 도두리 방향으로 넘어와서 철조망을 끊고 대추리로 달려왔다. 군인들은 민간인 시위대를 낚아채 논바닥에 제압해놓고는 포박했다. 곤봉을 마구 휘둘러댔다. 어제의 폭력 앞에 시름에 잠겼던 주민들은 그런 시위대를 얼싸안았다. 시위대는 평화공원에 모여 결의를 다지다가 다시 황새울 들판으로 가서 저들이 쳐놓은 철조망을 끊고 제거했다. 그렇게 그날 오후는 승리감을 맛보았다.

그런데 서울에서 긴급하게 연락이 왔다. 경찰 차량이 무더기로 평택으로 향하고 있다는 정보였다. 마침 저녁 촛불행사도 마치고 해산 중이었는데 마을에 들이닥친 경찰은 사람들을 무조건 연행해갔다. 마을 골목마다 다시 비명이 하늘을 찔렀다. 미란다원칙 고지 같은 것은 없었다. 경찰을 피해 집 담을 넘고, 집마다 전깃불을 껐다. 여기저기서 끌려가면서 두들겨 맞는 소리가 들렸다. 공포, 1980년 광주가 이랬을까? 경찰의 군홧발 소리가 잠잠해질 때까지 어둠 속에서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로만 연락하며 상황을 파악했다. 전국에서 상황을 듣고 궁금해했지만 거기에 답할 수 없었다.

주민들이 쫓겨난 뒤 중장비에 의해 파괴된 대추리 전경. 저항의 거점이자 상징이던 대추분교가 무너지던 날, 할머니들은 땅을 치며 통곡하고 할아버지들은 담배만 뻐끔뻐끔 피워댔다.한겨레 김기성

주민들이 쫓겨난 뒤 중장비에 의해 파괴된 대추리 전경. 저항의 거점이자 상징이던 대추분교가 무너지던 날, 할머니들은 땅을 치며 통곡하고 할아버지들은 담배만 뻐끔뻐끔 피워댔다.한겨레 김기성

미란다원칙 고지 없이 무차별 연행

그날 이후 마을은 섬이 되었다. 내리 쪽과 도두리 방향으로 들어오는 길목에는 경찰과 군인들이 검문소를 설치했고, 그들의 허락을 받아야만 마을에 들어올 수 있었다. 버스까지 올라와 사람들을 끌어내렸다. 이른바 절차를 무시하고 편법으로 설정한 군사시설 보호구역의 위력은 나날이 높아졌다. 인권침해를 따져보았자 요지부동. 대추리 주민들은 하루아침에 철조망 밖에서 논에 자라는 벼를 안타깝게 바라보아야 했다. 지난해 파종한 보리가 누렇게 익어갈 즈음 겨우 보리와 감자만을 수확하는 게 허락됐다. 저 논에 피도 뽑고 거름도 줘야 하는데…. 수배 중이던 김지태 대추리 이장이 경찰에 자진출두하고, 문정현 신부님이 청와대에서 보름 넘게 단식하고, 몇 번의 범국민대회를 열었지만 상황을 반전시키지 못한 채 대추리는 점점 고립된 섬이 되어갔다.

섬이 되어버린 대추리로 가는 길을 내기 위해 우리는 부심했다. 그러다 서울 대책회의가 중심이 되어 7월에 ‘285리 평화행진’을 진행했다. 285만 평을 빼앗긴 것을 상징하는 행진이었다. 청와대 앞에서 출발한 행진단은 사당∼과천∼안양∼수원∼오산을 거쳐 평택역에 들어갔다. 운동 진영만이 아니라 전국에서 소식을 듣고 달려온 시민들과 어울려 즐겁고 평화롭게 3박4일간의 행진을 했다. 행진단의 대표를 맡은 나는 마지막 날에는 거의 탈진 상태였다.

평택역에서 주민들과 흥겹게 집회를 마친 뒤 대추리로 행진 대열이 향하는데, K6 캠프 험프리 미군기지 주변의 안정리 상인들이 우리를 공격한다는 소문이 들렸다. 대열의 안전을 고려하면서 원정리로 향하는데, 군문교 다리 바로 옆 주유소에 이르자 상인들이 몰려와서는 다짜고짜 우리를 향해 어둠 속에서 돌을 던지고 각목을 휘둘렀다. ‘빨갱이 새끼들 다 죽여’ 하는 욕설도 튀어나왔다. 경찰은 그런 상인들을 제지하지 않은 채 방관했다. 어둠 속에서 수십 분간 우리는 그들의 폭력에 고스란히 노출됐다. 평화로운 행진은 그렇게 엉망진창이 되었다. 대오를 평택역으로 돌렸다가 평택경찰서로 향했다.

285리 평화행진, 두 번째 구속

기진맥진한 나는 대열의 끝을 따라갔다. 그런데 막상 경찰서 앞에 도착하고는 경악했다. 새벽 2시에 수십 명의 시위대가 경찰서 정문을 넘어 현관 앞에서 연좌하고 있는 게 아닌가. 직감적으로 경찰들에게 대거 연행되는 상황은 막아야겠다고 생각하고 대열을 급히 뺐다. 경찰서 정문 앞에서 항의집회를 한 뒤 대열을 평택역으로 돌리려는데 경찰들이 우리를 에워싸고는 마구잡이 연행을 해댔다. 급히 경찰을 피해 건너편 인도로 뛰었는데, “박래군이다, 잡아!” 하는 고함이 들렸다. 그리고 경찰의 다리에 걸려 인도에 나뒹굴었고, 경찰은 그런 나를 곧바로 덮쳐 버스에 실었다.

버스에 올라탄 시위대가 절차를 무시한 폭력적 연행에 항의하자 경찰은 그들을 밖으로 끌고 나가 보복폭행을 가했다. 천주교인권위원회 김덕진 사무국장은 자신이 태어나서 가장 많이 맞은 때라고 했다. 수십 명이 연행됐는데, 영장실질심사 결과 나만 덩그러니 구속됐다. 유치장에서 같이 심사를 받았던 김덕진과 이용석이 “형만 두고 어떻게 나가냐”고 울었지만 별수 없었다. 2006년에만 두 번째 구속이었다. (다음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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