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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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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힘들다” “다들 힘내”

겨울 100일, 고공에서 보내 심신이 위태로운 노동자들 ‘용산처럼’ 진압당한 쌍용차 노동자들에게 괜찮으냐는 말밖에 하지 못했다
등록 2013-03-09 02:58 수정 2020-05-03 04:27
쌍용차 고공농성 100일을 맞은 지난 2월27일, 경기도 평택 쌍용차 공장 인근에서 열린 집회에서 시민과 노동자들이 ‘쌍용차 국정조사 실시와 해고자 복직’ 등을 요구하고 있다. 농성 중인 이들의 건강이 심하게 나빠지고 있다고 알려져 안타까움을 더했다. 한겨레 홍용덕

쌍용차 고공농성 100일을 맞은 지난 2월27일, 경기도 평택 쌍용차 공장 인근에서 열린 집회에서 시민과 노동자들이 ‘쌍용차 국정조사 실시와 해고자 복직’ 등을 요구하고 있다. 농성 중인 이들의 건강이 심하게 나빠지고 있다고 알려져 안타까움을 더했다. 한겨레 홍용덕

어둠 속 하늘 위 희미한 불빛 아래서 세 사람이 떠 있었다. 그들 중 한 사람이 먼저 말을 했다. 탁한 목소리로 느릿느릿, 한상균 전 금속노조 쌍용자동차 지부장이었다.

“그해 우리는 폭도였고, 여러분은 외부세력이었습니다.” 그런 외부세력들이 아름다운 연대를 실현해가고 있으며, 힘든 시간들을 아름다운 연대로 이겨내는 이들을 닮아서 힘내서 살겠다고 했다. 그러고는 트위터에서 보았다며 “‘내 힘들다’를 거꾸로 하면 ‘다들 힘내’”라고 한다며 같이 외치자고 했다. 그는 “내 힘들다”고 했고, 아래의 우리는 “다들 힘내”라고 했다.

 

“힘들면 내려와요, 힘껏 안아줄게요”

그들의 건강 상태가 안 좋다는 보도가 언론에 나왔다. 100일을 15만kV의 고압 송전탑에서 보낸 그들이다. 건강이 좋으면 도리어 이상한 일이다. 더욱이 지난해 겨울은 어느 해보다 혹독한 강추위와 바람과 눈이 몰아쳤다. 그 겨울을 하늘 위에서 지낸 노동자들, 어린 아들에게 100일만 다녀온다고 하고 나왔다는 복기성 비정규직 수석부지회장, 송전탑 위에서 설날도 보냈다. 땅바닥에서 아이들이 하늘 위의 아버지들에게 세배를 했다. 기막힌 새해맞이다. 사회를 보던 고동민씨는 “힘들면 내려와요. 힘껏 안아줄게요”라고 외쳤다. 목소리마저 젖어서 겨우겨우 토해내는 목소리로.

지난 2월27일로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 최병승·천의봉씨가 송전탑에 오른 지 124일, 유성기업의 홍종인 지회장이 굴다리에서 밧줄을 목에 건 농성을 한 지 117일, 경기도 평택 쌍용차 건너편의 송전탑에 한상균·문기주·복기성씨가 오른 지 100일이 되었다. 서울 혜화동 성당 종탑에서는 재능교육 해고자 여민희·오수영씨가 22일째를 맞았다.

망루 또는 15만kV의 고압 전류가 흐르는 송전탑에 새집을 짓고 오른 그들이 요구하는 것은 세 가지다. 쌍용차 대량 해고 사태에 대한 국정조사를 실시하라는 거다. 약속을 이행하라는 얘기다. 그리고 당연한 얘기지만 4년째 요구하고 있는 해고자의 원직 복직,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붉은 바탕에 흰 글씨로 내걸었다.

나는 평택 송전탑 농성 101일째가 되는 지난 2월28일 평택에 갔다. 100일을 넘긴 그들에게 힘이 돼주는 길은 지금으로서는 그들과 함께하는 일이다. 대선 뒤 평택 쌍용차를 방문한 이한구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쓸데없이 그런 데 왜 올라갔느냐는 식으로 비아냥거리기까지 했다. 그 뒤 쌍용차 회사는 무급휴직자 455명에 대한 복직을 발표했고, 800억원의 유상증자를 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무급휴직자 1명은 세상을 떴으므로 1명이 줄어 455명의 복직, 그러고는 끝이었다.

고인이 된 수전 손태그가 말한 ‘타인의 고통’이 이런 것일까? 그들이 처음 송전탑에 올랐을 때 그나마 관심을 갖던 언론도 사람들도 이제는 무덤덤해지고 있다. 새도 아닌 사람이, 한겨울을 고공에서 추위와 병마와 싸우며 버티고 있는데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세상을 우리는 보고 있다. 그리고 무기력한 우리도 보고 있다.

 

‘타인의 고통’을 잊지 못하는 이들

나는 지난해 3월30일 스물두 번째로 이아무개씨가 자신이 사는 경기도 김포의 임대아파트에서 뛰어내려 생을 마감했을 때 평택 쌍용차 정문 앞의 해고자들을 찾았다. 넋이 빠진 이들, 풀려버린 눈동자, 그저 하염없이 영정만 바라보던 축 처진 노동자들을 보며 이거 큰일 났다고 생각했다. 무어라도 해야 한다, 언제고 다시 그런 죽음이 이어질지 모른다는 절박감이 있었다. 고립된 채 절망 속에서 하나하나 평소 알고 연락하던 사람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지워갔을 그들을 생각했다. 그러다 몇몇 이들과 함께 만든 게 ‘함께 살자! 희망지킴이’였다. 처음에는 당신들이 잘못해서 해고된 게 아니라고 말해줄 사람들, 당신들은 정당했다고 말해줄 사람들 100명이 필요했다.

스물두 번째 죽음 이후 쌍용차 해고자들은 서울 대한문 앞에서 천막을 치고 농성을 했다. 한 달 반 동안 천막을 못 치게 막는 경찰에 연행되기를 거듭하다가 천막을 겨우 지켜냈다. 처음에는 담벼락에 사진도 없는 영정 현수막을 내걸고 시작한 농성이었다.

그 농성을 지원하고, 그들이 용기 얻어서 싸움을 이어가기 바라는 마음에서 사회적 응원부대로 희망지킴이를 만들었다. 그래서 바자회도 열고 몇 번의 콘서트도 열었다. 공지영 작가는 이런 취지에 공감해서 란 책을 써서 알렸다. 공지영 작가의 인세에 출판사가 수익금을 더하고, 천주교 주교회의가 돈을 내고, 시민들이 십시일반으로 보태서 해고자들의 생계도 지원하고 투쟁기금도 보탰다. 쌍용차 노동자들의 투쟁이 다른 사업장 노동자들의 투쟁과 별도가 아닌지라 그때마다 전국의 20여 개 장기 투쟁 사업장에 지원금을 보냈다.

2009년 3천 명의 정리해고에 맞서 쌍용차 노동자들이 공장을 점거한 채 77일간 농성을 벌일 때 나는 그곳에 가지 못했다. 용산참사범국민대책위원회 집행위원장으로 수배 중이던 터라 경찰이 철통 감시를 하는 순천향병원 장례식장 4층에서 그들의 파업 소식을 접했다.

단전과 단수가 이어졌고, 의약품마저 반입이 금지된 그곳에 경찰은 헬기로 낮게 날며 최루액을 뿌려댔다. 그 최루액을 맞은 스티로폼은 한순간에 녹아버렸다. 피부는 금세 물집이 잡히고 벗겨졌다. 최루액이 바람에 날리면 온몸에 최루액을 뒤집어써야 했다. 비도 오지 않는 그 공장에서, 전기도 없는 그 공장에서, 물도 없는 그 공장에서, 음식물 반입도 막힌 그 공장에서 서럽게 울며 공장을 지켜야 했던 노동자들을 경찰은 용산처럼 공격했다. 노동자들의 가족과 인권활동가를 비롯해 많은 이들이 현장 정문에서 눈물로 간청하고 때로는 격렬하게 몸싸움을 했지만, 저들의 인의 장벽은 요지부동이었다. 심지어 변호사마저 경찰에 연행됐다.

 

1980년 광주가 거기에 있었다
2009년 8월, 쌍용차 평택 공장에 투입된 경찰특공대가 공장 옥상에서 체포한 노조원을 곤봉으로 내리치고 있다. 무력 진압으로 본격화된 쌍용차 노동자들의 ‘트라우마’는 긴 해고 기간을 거치며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국가인권위원회 제공

2009년 8월, 쌍용차 평택 공장에 투입된 경찰특공대가 공장 옥상에서 체포한 노조원을 곤봉으로 내리치고 있다. 무력 진압으로 본격화된 쌍용차 노동자들의 ‘트라우마’는 긴 해고 기간을 거치며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국가인권위원회 제공

그때 금속노조가 연대 파업을 할 것이라는 소식이 들렸지만 믿을 수 없는 게 노동운동이다. 자동차 3사가 연대 파업을 하면 쌍용차 노동자들의 투쟁은 전환점을 맞게 될 터였다. 그렇지만 역시였다. 민주노총도 말로만 파업이었다. 노동자 대오는 평택역에서 집회를 하고는 공장을 향해 진격했지만 무기력했다.

경찰의 진압이 임박했다는 소식을 듣고 용산 참사 현장을 지키던 신부님, 목사님, 용산 유가족들, 그리고 활동가들이 지원투쟁을 하러 내려갔다. 우리는 인터넷으로 속속 올라오는 상황을 지켜보았다. 용산처럼 컨테이너로 경찰특공대를 투입해 옥상을 장악하고 노동자들을 잡아서 흠씬 두들겨패는 모습, 방패로 찍고, 군홧발로 걷어차고, 곤봉으로 내리치고, 그 공장 옥상에서 1980년 광주가 재현되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파업이 종결되고 한상균 지부장이 노동자들을 한명 한명 끌어안으며 마지막 인사를 하는 모습을 보며 얼마나 속으로 울었는지 모른다. 그렇게 노동자들은 백기 투항을 했다. 용산처럼 사람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그들을 짓눌렀다고 했다. 용산처럼, 용산처럼. 용산 투쟁을 잘못한 탓이다. 용산에서 경찰특공대를 투입하고 컨테이너를 올려 진압했던 그때, 국가폭력의 잘못을 제대로 짚고 대중의 분노를 제대로 모아냈으면 조현오 당시 경기경찰청장이 용산과 똑같은 방식의 진압을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죽어갔다. 유서 한 장 없이 조용히 세상을 떠난 사람이 있었다. 돌연사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때마다 쌍용차 해고자들은 울었다. 아니 자신들 곁에 다가와 있는 죽음의 그림자를 보고 온몸을 떨었다. 파업을 하고 쫓겨난 노동자가 많지만 왜 쌍용차 노동자들만 그리도 많이 죽어갈까? 정부와 회사는 마지막 남은 인간적 자존감마저 깡그리 짓밟아버렸다. ‘형님, 아우’ 하며 10년, 20년을 공장에서 한솥밥을 먹었고, 집단 거주하는 아파트에서는 이웃사촌으로 살며 술친구 하고 살았던 이들이 자신을 공격해왔다. 인간적 배신감에 쇠파이프를 쥐고도 울었다는 그들이다. 아이들도 고스란히 트라우마를 앓았다.

그런 그들에게 나는 괜찮으냐는 말밖에 하지 못했다. 지난해 4월에도 그랬고, 김정부 지부장이 40일간 곡기를 끊었을 때도 그 말밖에 하지 못했다. 지금도 그 말밖에 하지 못한다. 삼겹살에 소주 한잔 하며 우스갯소리는 잘해도 진정 속에 있는 말을 하지 못하는 건 그들도 마찬가지다.

 

노동을 배제한 민주주의는 없다

나는 그들이 싸움을 포기하지 않는 한 그들 곁에 있을 것이다. 그들이 당하는 인권침해를 외면할 수 없다. 우리 사회가 진정 건강해지려면 노동자들의 권리가 회복돼야 한다. 노동자들에게는 일할 권리가 있으며, 좀더 좋은 조건에서 일할 수 있어야 하고, 노동조합도 자유로이 결성할 수 있고, 파업을 했다고 해서 형사처벌되거나 손배·가압류와 같은 피해를 입지 말아야 한다. 노동자들의 권리가 온전히 보장되는 사회라야 민주주의다. 노동을 배제한 민주주의는 한순간에 무너져내리는 사상누각의 민주주의다.

쌍용차 해고자를 비롯한 투쟁하는 노동자들에게 우리 사회는 너무도 큰 빚을 지고 있다. 그들은 온몸으로 정리해고와 비정규직의 확산을 막아내는 방파제다. 그들이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도록, 그들이 공장에 돌아가 다시 노동을 할 수 있도록 만드는 일은 우리 사회를 더 인간다운 세상으로 만드는 일이다. 이제는 경쟁해서 나만 사는 세상이 아니라 함께 사는 세상을 같이 꿈꿔볼 때다.

박래군 인권재단 사람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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