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이면 어김없이 부른 노래가 있었다. 프랑 스 철거민 노인의 죽음을 애도하는 샹송에 가 사를 붙였다는 . “꽃 잎처럼 금남로에 뿌려진 너의 붉은 피/ 두부 처럼 잘리어진 어여쁜 너의 젖가슴/ 5월 그 날이 다시 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 솟네.// 왜 쏘았지 왜 찔렀지 트럭에 싣고 어디 갔지/ 망월동의 부릅뜬 눈 수천의 핏발 서려 있네/ 5월 그날이 다시 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 솟네.” 4절까지 있는 이 노래를 우리는 5월만 돌아오면 절규하듯이 불러댔다. 그때마다 광주에서 죽어간 이들을 떠올리며 술잔을 기울였고, 누군가는 훌쩍훌쩍 울고는 했다. 그리고 학교에서 거리에서 그 분노를 온몸으 로 표현했다.
우리는 안기부, 보안사, 대공분실, 경찰에 끌려간 사람들에 대해 쉬쉬하면서도 걱정했 다. 누가 고문을 당했고, 강제 징집됐다가 죽 었다는 소식을 들어야 했다. 그리고 같이 들 려오는 건 분신과 투신 소식이었다. 학살자 가 대통령이던 그 시절에는 목숨이 아깝지 않을 것처럼 싸웠다.
1980년대에 대학 생활을 했던 이들에게 5 월은 화려한 ‘계절의 여왕’이 아니라 투쟁하 는 달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모두 ‘5월병’을 앓았다. 투쟁하지 않으면 비겁하고 양심을 저버리는 것처럼 여겨지던 시절이었다. 더 혹 독하게 5월병을 앓은 이들은 물론 광주의 유 가족과 부상자, 그리고 시민들이었다. 그들 은 전두환 정권에 일상적으로 감시를 당했 다. 남편이나 아들딸들이 학살당해 쓰레기 차에 실려서 묻힌 망월동 묘역에도 함부로 접근할 수 없었던 유가족들이 있었다. 그리 고 지금도 돌아오지 않는 실종자들이 있었 다. 5월만 돌아오면 ‘광주’의 사람들은 잠 못 이루고 불안해했으며, 우울증에 걸리거나 진짜 정신병에 걸리기도 했다. 그런 광주의 5 월병에 우리는 기꺼이 전염됐다.
1986년 5월은 야당인 신민당이 전국적으 로 직선제 개헌추진본부를 만들던 때였다. 5 월3일, 인천에서 개헌운동본부를 만들기로 한 날에 전국에서 시위대가 몰려들었다. 야 당의 합법적인 개헌운동 판을 이용해 전두 환 독재정권 타도 투쟁의 파고를 높일 기회 로 삼으려 했다. 그날 나는 해고자들과 함께 인천 주안의 시민회관 앞에서 하루 종일 최 루탄을 맞으며 투쟁했다. 그러다가 오랜만에 동생을 만났다. 거리에서 투석전에 쓸 돌을 깨고 있던 동생과 나는 부둥켜안았다. 나는 노동운동을 한답시고 인천에 내려와 있던 터라 동생을 몇 달 만에야 만났다. 투쟁 현 장에서 만나니 더없이 반가울 수밖에.
그리고 그해 5월30일, 광주항쟁 주간을 맞아 노동자들도 반미 구호를 들고 미국 관 련 시설을 점거하기로 했다. 당시 미국 관련 시설들은 철통같은 경비 때문에 점거농성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으므로 대신 한미 은행 영등포지점을 점거하고 우리의 주장을 알리기로 했다. 나와 같은 학생운동 출신 해 고자를 비롯해 16명의 해고자들이 은행을 점거하고 45분 동안 농성을 벌였다.
우리가 내건 구호는 ‘노동자, 농민 피땀 짜 는 미 제국주의 물러가라!’였다. 광주 학살의 공범인 미국에 대한 노동자의 분노를 분명하 게 보여주기 위한 투쟁이었고, 그때 나는 선 동 역할을 맡아 창틀에 올라가 주로 구호를 외쳤다. 그러다가 경찰에 밀려 2층에서 길바 닥으로 떨어졌다. 이런 장면이 전국적으로 TV를 통해 방영됐고, 시골의 부모님은 큰 충 격을 받아야 했다. 그 일로 구속됐다가 다음 해 6월항쟁 덕분에 가석방으로 풀려났다.
두 살 아래 동생인 박래전은 1988년에 숭 실대 인문대 학생회장이었다. 동생은 ‘학살 의 원흉’인 노태우와 야당이 국회에서 광주 문제를 타협적으로 해결하는 것에 반대했 다. “학살 원흉의 심판은, 아니 처단은 이 땅 4천만 민중의 투쟁으로 설치되는 민중재판에 의해 이루어질 때만 가능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해 5월15일, 서울대생 조성만이 명동성당 가톨릭회관에서 할복한 다음에 투신했고, 5월18일에는 단국대생 최덕수가 천안캠퍼스에서 분신했다. 그들 역시 학살 원흉의 단호한 처단과 조국 통일 등을 주장했다.
내 삶을 바꿔놓은 아우 래전의 죽음학내 시위와 거리시위로 인해 동생은 학교 안에 갇혀 있었다. 학교 밖으로는 나올 수 없던 동생이 5월의 어느 날 시골집에 내려왔다. 마침 나도 시골에 내려가 부모님과 함께 산밭에 참외를 심고 있었다. 동생은 조성만이나 최덕수의 죽음이 외면당하는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그리고 6월4일, 동생은 학교 학생회관 옥상에서 “광주는 살아 있다” “청년학도여 역사가 부른다. 군사파쇼 타도하자”고 외치며 시너를 부은 자신의 몸에 불을 붙였다. 다음날 새벽에야 동생의 분신 소식을 듣고 황급히 서울 영등포 한강성심병원에 찾아갔다. 경기도 안양에서 택시를 타고 병원을 가면서 믿지도 않는 신에게 ‘제발 제 동생이 살아만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온몸에 붕대를 감고 산소호흡기에 의지해 거친 숨을 쉬는 동생은 내게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분신 이틀 뒤 동생은 운명했다. 동생은 스물여섯 살이었고, 나는 스물여덟 살이었다.
나는 유가족이 되었다. 이소선 어머니를 비롯해 많은 열사들의 어머니, 아버지를 만났다. 이어서 의문사한 아들과 남편을 둔 어머니, 아버지를 만났다. 그리고 조작간첩 사건의 가족들도 만났다. 우리 현대사의 아픔이 전국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유가협)와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에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1991년 5월은 분신 정국이었다. 유가협의 사무국장이던 나는 명지대생 강경대의 주검이 있는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영안실을 지켜야 했다. 그러면서 광주에서, 경북 안동에서, 경기도 성남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들려오는 분신 소식에 버스를 타고 기차를 타고 지방에 내려갔다. 참으로 고통스러운 나날이었다.
‘노태우 정권 타도’를 외치며 죽어간 이들 중에 안동대생 김영균이 있었다. 그는 “노태우 정권 타도, 공안통치 분쇄”를 외치며 5월1일 분신했다. 박종철 열사의 아버님을 모시고 그가 화상 치료 중인 경북대병원에 황급히 내려갔다. 유가족의 요청으로 경찰이 병실 출입을 막고 있었지만, 아버님을 앞세워 병실에 들어갔다. 아버님은 새까맣게 타버린 그의 손을 잡고 “포기하면 안 돼. 넌 살아날 수 있어”라고 힘주어 말씀하셨다. 그러자 그는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1991년, 김영균과 강기훈의 기억매일 거리에선 시위대가 정권 타도를 외치고, 최루탄이 난무했다. 6월항쟁이 재연될 것만 같았다. 다급해진 정권은 민주화운동 세력을 부도덕적 패륜집단으로 몰아갔다. 동료의 목숨을 투쟁에 이용하는 반인륜 패륜집단으로 기획된 게 ‘유서 대필 조작 사건’이었다. 김기설씨의 유서를 대필해 자살을 방조했다는 누명을 쓴 이가 강기훈이었다. 그로부터 22년, 이제 이 사건은 재심 중에 있다.
어느 해 5월이든지 마음 편하게 맞아본 5월은 없었다. 특히 5월 말 아카시아꽃이 짙은 향기를 바람에 흩뿌리는 날이 오면 광주항쟁의 나날을 되짚어보며 깊이깊이 침잠해 들어가고는 했다. 그 5월의 끝에 동생이 죽었으니 더욱 그러한지 모르겠다.
2000년대라고 해서 5월을 계절의 여왕으로 맞을 수가 없었다. 2006년 5월4일, 평택미군기지확장저지범국민대책위원회 대변인이던 나는 이날 새벽 4시, 기자들 앞에 섰다. ‘여명의 황새울’이라는 작전이 국방부와 경찰에 의해 진행되기 시작한 때였다. 동이 트기도 전에 육로로, 수로로, 공중에서 헬기로 그들은 경기도 평택 대추리를 공격해왔다. 경찰은 다짜고짜 노동자와 학생들을 폭행했다. 그들은 세 번이나 무산된 행정대집행을 이번에는 기필코 성사시키겠다고 벼르며 들어왔다. 헬기는 대추리와 도두리 들판에 군용 철조망을 날라댔고, 군인들은 벼가 자라는 논에 철조망을 바쁘게 설치해갔다.
대추리 투쟁의 거점인 대추분교에서 저항하는 학생, 노동자들을 피곤죽이 되도록 두들겨 패면서 끌어냈다. 학교 벽과 바닥에는 선혈이 낭자했다. 지붕 위에서 마지막까지 버티던 신부님들이 내려오자 단숨에 대추분교를 부숴버렸다. 할머니들이 땅을 치며 통곡했다. 그리고 대추리는 군대와 경찰의 검문소를 통과해야 가까스로 들어갈 수 있는 섬이 되고 말았다. 다음해 주민들은 눈물로 대추리 마을을 뜰 수밖에 없었다. 나는 2006년에 두 번 구속됐다.
2009년 5월22일,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이 공장을 점거하고 파업에 들어갔다. 그때 나는 용산참사범국민대책위원회 공동집행위원장을 맡았다가 수배에 걸려 순천향대학병원 장례식장 4층에 갇혀 있었다. 장례식장에 갇혀서 용산 참사 때처럼 경찰특공대를 컨테이너로 올려 노동자들을 잔인하게 진압하는 과정을 울분에 차서 지켜보았다.
2013년 5월, 나는 경남 밀양의 산중에서 송전탑 건설 반대 투쟁을 하는 할머니들이 한국전력 직원들과 경찰 앞에서 알몸시위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보고 있다. 팔순의 할머니들을 잡아채는 우악스러운 손들…. 그리고 제주 강정마을을 비롯해 전국에서 국가의 폭력 앞에서 울부짖는 소리를 듣는다. 천지사방이 온통 통곡 소리다.
올해는 학살당한 광주시민들을 ‘홍어’라며 조롱하는 ‘일베’(일간베스트저장소)를 비롯한 ‘괴물’들의 반란을 보느라 더욱 마음이 착잡하다. 그들 앞에 민주화도 뜻이 왜곡돼버렸다. 인권은 그 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5월병 없이 맞이하는 5월을 언제나 볼 수 있을까? 광주에서 죽은 이들 앞에서, 그리고 민주제단에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바친 영령들 앞에서 얼굴 들 수 없는 5월을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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