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은 자전거가 좋았다. 생애 첫 자전거는 자신의 키보다 더 컸다. 7살 소년은 15살 형의 늘씬한 두발자전거가 그렇게 부러웠다. 안장에 올라타면 페달까지 발이 닿지 않아, 프레임에 걸터앉아 까치발로 자전거를 몰았다. 그때 소년은 몰랐다. 20년쯤 뒤 자신이 자전거 바퀴를 짜고, 프레임을 만들고, 안장을 얹는 자전거공이 되어 있을 줄은.
손으로 만드는 것이 좋다
2월15일 오전 11시. 서울 마포구 합정동의 한적한 주택가. 벽돌 건물들 사이로 커다란 철제 건물이 서 있다. 커다란 곰 그림이 건물 외벽을 가득 채우고 있다. 한 남자가 건물 앞 골목에 나와 싹싹, 비질을 한다. 수제 자전거 공방 ‘두부공’을 운영하는 김두범(28)씨다. 키 큰 형의 자전거를 안장 없이 타던 그 소년이다.
처음부터 자전거 만드는 사람이 될 생각은 아니었다. 김두범씨는 자전거 마니아도 아니다. 자전거를 좋아하긴 했지만 익숙한 이동수단일 뿐이었다.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하고, 졸업 뒤 먹고살 문제를 고민하다가 아무래도 손 쓰는 일을 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자전거를 막 배우기 시작한 어머니가 떠올랐다. 강원도 강릉에 계신 어머니는 자전거를 배우고 “내 삶의 영역이 넓어진 것 같아”라고 얘기했다. 누군가의 삶을 넓게 하는 도구를 만드는 일은 참으로 의미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자전거를 만들기로 마음먹으면서 김두범씨도 자신의 삶을 조금 확장했다.
국문학도에 자전거 마니아도 아니었으니 어디서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자전거 자체에 대한 이해부터 필요했다. 학원을 등록해 다녔다. 그러나 학원에서 내려준 결론은 자전거포를 열고 공장에서 대량생산되는 자전거를 판매하는 길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김씨가 원하던 길은 아니었다. 그가 자전거포를 열기로 마음먹은 데는 자전거가 품은 어떤 ‘대안적 가능성’에 대한 기대도 있었기 때문이다. 수제작이 가능하고, 영구적으로 쓸 수 있으며, 자동차보다는 감당이 가능한 속도를 내는 이동수단, 그 가능성을 조금씩 구체화해보고 싶었다.
수소문 끝에 경남 양산에서 수제작으로 자전거를 만드는 공장이 있다는 정보를 얻었다. 바로 가방을 싸서 내려갔다. 자전거 장인은 지금은 중국으로 이전해간 삼천리자전거 공장에서 ‘영 사이클’이라는 간판을 걸고 자전거를 만들고 있었다. 그는 자전거 공장이 대량으로 기계를 돌리던 그때부터 사람이 빠져 썰렁해진 지금까지 초지일관 자전거를 만들어내는 이였다. 2개월 동안 문하생으로 수업을 들었다. 그러나 배움을 얻고도 당장 자전거포를 열 수 없었다. 기존 공장에 갖춰진 좋은 기계와 시스템이 있는 선생님과 달리, 그가 가진 것이라고는 무언가를 만들고 싶은 두 손밖에 없었다.
답을 찾으러 핸드메이드 문화가 발달한 일본에 견학을 갔다. 헤매다 보면 의외의 순간 새로운 길이 나오게 마련이다. 그곳에서 미국에 자전거 제작을 배울 수 있는 학교가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DIY(Do it yourself) 문화가 발달한 미국에서는 핸드메이드 자전거가 대중화돼 있다. 미국 오리건주 애슐랜드의 자전거 학교 UBI(United Bicycle Institute)에 등록했다. 코스는 하나당 2주 정도로 짧게 구성돼 있었다. 7개월간 미국에 머물면서 그는 대부분의 수업을 마스터했다. 그동안 품은 답답함이 해소되는 시간이었다.
“자전거는 영원한 벗이에요”
그에게 자전거는 공산품이 아닌 수공업품이다. 손으로 직접 설계도를 그리고, 거기에 맞춰 바퀴살을 짜고, 알맞은 부품을 고르고, 프레임을 만든다. 김씨는 요즘 친누나에게서 의뢰받은 자전거를 만들고 있다. 누나는 자전거로 출퇴근을 할 뿐만 아니라 주요한 이동수단으로 사용한다. 작고 간소한 모양새의 자전거를 원했다. 크기는 크지 않게, 철제 프레임은 도색하지 않고 철의 느낌을 그대로 살려달라고 주문했다. 이 자전거는 지난해 6월 가게 문을 연 이래로 첫 공식 수제 자전거가 될 터다. 수제 자전거 공방을 표방하지만, 아직까지 핸드메이드 자전거에 대한 인식이 널리 퍼지지 않은 탓인지 실제 제작을 의뢰하는 이는 많지 않았다. 주로 수리를 맡기러 오는 이들과 기성 자전거를 구입하러 오는 손님이 대부분이었다. 수제 자전거포는 서울의 2곳을 합쳐 전국에 4곳밖에 없을 정도로 아직 많은 이들에게 익숙한 공간이 아니다. 으레 수제작이라 하면 비쌀 것이라는 선입견 또한 작용했으리라.
그는 수제 자전거에 대한 인식이 바뀌면 자신에게 맞는 자전거를 직접 주문하는 사람도 늘지 않을까 기대한다. “자전거를 단순히 사고 버리는 물건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장 친근한 벗이 될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면 좋겠어요. 단순히 가격 대비 강도나 무게 측면에서는 공장에서 대량생산한 기성품이 더 나을 수도 있어요. 그렇지만 사람이 정성 들여 직접 만든 핸드메이드의 가치, 이동수단이자 자신만의 공예품이라는 인식을 가진다면 수제 자전거를 제작해 오래도록 타는 사람이 늘겠죠.”
그렇다면 어느 정도의 비용을 자전거에 투자하는 것이 적당할까. 워낙 천차만별로 가격이 형성된 자전거 시장에서 소비자들은 갈등하게 마련이다. “제 옆에 서 있는 이 자전거는 중고인데, 우리 가게에서 3만원에 팔아요. 저기 벽에 걸려 있는 자전거는 300만원이에요. 자전거란 범주 안에서 가격 차이가 굉장하죠. 무조건 비싸다고 좋은 것은 아니고 싸다고 해서 못 탈 지경은 아니지만, 멀리 내다보고 자전거에 투자할 수 있는 비용을 고민해보면 좋겠어요. 저는 150만원 정도가 적정선, 혹은 정규직 노동자가 자전거에 쓸 수 있는 최대선이라고 생각해요.”
처음 자전거 타기를 시도해보는 사람도 있을 테고, 너무 고비용이 아니냐고 되묻자 이렇게 말한다. “인식의 차이인 것 같아요. 취미를 위한 도구, 스포츠 용품이라고 생각하면 150만원은 지나치죠. 하지만 자전거는 평생 탈 수 있어요. 자기 몸에서 시작해 다시 자기 몸에서 끝나는, 자동차에 비해 훨씬 인문적인 이동수단이죠. 자신의 몸 일부에, 융통할 수 있는 최대치를 투자해 영구적으로 함께하겠다는 생각이라면 가능한 금액이 아닐까요?”
커뮤니티 형성하는 공간이 되길
수제 자전거에 관심을 갖고 자전거포를 열고 싶다는 사람들의 방문이 차츰 늘고 있다는데, 자전거 가격 얘기가 나온 김에 벌이도 물어봤다. “생각보다 많이 못 벌어요. (웃음) 월세 내기도 벅찰 때가 있어요. 자전거 한 대를 팔아도 보통 10~20%밖에 남지 않아요. 제 경우에는 만약 기성품도 안 팔고 동네 자전거 수리도 안 맡는 고급 수제 자전거 숍으로 포지셔닝했다면 돈이야 많이 벌었을지 몰라요. 비싼 자전거만 파는 가게에서는 실제로 비교적 값이 싼 자전거는 가져가봐야 고쳐주지 않는 경우도 있어요. 그런데 돈을 많이 벌겠다는 목표로 시작한 일도 아니고 그러고 싶지는 않아요.”
김씨는 아날로그 시절의 자전거포를 그리워한다. 옛 자전거포들은 직접 자전거를 만들어 파는 경우가 많았다. 자전거포는 마을의 커뮤니티를 형성하는 역할을 했다. 자전거 가게 주인은 사람들의 자전거를 고쳐주며 마치 주치의처럼 그들의 습관을 읽고, 일상을 짐작하며, 마을을 타고 흐르는 이야기들에 귀기울였을 테다. 그는 자신의 가게가 커뮤니티의 아지트가 되기를, 소통의 공간이 되기를 원한다. 그러기 위해 그는 사소한 수리 의뢰에도 스스럼이 없고, 아주 비싼 최고급 자전거는 들여놓지 않지만 3만원짜리 중고 자전거를 팔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혼자 작업하는 시간이 때때로 외롭기도 하지만, 대부분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방해받지 않고 일하는 그 시간이 즐겁다. 장사는 잘 안 된다지만, 더구나 요즘 같은 겨울철엔 더욱 손님이 줄어들지만 그는 머리를 쥐어짜며 고민하지 않는다. 애초에 머리 쓰며 일하기보다는 손을 잘 쓰며 일하고 싶다는 철학을 외면하지 않는다. 손님이 없을 때는 가게 문을 닫고 근처에 나가 놀 수 있으니 즐겁기만 하단다. “아니, 누가 뭐라 해요?” 근처 맛집을 찾아다니는 것도 즐겁고, 커피맛 좋은 집에서 차 한 잔 하기도 즐겁고, 근처에서 일하는 형이나 동생들을 찾아가 수다 떠는 일도, 한가하게 헌책방을 찾아 보물을 발견하는 순간도 모두 소중하고 즐겁단다.
그는 프레임이 빨간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한다. 함께 사는 누나의 직장 근처인 서초동에서 합정동 가게까지 정확히 28분 정도 걸린단다. 차를 타고 빨리 달릴 경우 10~15분으로 단축할 수도 있지만 그는 자전거의 속도에 만족한다. ‘빠르게 휙휙’보다는, 달리는 옆에 무엇이 어떻게 움직이며 살아가는지 정도는 가늠할 수 있는 그 속도가 적당하다 생각하는 것이다.
느릿느릿 장인이 되어가는 시간
가게 이름 ‘두부공’은 어릴 적부터 가족이 자신을 부르는 별명 ‘두부’에 장인 ‘공’(工)자를 붙여 만든 것이다. 사소하고 개인적인 별명과 장인이라는 묵직한 단어의 결합이 그답다. 김씨는 그렇게, 느긋함을 즐기며, 장사가 안 되는 순간을 즐기며, 초침 째깍거리는 소리가 함께하는 혼자만의 작업을 즐기며 천천히, ‘두부’라는 별명의 소년에서 ‘장인’으로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었다.
글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
사진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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