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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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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안법 64년이면 충분하다

12월1일, 국가보안법 제정 64년 맞지만 폐지 투쟁 잊혀져

유엔도 권고한 국보법 폐지가 글로벌 스탠더드, 이제는 지키자
등록 2012-11-30 10:33 수정 2020-05-03 04:27

20년 넘게 인권운동을 해온 내게 가장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서슴없이 국가보안법 폐지라고 답한다. 나는 국가보안법과 함께 살아온 인권운동가였다. 멀리서 국가보안법으로 잡혀가는 사람들을 안타깝게 바라보고 그들이 석방되기를 기원하는 위치가 아니라, 국가보안법 폐지 투쟁의 중심에서 이런저런 역할을 해온 사람이다. 국가보안법 폐지는 내게 숙원 과제다.
지난여름이었던가. 국가보안법 폐지와 양심수 석방을 외치며 1993년부터 이어온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 목요집회에 참석했을 때다. 아저씨 한 분이 “미친놈들”이라고 욕하며 지나갔다. 악에 받쳐서 마이크를 잡고는 “국가보안법 폐지가 상식이다. 국가보안법 없는 세상이 돼야 민주주의도 가능하다”고 외쳤다. 각종 글로벌 기준을 들이대면서 왜 인권 분야의 글로벌 스탠더드는 무시하는 것인지, 이미 유엔에서는 수없이 국가보안법 폐지를 권고하지 않았던가. 사람의 생각을 통제하는 국가, 폭력 없는 표현 행위마저 처벌하는 국가가 정상적인 국가인가. 소수의 사상이라고 해서 무시하는 국가는 민주주의와 양립할 수 없는데도 우리는 국가보안법을 두고 민주주의를 말한다. 국가보안법이 폐지되면 사회주의가 되는 게 아니라 그때부터 자유민주주의가 시작된다는 것을 입이 닳도록 말해도 세상은 들어주지 않는다.

국가보안법 철폐를 요구하는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목요집회가 20년째 이어지고 있다. 지난 5월3일 서울 종로 탑골공원 앞에서 열린 민가협 집회에서 보라색 수건을 쓴 양심수 가족이 발언을 하고 있다. 한겨레 김경호

국가보안법 철폐를 요구하는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목요집회가 20년째 이어지고 있다. 지난 5월3일 서울 종로 탑골공원 앞에서 열린 민가협 집회에서 보라색 수건을 쓴 양심수 가족이 발언을 하고 있다. 한겨레 김경호

MB 정부, 국보법 입건자 3배 늘어

국가보안법 폐지 투쟁 앞에 나는 지친 모습을 보고는 한다. 길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예전보다는 사정이 많이 나아졌다. 대규모 국가보안법 사건도 없고, 거기에 따르는 고문도 사라졌다. 그런데도 여전히 박정근씨 사건에서 보듯 북한을 조롱하고 풍자하는 리트윗 행위도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의 유죄를 받아야 하는 세상이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왕재산 사건으로 국가정보원은 무려 200명 가까운 사람들을 소환했다. 주로 인천 지역 노동·통일 운동 관련 활동가였다. 이들 중 5명을 구속했는데, 반국가단체라는 혐의는 무혐의로 1심에서 결론 났음에도 징역 9년까지 형을 선고받고 2심이 진행 중이다.

이처럼 국가보안법은 아직도 무서운 법률이다. 이명박 정부 들어 별별 국가보안법 사건을 마구 만들어내 입건자 수가 한 해 150명 이상이 돼버렸다. 이전 정부에서는 겨우 수십 건이던 것에 비하면 이 정부 들어 3배가 급증했다. 갑자기 이 정부에서 좌익사범들의 활동이 활발해진 탓일까? 그렇지 않다. 입건자의 85% 이상이 국가보안법 7조 위반이고, 이 중 대부분은 집행유예로 풀려나고 무죄판결도 종종 받는다. 이명박 정부 들어 인터넷상에서 북한 사이트를 접속하거나 트위터 계정을 리트윗하는 행위를 공안기관이 샅샅이 뒤져내기 때문이다. 거기에 자생적으로 국가안보를 걱정하는 10~20대들이 국가보안법 위반 사범을 색출하려고 혈안이 되어 사이트를 뒤져서 기관에 고발하기 때문이다. 심각한 사건은 겨우 한두 건인데 이런 코미디 같은 일들이 국가보안법을 두고 많이 벌어지고 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지독한 반공주의 공부를 하며 살았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때는 반공 웅변대회와 글쓰기 대회를 휩쓸었다. 북괴도당에 대한 적개심에 활활 타서 반공 궐기대회에 동원되는 일에도 신나했다. 우리는 이수근·김신조 같은 간첩 얘기를 들으며 살았다. 그런 간첩들이 북한에서 내려오는 이들만이 아니라 선거철마다 만들어졌음을 알게 된 건 한참 뒤의 일이다.

1980년대 학생운동을 하던 시절에는 국가보안법이 공포 자체였지만, 국가보안법으로 잡혀가는 선배나 동료들은 일종의 부러움의 대상이기도 했다. 그에 뒤따르는 미행·감시·연행·고문 얘기를 들으며 그 공포를 내가 겪는 것처럼 느끼기도 했다. 나야 피라미밖에 되지 않는 하찮은 활동가였음에도 미행을 조심했고, 우리가 읽던 책들을 특별히 신경 써서 간수해야 했다. 일종의 보안의식이 그때부터 내면에 자리잡았다. 잡혀가도 조직은 절대 불지 않는다는 각오를 다지고 다졌던 시절이었다.

구속자 통한 폐지 운동 어려운 시대

내가 이른바 간첩을 처음 본 것은 감옥에서였다. 1987년 대전교도소에는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인 간첩이 수두룩했다. 북에서 넘어온 사람도 있었고, 진보적인 운동을 하다가 간첩이 되어 잡혀온 사람도 있었다. 한결같이 당당한 모습의 그 간첩들은 모진 고문에도 생존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다. 전향공작도 그들의 신념을 꺾지 못했다.

조작간첩의 존재를 처음 접한 것은 1988년 이후 민가협에서였다. 조작간첩 사례집을 보게 되었고, 실제로 인민혁명당을 비롯한 조작간첩 사건으로 가족이 감옥에 있는 어머니들을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조작간첩 사건의 진상 규명과 그들의 석방 문제가 떠올랐고, 장기수의 인권 문제가 국내를 넘어 국제사회에서 주목받는 이슈가 되었다. 지속적인 운동으로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다음에는 장기수들이 모두 석방되었다.

국가보안법 폐지 투쟁은 이 구속자들의 석방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되는 사건이 일어나면 석방대책위원회가 만들어졌고, 이름처럼 석방을 위해 투쟁하는 식이었다. 그러다가 사람들이 감옥에서 나오면 다시 투쟁은 시들해지곤 하기를 반복했다. 세계 최장기 정치범의 기록을 가진 이는 김선명씨로 45년간 복역했고, 안학섭씨는 42년간 복역했다. 한 사람이 자신의 사상과 신념을 꺾지 않는다는 이유로 반세기 가까운 세월 동안 감옥에 갇힐 수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세계는 경악했다.

장기수와 구속자가 있을 때는 국가보안법이 얼마나 잔인한 법인지를 쉽게 이해시킬 수 있었다. 거기로부터 국가보안법의 폐지는 진보운동 진영 전체의 첫 번째 공통 과제였고, 야당도 주저 없이 국가보안법 폐지에 동의하던 때였다. 하지만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뒤 이런 분위기는 급격히 변화했다. 구체적인 물적 증거인 구속자를 통한 국가보안법 폐지 여론의 확산은 이제는 불가능한 시대가 되었다. 공안기관도 국가보안법 위반자로 입건하는 사람들을 선별했다. 유명 인사나 여론이 악화될 정도의 인물은 회피했다. 그러므로 국가보안법 사건으로 당하는 피해자는 있지만, 여론은 도저히 움직이지 않는다.

2004년 여의도, 단식과 박근혜
국가보안법 폐지에 가장 다가섰던 해로 기억되는 2004년 겨울, 26일간의 집단 단식이 이어졌지만 결국 국가보안법은 철폐되지 않았다. 같은 해 12월19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국가보안법 폐지를 위한 대행진’에 참여한 시민이 촛불을 들고 있다. 한겨레 김태형

국가보안법 폐지에 가장 다가섰던 해로 기억되는 2004년 겨울, 26일간의 집단 단식이 이어졌지만 결국 국가보안법은 철폐되지 않았다. 같은 해 12월19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국가보안법 폐지를 위한 대행진’에 참여한 시민이 촛불을 들고 있다. 한겨레 김태형

지금까지 보면 마지막으로 전국을 뒤흔들었던 국가보안법 사건이 있다. 2003년 실로 37년 만에 고국을 방문한 송두율 교수였다. 그는 오랜만에 돌아온 고국에서 ‘해방 이후 최대의 거물 간첩’이 되어 법정에 서야 했다. 1심에서 7년형을 선고받았던 그는 2심에서는 대부분의 혐의에 대해 무죄를 판결받아집행유예를 선고받고 출국하게 된다.

그 뒤 2004년 노무현 대통령이 탄핵을 당했다가 기사회생하고, 당시 여당인 열린우리당이 다수석을 차지하고 민주노동당이 10석을 건져서 국회에 진출하는 상황이 되었다. 정부와 국회가 국가보안법을 폐지할 수 있는 조건이 조성된 것이다. 이에 발맞춰 휴식기에 있던 ‘국가보안법폐지국민연대’를 재구성하고, 하반기 동안 이에 투쟁력을 집중했다. 마침하여 국가인권위원회가 국회에 국가보안법 폐지를 권고했고, 루이즈 아버 유엔 인권고등판무관도 이를 지지했다. 분위기는 일순간에 폐지 쪽으로 확 기울었다.

그러자 국가보안법 사수 진영의 반격이 거세졌다. 헌법재판소가 국가보안법 7조를 합헌으로 결정하고, 대법원도 국가보안법의 폐지가 이르다는 입장을 내고, 보수원로와 대중이 결집하게 된다. 다시 분위기를 역전시킨 사람은 노무현 대통령이었다. 그는 “낡은 유물은 폐기하고 칼집에 넣어 박물관에 보내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고 MBC와의 대담에서 밝혔다. 그런 뒤 폐지와 개정 사이에서 우왕좌왕하던 열린우리당이 당론으로 ‘국가보안법 폐지, 형법 개정’으로 방침을 정했다.

그해 겨울 국가보안법을 폐지하려는 진보운동 진영의 대대적인 투쟁이 서울 여의도에서 벌어졌다. 두 달 동안 천막을 치고 농성을 했고, 마지막에는 1천 명이 단식 대오에 참가했다. 26일 동안의 단식에도 국가보안법 폐지 법률안이 상정조차 되지 못하자 단식 대오는 물과 소금마저 끊고 국회로 진격했다. 오래도록 굶었던 그들을 경찰은 아스팔트에 패대기쳤다. 처절한 투쟁은 결국 무산되었다.

국가보안법이 폐지될 수도 있는 상황을 저지한 것은 당시 한나라당 대표 박근혜였다. 그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지키는 안전장치인 국가보안법을 폐지하는 것을 나의 모든 것을 걸고 막아내겠다”고 선언했고, 95일 동안 한나라당 의원들을 동원해서 국회 법사위 점거 농성을 벌여 급기야는 법사위의 법안 상정을 막았다. 반면 열린우리당은 의견이 사분오열돼 뒤죽박죽이었다. 오합지졸이라고나 할까? 의원들마다 의견이 달랐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열린우리당 출신의 김원기 국회의장은 직권상정의 명분이 충분함에도 그의 별명대로 ‘지둘러’만 외치다 시간을 넘겨버렸다. 그때 무산된 뒤로부터 국가보안법 폐지 투쟁은 살아나지 못하고 있다.

‘잡범’ 인권운동가의 주장

사람들은 종종 내가 국가보안법 전과가 없다고 하면 의아해한다. 별이 제법 많은 편에 속하는 내가 당연히 국가보안법 전과를 달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정을 알고는 그들이 내뱉는 말, “잡범이네!”다. 잡범인 인권운동가가 글로벌 스탠더드에 입각해 지금도 주장한다. 제발 국가보안법 좀 폐지하자고. 21세기에도 좌빨이니 종북이니 하는 유치한 짓 그만하고, “김일성 만세” 부를 사람 부르라고 하면 안 되겠나. 1960년 시인 김수영이 썼던 것처럼 그냥 인정하는 것에서 민주주의는 시작될 것인데.

12월1일은 일제의 치안유지법을 계승한 국가보안법이 제정된 지 64년이 되는 날이다. 1948년 12월10일, 유엔은 세계인권선언을 채택했다.

인권재단 사람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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