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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은 올렸는데 공사 잔금 어쩌나

“인권센터 만들자” 겁없이 뛰어든 ‘무한도전 30개월’ 2914명 십시일반… 막판 3개월에 모금액 3억원 기적이
등록 2013-05-11 17:17 수정 2020-05-03 04:27

어떤 날이 누구에게는 평범한 하루가, 누군가에게는 큰 의미가 있는 날이 되기도 한 다. 지난 4월29일이 그랬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그냥 평범한 하루였겠지만 내게는 특별한 날이었다. 지난 2년6개월 동안 상당한 시간을 이 하루를 위해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직 부족한 게 많고, 앞으로도 채워야 할 게 더 많은 ‘인권중심 사람’을 개관하는 행사를 한 날이었다. ‘인권중심’ 이라고 하니 생소하게 들리지만 ‘센터’가 영어식 표현이라면 ‘중심’은 중국어식 표현이다. 이날 우리는 2년6개월 대장정의 결실로 인권센터를 개관했다.

지난 4월29일 개관한 인권센터 ‘인권중심 사람’. 서울 서교동의 2층짜리 주택을 개조해 3층 건물로 리모델링했다. 장애인을 위해 고액을 들여 특수형 엘리베이터까지 설치했다. 한겨레 손준현 기자

지난 4월29일 개관한 인권센터 ‘인권중심 사람’. 서울 서교동의 2층짜리 주택을 개조해 3층 건물로 리모델링했다. 장애인을 위해 고액을 들여 특수형 엘리베이터까지 설치했다. 한겨레 손준현 기자

무모한 도전이 시작되다

서울 용산 참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범 국민대책위원회 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하다가 수배 중이던 2009년 11월의 어느 날, ‘인 권재단 사람’의 사무처 활동가들이 자신들끼리 의논한 뒤 인권센터가 꼭 필요하니 만 들자고 했다. 그때는 인권센터 정도가 아니라 ‘인권동네’에 대한 구상을 갖고 왔다. 그들 이 시민과 인권활동가가 모이고 이용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는 식의 얘기를 하는 데 참으로 가당찮았다. 인권재단 사람은 소소하게 인권단체를 지원하는 일만 해온 터라 서 재정도 넉넉지 않았고, 대대적인 모금을 해본 경험도 없었기 때문이다.

2010년 1월, 용산 참사로 돌아가신 철거민 다섯 분의 장례를 마친 다음 나는 다른 수배 자들과 함께 경찰에 자진 출두해 구속되었다. 서울구치소에서 4개월 가까이 수감 생활을 하면서 인권센터를 고민했다. 사람들 이 모이는 공간이 있다면? 거기서 인권교육 과 문화행사도 하고 시민들도 만나다보면 인 권운동의 힘이 세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 각에 다다랐다. 거기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이 명박 정권 들어 맛이 갈 대로 간 상황이 아 닌가.

출소 이후 몇 달 동안 재단의 사무처 활동 가들과 의논을 거듭하며 고민했다. 그러다 우리의 목표를 세우고, 이사장님을 비롯한 이사들을 설득했다. 10억원, 100평의 공간 을 1년 동안의 모금으로 확보한다는 나름대 로 구체적인 목표를 제시했다. 이를 위해 나 부터 100만원을 냈다. 이사님들은 반신반의 하면서도 함께하기로 했다.

명사들을 착취하다

결정은 했는데 그럼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이런 공간을 앞서 만든 여성미래센터 를 찾아가 한국여성단체연합의 김금옥 대표 에게 집을 마련한 과정을 들었고, 아름다운 재단의 윤정숙 상임이사를 만나 코치도 받 았다. 윤 이사는 이후에도 우리를 꾸준히 격 려해주었다. 무모한 도전은 이렇게 탄생했다.

인권센터를 만들자고 했지만 인지도도 없 는 우리 재단에서 이런 일을 한다고 선뜻 돈 을 기부해줄 사람은 없을 듯싶었다. 문정현 신부님께 말씀을 드려서 허락을 받았다. 드 디어 2010년 11월 초 이화여고 100주년기념 관에서 공연을 3일 동안 열었 다. 신부님의 명망을 이용해 인권센터 건립 운동의 막을 올린 셈이다. 신부님은 이 공연 을 위해 머리에 화관을 쓰고 활짝 웃는 포스 터 사진도 찍어주셨다.

이때 나도 사진을 찍었다. 돼지저금통을 끌어안고 찍은 사진을 인권센터 모금을 위 한 홍보물에 다 써먹었다. 인권침해의 현장 에서 경찰을 상대로 핏대를 높이던 것과는 상반되는 그런 모습을 사람들은 재밌어했 다. 이 모금에 참여하는 소중한 이름들을 영 원히 기억하기 위해 돌에 이름을 새기겠다고 약속도 했다.

해가 바뀌어 2011년 인권센터 모금운동의 출발은 기사가 끊어주었다. 돈 없 는 가난한 인권단체들의 곁방살이를 끝내자는 호소까지 담겨서였는지 이 기사를 보고 시민들이 대거 참여했다. 3월부터는 주춧돌 강연회를 시작했다. 조국 서울대 교수를 시작으로 10월까지 우리 사회의 내로라하는 유명인사들이 강연자로 서주었다. 방송인 김미화, 영화배우 김여진씨와 인권활동가들은 홍보영상 촬영에 적극 협조해주었다. 유명인사들까지 가세해서 홍보를 해준 덕에 주춧돌 가입이 더디지만 꾸준히 늘어났다.

십시일반으로 인권센터 기금을 모으자는 데 호응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쉽게 불어나지 않는 답답한 상황에서 우리는 9월 초부터 ‘기적의 저금통’을 배포했다. 1만 개의 저금통을 준비해 거리에서 시민들에게 나눠주기도 했고, 단체들에 배포를 부탁하기도 했다. 이런 일로 홍보는 잘되었는데, 저금통은 500개도 채 들어오지 않았다. 저금통은 배포보다는 회수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또 9월에는 ‘대지의 꿈’이라는 이름의 리얼리즘 기획전을 서울 인사동의 갤러리에서 진행했다. 민중미술의 흐름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보기 드문 기획전이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실력이 없어서 작품을 몇 개 팔지 못했다. 다만 이철수 화백의 판화는 그런대로 팔았다. 외형적으로 총수입은 많았으나 실제 수입은 별것 없는 전형적인 외화내빈의 사업이었다.

10월에는 보름 동안 전국 투어도 했다. 제주 4·3평화공원과 강정마을에서 시작해서 소록도를 찾아 한센인들의 비참한 역사도 알았고,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지인 경남 산청·함양 등지를 찾아 수백 명의 주인 없는 유골 발굴 현장에 피어난 쑥부쟁이꽃도 보았다. 4대강 사업으로 망가진 생태계의 심각성도 확인했다. 그리고 매일의 여정을 일기로 써서 페이스북에 올렸다. 100마디의 말보다, 사진 몇 장보다 현장에서 오감으로 느끼는 인권현장 기행의 구상을 했고, 다음해 두 번에 걸쳐 소록도와 경남 거창·산청 지역을 둘러보는 인권기행으로 실현되었다. 이 프로그램은 앞으로도 꾸준히 할 작정이다.

2012년에는 ‘남산 안기부 터를 인권·평화의 숲으로’라는 캠페인을 진행했다. 시민들에게 남산의 의미를 알리고자 꽃씨도 나눠주고 서울시에 청원하는 서명도 받았다. 남산 안기부가 어떤 곳인가. 가장 극심한 인권침해의 현장이었던 그곳을 인권을 배우고 기억하는 곳으로 충분히 만들 수 있다. 그것은 관광자원이 될 수도 있다. 이런 말로 사람들을 설득했다. 그 결과 시민청원도 할 수 있었다.

지난해 4월26일 인권·평화의 숲 조성을 위한 시민청원 기자회견을 마친 박래군 소장(가운데)이 참가자들과 함께 서울 남산 옛 안기부 터 일대를 둘러보고 있다. 한겨레 김태형 기자

지난해 4월26일 인권·평화의 숲 조성을 위한 시민청원 기자회견을 마친 박래군 소장(가운데)이 참가자들과 함께 서울 남산 옛 안기부 터 일대를 둘러보고 있다. 한겨레 김태형 기자

극적인 반전 “차라리 짓자”

처음에는 딱 1년만 하자고 생각했다. 1년이면 목표한 10억원까지는 아니더라도 공간을 마련할 만한 정도는 되지 않을까 했다. 하지만 부동산 경기는 침체되고 집값은 떨어진다는데도 전·월세 가격은 치솟고 있었다. 100평의 공간을 임대하면 1년이면 최소 6천만~7천만원은 그대로 나가는 상황인데도 그런 공간을 빌리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인권센터에는 장애인 편의시설이 필수적으로 마련돼야 하는데 집주인이 2년 뒤에 나가라고 하거나 임대료를 올려달라고 하면 난감한 상황이 오게 된다. 그러느니 아예 집을 사면? 그런데 돈이 턱없이 모자랐다.

2012년 9월, 우리는 다시 결심을 했다. 집을 사자. 모자라는 돈은 분가하는 섬돌향린교회를 유치해서 보태고, 그래도 3억원이 모자라는 건 시민들에게 호소해보자는 게 우리 생각의 전부였다. 대출해주면 3년 뒤 꼭 갚겠다는 약정서도 작성하기로 했다. 될까 싶었는데, 10월 중순부터 1개월20일 만에 3억원 모금을 초과했다. 기적 같은 일이었다. 지금도 생각하면 이게 어떻게 가능했을까 의아하기만 하다. 정말 3억원이 그 짧은 기간에 모였다. 누구는 적금을 해지했고, 누구는 결혼식 축의금을 몽땅 기부했다. 인권센터를 꼭 만들어달라며, 우리 사회에 이런 인권센터 하나 없는 게 창피하다며 돈을 보내주시는 분들은, 그런데 대체로 넉넉한 형편이 아니었다. 우리 사회의 인권 상황이 후퇴하는 걸 목격하고 우려하는, 가난하고 힘없고 빽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런 사람들의 힘이 모이면 이런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걸 예전부터 보아왔는데 이번에도 그랬다.

지난 3월까지 이렇게 십시일반으로 주춧돌 모금에 참여해준 분들이 모두 2914명. 5천원을 내준 사람들부터 이름을 밝히지 말아달라며 거액을 기부하신 분들까지, 그리고 돌아가신 분들의 이름으로 기부해주신 분들까지 정말 소중한 마음들이 모였다.

서울 마포구 성산동에 단독주택을 매입하고, 12월 말부터 공사에 착수했다. 그런데 지난겨울은 얼마나 춥고 눈도 많이 내렸던가. 공사는 계속 지연되었다. 가장 큰 문제는 엘리베이터였다. 옛날 집의 구조상 1층과 2층 방 안에서 내부 계단을 타고 중간쯤에 작은방이 하나씩 있어서 이 구조를 그대로 살려서 증축하기로 했는데 그런 공간까지 휠체어를 타고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 설계를 마쳤다. 그런데 그런 맞춤형 엘리베이터를 제작하는 것부터 쉽지 않았다. 비용도 문제였다. 표준형의 3배나 되는 많은 비용이 들어갔다. 그래도 감수하기로 했다. 명색이 인권센터인데 장애인이 접근할 수 없는 공간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나름의 확고한 철학이 있었다. 그리고 성소수자까지 배려한 1인 화장실을 두기로 했다. 공간 구석구석에서 인권 감수성을 느끼도록 만들고 싶었다.

개관식 뒤에도 공사 중인 인권센터

4월29일 페인트칠도 덜 된 상황에서, 자유의 뜰이 공사 중인 상황에서 겨우 엘리베이터가 오르내리고 2층 다목적홀에 음향·영상 시스템이 갖추어진 상황에서 개관식을 했다. 100명이 들어가는 행사장에 250명이 다녀갔다. 많은 분들이 자신의 일처럼 기뻐해주셨다. 정말 기뻤던 일은 휠체어를 탄 장애인들이 모든 방에 휠체어를 탄 채로 들어가는 모습이었다. 드디어 우리가 해낸 것이다.

인권중심 사람은 아직 공사 중이다. 남은 공사비를 마련할 일도 막막하고, 세금도 준비해야 한다. 그걸 생각하면 벌써 아뜩하다. 어디서 더 돈을 달라고 한단 말인가. 하지만 4월29일, 그날만은 웃을 수 있었다. 시민과 함께하는 새로운 인권운동의 희망을 봤으니까.

인권중심 사람 소장*‘인권중심 사람’ 공간 사용과 모금 관련한 문의는 인권재단 사람(02-363-5855)으로 하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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