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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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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시민을 잘못 알고 있었다

1월20일 4주기에 돌아보는 용산 참사 ① 355일 만에 이루어진 장례식, 자진 출두와 수감 생활 그리고 지금도 나를 사로잡는 의문들
등록 2013-01-19 20:36 수정 2020-05-03 04:27

가수 루시드 폴이 노래한 것처럼 그들은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그 평범한 사람들은 재개발에 쫓겨 망루를 짓고 올라가야 했다.
“모두들 얘기하는 것처럼/ 정말 행복한 세상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나는 갈 곳이 없었네/ 그래서 오르고 또 올랐네/ 어둠을 죽이던 불빛/ 자꾸만 나를 오르게 했네.”(루시드 폴의 노래 중에서)
마이크를 쥔 순간의 예감대로
서울 한복판에서 망루 농성을 하던 철거민 5명이 죽어 내려왔고, 경찰관도 1명이 죽었다. 사실 초기에는 이 사건으로 정권이 치명타를 입을 것으로 생각했다. 자진 퇴진은 아니더라도 사태에 책임을 지고 대국민 사과와 철저한 진상 규명, 책임자 처벌을 약속할 줄 알았다. 나는 그때까지 이명박 대통령과 그의 정권을 제대로 알지 못했던 탓이다. 예상과 달리 이명박 대통령과 그의 정권은 철저하게 자신들의 책임을 부인했고, 사건을 은폐하는 데만 열을 올렸다. 공권력에 의해 사람이 죽었는데, 그에 대한 사과 한마디 없는 대통령을 그전까지는 알지 못했다.
또 화재의 참상이 그대로 인터넷으로 생중계됐으니 세상 사람들이 뛰쳐나와 항의할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시민들은 광장에 나와 서울 용산에서 죽은 이들을 애도하지 않았고, 외면했다. 이런 점에서 나는 이명박 대통령도 시민들도 잘못 알고 있었다.
대통령과 정부가, 그리고 시민들이 철저하게 외면하는 중에 용산 참사 투쟁을 진행해야 했다. 왜 그랬을까? 왜 시민들은 공권력이 시민을 죽였는데 침묵했을까? 이런 물음은 4년이 지난 오늘에도 여전히 가슴속에 남아 있다. 용산 참사에 침묵했던 시민들은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정리해고 반대 파업을 강제 진압해도 침묵했다. 제주 강정마을의 해군기지 사업을 모든 절차마저 무시한 채 강행해도 침묵했다. 모든 곳에서 그렇게 철저하게 시민들은 목소리를 아꼈다.
용산 유가족들은 종종 2009년 1월20일로 시간이 멈추었다고 말한다. 내게도 그런지 모르겠다. 지금도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만 기억되는 용산의 그 일- 아침에 울리던 휴대전화 벨소리, 사람이 죽었다는 그 다급한 소리를 듣고 인터넷 화면을 켰을 때 화면 전체를 장식한 것은 망루 위로 솟구쳐오르던 화마였다. 화마의 붉은 혓바닥, 그곳을 탈출한 사람들이 옥상 난간에 매달려 있고, 누군가 내지르던 “저기, 저기, 사람이 있단 말이야!” 통곡하는 소리, 그곳에 뿜어지던 물포의 물줄기들, 망루 높이만큼 올라간 컨테이너, 새까맣게 몰려 있던 경찰들, 기어코 쓰러지던 망루….
그 다음날로 나는 ‘용산 참사’라고 언론이 이름 붙여준 그 일을 해결하기 위한 범국민대책위원회 집행위원장이 되었다. 범국민대책위원회 결성을 위한 회의를 맡아 마이크를 쥔 순간, 나는 이 일로 구속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날부터 집에 거의 들어가지 못한 채 용산 참사의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주장했다. 경찰의 원천 봉쇄를 뚫고 청계광장에서 열린 추모대회, 경찰청과 검찰청, 청와대, 여당 당사의 항의 방문 등을 진행했다. 수많은 언론과의 인터뷰도 내 몫이었다.
하트를 그리던 남편이 바느질된 주검으로

2010년 1월9일 355일 만에 장례식이 치러졌다. 참사 당일처럼 무척 추웠고 눈발이 날렸다. 김봉규 기자

2010년 1월9일 355일 만에 장례식이 치러졌다. 참사 당일처럼 무척 추웠고 눈발이 날렸다. 김봉규 기자

처음에 했던 가장 중요한 일은 검찰이 대규모 수사본부를 만들어 강제 부검을 한 것에 대한 항의였다. 유가족들은 1월20일 그날이 저물도록 남편들의 생사조차 확인하지 못했다. 저녁 무렵 기자들로부터 순천향병원에 주검이 다 있다는 소식을 듣고 촛불문화제를 마친 유가족들과 그곳으로 달려갔다. 경찰이 영안실을 막고 있었고, 그때부터 항의를 거듭해서야 자정이 넘어 영안실에 유가족들이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고는 유가족들은 기절해서 넘어갔다. 잠시 다녀오겠다고, 걱정 말라고, 망루를 지었던 1월19일 오후에만 해도 망루 바깥으로 나와 가족들에게 하트 모양을 그려 보이던 남편이 새까만 숯덩이가 되어 거기 있었다. 잘라내고 떼어낸 뒤 얼기설기 바느질을 해댄 주검의 모습으로 그들을 대면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강병두 당시 서울지검 차장은 신원 확인이 안 된 상태에서 유가족에게 연락도 없이 강제 부검을 했다. 검찰의 권한이라고 우겼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혹시나 모르는 폭행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서였을까? 유가족들이 남편들의 생사를 몰라 발을 동동거릴 때 그들을 경찰서에 몇 시간씩 잡아두고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서 2시간 만에 해치운 강제 부검은 지금도 납득이 가지 않는다. 뭔가 은폐할 것이 없었다면, 왜 그리 서둘렀을까?

강병두 수사본부는 이후 모든 책임을 철거민에게 뒤집어씌우는 수사를 했다. 심지어 용역들이 경찰과 함께 진압작전에 참가했다는 점에 대해 수사 의지조차 안 보이다가 MBC 이 방영을 하고서야 서둘러 용역에 대한 수사를 하고 그들을 불구속 기소했다. 그때 진압작전에 참가한 용역 중에 사망한 이가 있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이런 점에 대해서는 전혀 수사를 하지 않았다. 경찰의 진압은 정당한 공무 집행, 철거민들의 농성은 국법 질서에 도전한 용서 못할 범죄라는 도식대로 검찰은 짜맞추기 수사로 일관했다.
그리고 이어진 여론 공세. 당시 한나라당의 신지호 의원은 철거민들을 ‘도심 테러리스트’라고 못박았다. 그런 프레임을 최대한 활용해 전국철거민연합(전철련)의 폭력 투쟁을 부각시키고, 전철련 간부들을 샅샅이 조사했다. 전철련을 와해시키겠다는 의지만 철철 넘쳐났다. 사건의 본질을 왜곡하기 위해 청와대는 당시 연쇄살인범 조두순이 잡힌 것을 빌미로 언론에서 용산 참사를 덮으려고까지 했다. 겨우 청와대 행정관 하나가 신종 보도지침 사건에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경찰은 지독했다. 추모대회 신고마저 받아주지 않았다. 그래서 모든 추모행사는 불법이 되고 말았다. 남일당 참사 현장까지 경찰력으로 봉쇄하고 사람들이 모이지 못하게 했다. 철저한 탄압으로 용산 참사에 대한 항의가 확산되지 못하도록 집요하게 막아댔다. 나중에는 피켓을 들고 1인시위를 해도, 삼보일배를 해도 불법이라며 연행해갔다. 매일 남일당 현장은 전쟁통이었다. 매일 연행되고, 벌금을 맞았다.
나는 그런저런 일들을 주동했다는 이유로 이종회 공동집행위원장과 함께 그해 3월 초부터 수배 상태가 되었다. 순천향병원 장례식장을 24시간 둘러싼 경찰들의 경계망 때문에 6개월 동안 장례식장 4층에 갇혀 살았다. 그리고 그해 9월 초 극적인 탈출을 해서 명동성당으로 들어갔는데 다시 4개월 동안 성당 영안실에서 살았다.
매일 남일당 현장은 전쟁통

묵묵히 현장을 찾아준 사람들 덕에 유족들은 덜 울 수 있었다. 2009년의 마지막 날 열린 추모문화제. 김정효 기자

묵묵히 현장을 찾아준 사람들 덕에 유족들은 덜 울 수 있었다. 2009년의 마지막 날 열린 추모문화제. 김정효 기자

하루하루가 지나고 한 달 두 달이 지나도 정부는 경찰로 막기만 한 채 움직이지 않았다. 우리는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다. 유가족들은 장례식장에서 공동생활을 하며 매일 울었다. 매일 경찰에 맞고 온몸에 멍이 들어서 돌아와 울었다. 그런 모습의 유가족들을 보며 참으로 힘들었다. 뭔가 투쟁으로 돌파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조그만 더, 조금만 더 참고 싸우자고 유가족들을 설득했다. 들려오는 소리는 시간을 끌며 고립시키면 된다는, 이명박 대통령이 했다는 말과 같은 것뿐이었다.
침묵으로 일관하던 정부를 대신해서 그해 12월 중순이 넘어 서울시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장례 협상은 극적으로 12월30일 새벽에 타결됐다. 진상 규명이나 구속자 석방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장례 절차에 대한 합의만 겨우 매듭지어놓고 장례일을 잡았다. 장례 협상만 타결한 것이었음에도 언론에는 마치 용산 참사가 모두 해결된 것처럼 보도돼 화가 나게 만들었다.
2010년 1월9일, 용산 참사가 일어난 지 355일, 참사 당일처럼 무척이나 추웠고 눈발이 날렸다.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의 언 땅에 그들을 장례 지낸 이틀 뒤 우리는 명동성당을 나와 경찰에 자진 출두했다. 감옥에서 용산 참사의 많은 사람들을 떠올렸다. 남일당 현장을 지키던 천주교 신부님, 수녀님, 목사님, 그리고 많은 문화예술인, 미디어활동가, 용산 4구역을 비롯한 전철련 사람들, 거기에 이름을 내지 않고 묵묵히 현장을 찾아준 가난한 사람들이 있어 355일 동안 유가족들이 덜 울었고 덜 외로웠다. 용산 참사 유가족들은 이 일로 새로운 세상을 만났고, 이제 다시는 예전의 그들로 돌아갈 수 없게 됐다. 감옥에는 8명이 수감됐다(그중 2명은 지난해 10월에 만기 석 달을 남기고 가석방됐다). 경찰은 아무도 감옥에 가지 않았는데 철거민들만 감옥에 갔고, 부상자들은 영구 장애를 입고 병원을 다니고 있다.
용산 참사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국가폭력의 대표적 사건이 돼버린 용산 참사에 대해 한 시인은 이렇게 설명했다.
“이날의 투입 작전은 경찰 한 명을 포함, 여섯 구의 숯처럼 까맣게 탄 시신을 망루 안에 남긴 채 끝났으나 애초에 경찰은 철거민을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았으며 철거민 또한 그들을 전혀 경찰로 여기지 않았다.”(이시영의 시 ‘경찰은 그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중에서)
그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곧 용산 참사 4주기를 맞는다. 다급하게 진압해서 사람이 죽어나간 그곳은 개발이 중단된 채 4년째 폐허로 남아 있다. 그 공터를 바라보면 밀려오는 화를 참을 수 없다. 정말로 경찰을 비롯한 정권은 망루에 오른 철거민들을 철저하게 진압 대상으로만 봤지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그리고 많은 시민들도 그렇게 보았다. 그러므로 침묵했고, 그 침묵은 이명박 정권 내내 공권력에 의한 인권유린을 용인하는 꼴이 되었다. 용산 참사에 침묵했던 대가는 처참했다.
용산 참사에 대한 재판도 이해할 수 없는 과정을 밟아서 철거민들에게 중형을 선고하는 것으로 끝났다. 다음회에는 용산 참사 철거민들의 재판 과정을 더듬어보려고 한다

인권재단 사람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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