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용산 참사로 구속된 철거민 5명이 이 글을 쓰는 오늘(1월31일) 감옥에서 출소했다. 구속된 8명 중에 2명은 지난해 10월26일 가석방 형식으로 출소했고, 5명은 대통령의 잔형 면제 특사 조처로 감옥 문을 나선다. 출소하는 그들의 심정이 어떨까? 3명은 불구속 기소됐다가 1심에서 법정 구속돼 3년3개월을 살았고, 2명은 4년 넘게 살았다. 그들은 불길이 치솟는 망루에서 가까스로 생존한 사람들이고, 도심 테러범으로 몰려 어떤 항변도 제대로 할 수 없었던 이들이다.
오늘 감옥 문을 나서는 이들도 심정이 착잡할 것이다. 특히 이충연 용산4구역 철거민대책위원장의 경우는 더할 것이다. 아버지가 망루에서 돌아가셨고, 동료들이 죽었는데 자신은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을 안고 살아온 그가 아닌가.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다. 가족에게나 동료에게나 살아 있어서 미안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다. 오늘을 기뻐할 수만은 없는 사람들이 또 있다. 유가족이다. 옥에 갇혀 고생한 구속자들을 환영하는 마음과 함께 자신의 남편은 돌아올 수 없다는 부재 상황을 확인하는 날이 오늘이다.
2009년 2월9일, 검찰수사본부를 책임진 정병두 서울지검 차장은 망루의 화재 원인은 농성 중이던 철거민이 시너를 투기하고 거기에 화염병을 투척한 때문이라고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주요 혐의는 특수공무집행방해치사상죄였다. 이들이 던진 화염병으로 경찰관 1명이 사망하고 여러 명이 부상당한 것에 대해 책임을 묻겠다는 것이다. 예상한 것과 한 치도 오차가 없었다. 철거민 5명을 구속 기소하고 15명은 불구속 기소, 1명은 기소 유예, 6명은 계속 수사하겠다고 밝혔다. 경찰에게는 정당한 공무집행을 한 것이므로 무혐의라고 면죄부를 주었고, 용역업체 직원들은 비난 여론을 의식해서 몇 명만 불구속 기소했다.
용산범대위는 검찰의 짜맞추기 수사, 축소·은폐 수사를 규탄하는 투쟁을 초기부터 전개했다. 유가족들이 대검찰청을 점거해 농성을 벌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검찰은 작정한 대로 갔다. 유가족의 동의도 없이 강제 부검을 서둘러서 했던 것처럼. 검찰의 법 위에 군림하는 안하무인격 태도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게 국민참여재판을 무산시킨 일이었다. 변호인단이 국민참여재판을 신청하자 검찰은 증인을 60명 넘게 신청하고 버티기로 나왔다. 그리고 검찰이 제시한 증거에 대한 조사만 하려 해도 115시간이 걸린다는 계산이 나왔다. 결국 1심 재판부(서울중앙지법 형사제27부, 한양석 부장판사)는 생떼 부리는 검찰을 이기지 못하고 국민참여 배제 결정을 내렸다. 이런 결정을 내리자 검찰은 슬그머니 자신들이 그토록 고집하던 증인 60여 명의 신청을 철회했다. 검찰은 국민참여재판으로 가는 걸 막기 위한 술수를 부렸고, 거기에 법원은 맥없이 넘어갔다.
변호인단과 이견, 의 탄생그다음에 불거진 문제가 검찰의 수사기록 열람·등사 문제였다. 1만 쪽 넘는 수사기록 중에 경찰 간부들과 특공대원들의 초기 진술이 담긴 중요한 자료를 검찰은 절대 보여줄 수 없다고 버텼다. 이른바 ‘수사기록 3천 쪽’ 사건이다. 법원은 검찰에 열람·등사를 명령했지만, 검찰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러자 수사기록이 없는 채로 재판부는 재판을 진행했다. 이에 피고인들과 변호인단은 법정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강구해서 항의했지만 그대로 재판을 끌고 가려는 재판부를 제지할 수는 없었다. 결국 변호인단은 재판부 기피 신청을 냈고, 이 일로 재판은 대법원의 재판부 기피 신청 기각 결정이 있을 때까지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대해 헌법재판소는 당연히 검찰의 수사기록 미공개는 피고인의 방어권을 침해하는 중대한 위헌 사항이라고 결정을 내렸지만, 그것은 이후 한참 지난 뒤였다.
재판이 재개되려니 변호인단이 재판을 못하겠다고 나섰다. 자신들이 기피한 재판부, 정치재판을 하겠다고 내처 가는 재판부를 신뢰할 수 없으니 전면적인 거부 투쟁으로 가자고 주장하고 변호인단을 사퇴하고 말았다. 나는 수배 중이라 순천향병원 장례식장에 갇혀 있는 몸으로 가장 힘든 결정을 해야 하는 상황을 맞았다. 변호인단의 주장은 다 맞았다. 그렇다고 전면적인 재판 거부 투쟁을 하면 국선변호인단을 선임해서라도 재판을 끌고 가서 사건이 더욱 이상하게 심리될 게 아닌가, 그리고 다툴 사항은 다투어둬야지 나중에 재심할 수 있는 근거라도 남길 게 아닌가, 또 구속된 이들의 형량이 무시무시하게 나올 텐데 형량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재판은 할 수밖에 없는 게 아닌가를 두고 몇 날 며칠을 변호사들과 설전을 벌였다. 용산범대위의 견해도 갈라졌다. 현장을 지키며 함께했던 신부님들도 수사기록 3천 쪽이 공개되지 않은 상황에서 재판은 무의미하다고 말씀하셨다. 설득할 방법은 없었다. 결단, 모든 걸 책임지고 결단을 내려야 하는 상황에서 우리는 재판을 진행하기로 했다.
김형태 변호사에게 전화해서 장례식장으로 오라고 하여 간곡하게 부탁했다. 나는 수배 중이어서 나갈 수 없는 몸이었기에 그렇게 선배들도 내가 호출하는 입장이었다. 고심하던 김형태 변호사가 결국 변호를 수락했다. 그런 김 변호사가 고맙다. 9월부터 재개된 재판에서 김형태 변호사는 ‘화염병에 의한 화재’라는 검찰의 주장을 깨기 위해 변호인단과 함께 밤샘 작업을 했다. 재판 기일이 겨우 한 달여밖에 남지 않은 시간 동안 집중 심리가 매일 계속되었다. 이때 변호인을 보조하기 위해 매일 법정 공방을 기록한 사람들이 영화 을 만든 김일란·홍지유 감독이었다. 밤늦은 시간에 재판이 끝나면 그걸 정리하고 변호인단에 전달하느라 거의 매일 밤을 새웠던 그들의 노고가 없었다면 재판은 무척이나 힘들었을 것이고, 영화 도 없었을 것이다.
정치재판으로 치닫던 법원의 재판과 달리, 국민이 나서서 용산 참사 책임자들을 기소하고 이들을 배심제를 통해 재판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1심 선고가 있기 열흘 전인 2009년 10월18일 서울 명동 가톨릭회관은 용산 국민법정을 보려고 찾은 시민들로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언론 보도는 그날 600명 이상이 참여한 뜨거운 열기를 전하고 있다. 기소인만 2만 명, 전국의 시민들은 김석기를 비롯한 경찰만이 아니라 이명박 대통령과 오세훈 서울시장, 박장규 용산구청장 등에게도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동의했고 기소인으로 참여했다.
이날 국민법정의 배심원들은 김석기 전 서울지방경찰청장 등 경찰 간부 6명은 살인죄 및 상해죄, 폭행·가혹행위죄 등으로, 이명박 대통령은 살인 진압의 교사죄와 강제퇴거죄로, 오세훈 전 서울시장은 강제퇴거죄 등으로 각각 유죄 평결을 했다. 천성관 전 서울지방검찰청장도 수사기록 3천 쪽을 공개하지 않아 증거은닉죄로 유죄를 선고받았다. 박연철 변호사 등 각계 시민들을 대표하는 9명의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피고인들에게 강제 진압에 대해 국민에게 사과하고, 주거권을 보장하도록 정책을 전환”하고, “철거민들의 명예를 회복하고 유족들이 장례를 치르도록 협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실 법원이 정의의 편에 서 있다면 경찰 특공대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길 게 아니라 진압작전을 지휘한 상층부와 그것을 교사한 대통령 등에게도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점에서 시민들의 법감정에 충실한 결론이 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가 세운 국민법정이었다. 다른 나라에서는 종종 민중법정·시민법정이 열리고 여기서 나온 의견을 사법부가 귀담아듣기도 하는데, 그걸 기대할 수는 없었다. 강제퇴거죄는 형법에도 없는 것이지만, 유엔의 인권 기준과 대한민국 정부에 대한 권고 등에 비춰볼 때 가능한 범죄일 것이다. 강제퇴거는 모든 대책을 수립한 다음에 최후의 수단으로 사용하라는 권고가 이행됐다면 용산 참사는 없었을 것이다. 국민법정은 인권의 원칙과 기준에 충실하고자 했다. 사회권(경제·사회·문화적 권리)도 사법 심사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는 국제인권 기준이 시도된 첫 법정이었음에도 이 점은 별로 부각되지 않았다.
그 열흘 뒤 열린 1심 선고는 철거민들을 국법 질서에 도전한 세력으로 규정하고 구체적인 증거도 없이 정황만으로 화염병에 의한 화재로 단정하고 5~6년의 중형을 선고했다. 다음해 2심 과정에서 우여곡절 끝에 수사기록 3천 쪽을 열람·등사했고, 그 초기의 진술서들에서 망루에 진입했던 특공대원들조차 망루 안에서 화염병을 던지는 것을 보지 못했다고 말했음을 확인했다. 그렇지만 이런 진술과 법정 증언은 2심에서도 배척됐다. 이런 경향은 대법원에서도 그대로 유지됐고, 결국 구속자들은 4~5년의 징역형이 확정돼 오늘까지 복역했다.
용산은, 재판은 끝나지 않았다법원이 증거주의와 공판중심주의에 충실한 재판을 진행했다면 아마도 다른 결론이 나왔을 것이지만, 아직 법원은 정치권력의 눈치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이뿐만 아니라 법원을 구성하는 판사들이 이제는 스스로 지배세력의 이익을 대변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충만해 있다. 그렇기에 시간이 흐를수록 유전무죄·무전유죄(또는 유권무죄·무권유죄)의 경향성이 강화되고 있어 암담하기만 하다. 마지막으로 불의를 바로잡고 정의를 세울 수 있는 기관인 법원이 이처럼 타락했으니 말이다. 1심 재판을 맡았던 한양석 부장판사는 그 뒤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로 승진했다.
정치권에서 도심 테러범으로 낙인찍고, 이 프레임대로 충실하게 수사한 검찰, 검찰·정치권과 한통속인 법원이 만들어낸 비극이 용산 참사에 대한 재판이다. 용산은 그래서 끝나지 않았으며, 훨씬 더 많은 진실을 드러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오늘 구속자들의 석방을 보며 더욱 그런 생각이 간절하게 솟는다.
인권재단 사람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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