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마을이 전국의 관 심사가 되는 일이 종종 있다. 요즘은 제주 강 정마을이 그렇다. 2006년에는 당연히 대추 리가 전국적 관심을 집중적으로 받는 마을 이 되었다. 대추리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 도였다면 너무 과장일까?
일본군이 내쫓고 미군이 밀어내고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의 한 농촌 마을. 서 해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안성천의 하류에 해당하는 그곳에 너른 들판이 펼쳐져 있었 다. 저녁이면 어찌나 노을이 아름다웠던지 동요 이 탄생한 곳이기도 하다. 가을 이면 황금들판이란 말이 이런 거구나 하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누렇게 익은 벼가 바람 에 따라 출렁이는 바다와도 같은 곳이었다. 그곳에 마을이 있었다. 가을이면 수확이 많 아서라고 했다.
대추리는 들에서 고도가 약간 높은 언덕 같은 지대에 자리잡은 마을이었다. 미군기 지를 둘러싼 철책을 따라 들어가야 대추리 가 나왔다. 일제는 마을을 밀어내고 비행장 을 세웠다. 1차로 쫓겨난 마을 주민들은 주 변에 다시 마을을 세웠다. 한국전쟁 때는 미군이 불도저로 밀고 들어와 집을 부수고 미군기지를 만들어버렸다. 한겨울에 다시 밀려난 주민들은 차디찬 겨울 바닷바람 속 에서 갯벌을 맨손으로 일구었다. 그래서 만 들어진 게 황새울 들판이었고, 도두리 들판 이었고, 그렇게 해서 수백만 평의 너른 들이 생겨났다. 갯벌을 맨손으로 간척한다는 것 이 그리 쉬운 일인가? 그런데 놀랍게도 그 들은 바다를 맨손으로 메워서 황금들판을 만들었다.
그래서 이 마을 주민들은 마을과 들에 대 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대추리로 들어오는 도로도 십시일반 주민들이 돈을 모아 닦았 다. 대추분교도 정부의 지원 한 푼 없이 마 을 주민들이 돈도 내고, 쌀도 내고, 노동력 도 내서 같이 울력으로 만들어냈다. 그런 대 추분교이기 때문에 학생 수가 줄어서 폐교 된 다음에도 마을 주민들은 잘 가꿔 마을의 대소사를 위한 장소로 활용해왔다. 마을 공 동체의 중심에는 늘 대추분교가 있었다.
미군기지에서 뜨고 내리는 비행기의 소음, 논에까지 흘러내린 기름 유출 사건 등으로 갈등을 빚기도 했지만, 주민들은 미군기지 안의 옛날 마을을 두고 미군기지 담을 두른 철책 밖에 마을을 이뤄 그런대로 수십 년을 잘 견디며 살아왔다. 이런 공존이 2000년대 들어 깨지는 상황을 맞았다.
대추리의 운명은 미국 워싱턴이 결정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워싱턴의 결정을 실행하는 집행부였을 뿐이다. 노태우 정부 때부터 진 행돼온 서울 용산 미군기지 이전 사업이 평 택의 285만 평을 수용해 미군기지를 확장하 는 것으로 결론이 난 것은 2002년, 2003년 부터는 그 사업을 위한 절차를 준비해가는 과정이었다. 주한미군이 신속기동군으로 재 편돼 전세계 어디고 출동하는 군대로 전환 돼서 평택에 오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대한 민국 정부는 미국의 요구를 고스란히 수용 하고 기지 건설 비용도 모두 부담했다.
주민들은 팽성읍대책위원회 등을 구성해 맞섰다. 주민들에게 어떤 이유로 이곳에 미 군기지가 들어서는지 설명은 없었다. 대화 요청은 번번이 거절됐다. 그러고도 공청회를 하자 주민들이 공청회가 열리는 평택대학교 안의 공청회장을 점거하고 농성을 벌여 무 산시켰다.
노무현 정부도 다르지 않았다국책사업, 그것도 미군기지를 확장 이전 하는 국방정책과 관련한 국책사업이었다. 국 책사업에서 보이는 정부의 태도는 늘 오만했 다. 결정된 방침을 일방적으로 통보하고, 주 민들을 찬성파와 반대파로 갈라 이간질하 고, 철저하게 반대파와는 어떤 대화도 않고
고사시키거나 힘으로 진압하는 것이 그들의 방식이었다. 국책사업이 진행된 뒤 남은 인간적인 상처에 대해서는 정부는 언제나 무책임했다.
노무현 정부 때도 국책사업을 집행하는 정부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전북 부안의 핵폐기장 주민 투쟁으로 골머리를 앓았지만 일방적인 사업 추진 모습은 그대로였다. 마을에는 노인회도 있고, 마을회도 있고, 부녀회도 있다. 이들 공식적인 마을 자치조직은 제거해야 할 대상이지 대화 상대가 아니었다. 늘 그들은 기밀사항이라는 이유로 주민들에게는 어떤 설명도 없이 나가라고만 했다.
일방적으로 추진되는 미군기지 확장 사업에 맞서 대추리와 도두리 주민들은 단 한 평도 내줄 수 없다, 학교를 짓거나 공장을 짓는다면 땅을 내줄 수 있지만 전쟁기지로는 내줄 수 없다는 결론을 당연히 내렸다.
정부는 먼저 그 땅에서 어렵게 마을을 이루고 땅을 만들어 농사를 지어온 사람들을 존중해야 했다. 평화를 누리며 살 권리는 누구에게나 있는 것. 인권활동가들은 대추리 투쟁에서 ‘평화적 생존권’의 깃발을 들었다. 사람을 죽이는 전쟁에 반대하고, 자신이 살아온 곳에서 평화롭게 살아갈 권리라는 평화적 생존권은 헌법이나 국제인권법이 인정하는 당연한 권리라는 점을 부각시켰다. 따라서 평택 미군기지 확장저지 투쟁은 반미투쟁 성격만이 아니라 평화적 생존권을 지키기 위한 인권투쟁으로 재해석됐다.
그렇지만 나는 2005년까지는 손님이었을 뿐이다. 다른 활동가들은 평화적 생존권을 들고 마을을 찾아가 인권교육도 하고는 했지만, 나는 집회와 행사에 참석하고 나오는 정도였다. 그때 이미 문정현 신부님과 평화바람 식구들은 주민등록까지 옮겨서 대추리 주민이 돼 있었다. 주민들에게 신부님의 존재는 마지막 ‘믿는 구석’이었다. 신부님은 이렇게 늘 온몸 던져 함께하는 분이다.
투쟁과 농사를 병행하던 주민들국방부는 미국과의 약속 이행을 위해 토지수용을 서둘렀다. 거기에 맞서 주민들은 매일 촛불행사를 열고 ‘올해도 농사짓자!’며 맞섰다. 주민들의 투쟁에는 ‘전문 시위꾼들’만 함께한 것이 아니었다. 문화예술인들은 마을 전체를 평화마을로 만들겠다며 담벼락에 시를 써넣고, 마을의 중심적인 건물이나 집의 담에 근사한 대형 그림도 그렸다. 마을
전체가 예술마을이었다. 음악인들은 자발적으로 촛불행사 때 달려와서 낡은 앰프의 저질 음향을 탓하지 않고 노래를 불렀다.
2006년 3월, 나는 더 이상 방관자로 있을 수 없었다. 3월6일, 국방부는 용역을 앞세우고 경찰을 동원해 대추분교를 접수하려고 했다. 이에 맞서 전국의 한다 하는 진보적 단체들이 결집한 ‘평택 미군기지 확장저지 범국민대책위원회’ 소속 회원들이 대추분교에서 밤을 새웠다.
인권활동가들은 대추분교 정문을 맡아서 평화적인 불복종운동을 전개하기로 했다. 정문이 뚫리면 대추분교가 쉽게 접수될 수 있기 때문에 쇠사슬까지 묶고 정문에 연좌했다. 법원의 집행관으로 보이는 이가 서류로 얼굴을 가린 채 새까만 복장의 용역 수십 명을 대동하고 대추분교 앞에 나타났다. 용역들은 우리를 너무 쉽게 뜯어냈다. 주민들이 항의하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우리를 끌어내서는 경찰에 인계하고는 했다. 하지만 그들은 박진 다산인권센터 활동가가 정문 철망 안에 손을 교묘하게 집어넣어서 저항하고 문정현 신부님이 합세해서 막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박진 활동가는 절단기에 손이 다쳐 저려오는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았다.
오후에는 주민들이 주역이었다. 경찰들은 논을 휘돌아서 농협창고 쪽으로 쳐들어왔다. 그러자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길바닥에 주저앉아서는 우리를 밟고 가라고 버텼다. 오전에는 인권활동가들의 저항에, 오후에는 주민들의 적극적인 저항에 뜻을 이루지 못한 용역과 경찰은 저녁 무렵 철수했다. 1차 전투는 우리의 승리였다.
대추리는 한편으로는 행정대집행을 막아내는 투쟁을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농사철을 앞두고 농사 준비에 바빴다. 국방부에 집과 땅을 넘기고 나간 이들의 땅까지 경작하려니 마을 주민들은 일이 참으로 많았다. 그러니까 최소 100만 평의 땅에 볍씨를 뿌리고 농사를 지어야 했다. 논갈이를 하고 거기에 모를 심어서 이식하는 게 아니라 볍씨를 직파하는 방법으로 100만 평 농사를 지을 요량이었다. 이렇게 굽힐 줄 모르고 농사를 짓겠다고 차근차근 준비하는 주민들을 제압하기 위해 국방부는 서둘렀다.
목이 졸려 연행된 가수 정태춘3월15일, 이번에는 동창리와 도두리 방향에서 용역과 포클레인이 경찰의 보호를 받으며 들어왔다. 그러고는 농로를 차단하고, 그 양옆으로 길게 깊은 도랑을 팠다. 논농사를 못 짓게 하겠다는 심보였다. 주민들이 흙을 뿌리며 저항하다가 다치기도 했지만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왔다.
그러자 이번에는 포클레인을 점거하고 올라탔다. 활동가들은 포클레인 바퀴 밑에까지 들어가서 작업을 못하게 했다. 그러자 기사가 도망치고, 작업은 중단됐다. 동창리 쪽에서는 가수 정태춘씨가 농로 차단 작업을 저지하다가 현수막에 목이 졸려서 연행됐다.
오후에는 그런대로 농로 차단 작업을 막아냈다. 그런데 점심시간이 지나자 경찰은 포클레인을 점거한 우리를 연행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연행되는 시간을 지연시키기 위해 손과 손을 알루미늄 파이프 안에서 잡고 손을 놓치지 않으려고 버텼다. 파이프를 파괴하지 않는 한 손을 풀 수 없도록 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사복을 입은 검거조가 들이닥치자 얼마 버티지 못했다. 그들은 안전은 고려하지 않은 채 파이프를 잘라냈다. 그때 수십 명이 연행됐다. 그리고 나와 천주교인권위원회 조백기 활동가는 구속됐다. 구속되기는 오랜만이었다. (다음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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