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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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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의 락그룹처럼 B급 영화를 만들다

등록 2012-08-07 17:16 수정 2020-05-03 04:26
제대로 된 B급 영화를 찍겠다며 모인 ‘B+’ 멤버들이 지난 7월22일 서울 홍익대 앞에서 모여 의지를 다졌다. 임창재·고은기 감독, 고영준 피디(왼쪽부터).

제대로 된 B급 영화를 찍겠다며 모인 ‘B+’ 멤버들이 지난 7월22일 서울 홍익대 앞에서 모여 의지를 다졌다. 임창재·고은기 감독, 고영준 피디(왼쪽부터).

B급영화를 제대로 찍어보겠다는 모임이라고 했다. 모임 이름도 B급에 플러스를 붙여 B+라고 한다. 그런데 왜 하필 B급 영화일까? 저예산 영화, 졸작 영화, 서로 물고 뜯는 좀비 영화, 피가 튀는 전기톱 영화, 블랙 코미디, 살색(?) 컬러가 주를 이루는 영화. B급영화라는 명칭(B급 영화는 흔히 저예산 영화 혹은 질적으로 떨어지는 영화를 뜻했지만 1970년대 이후 젊은 비평가들이 B급 영화와 그 감독들을 새롭게 조명해 이른바 ‘저예산 예술영화’로 일컬어지게 됨)을 떠올리자 잡다한 이미지들이 따라붙었다. 어찌되었건, 내게 이 영화들의 공통점은 점잖지 못하다는 거였다. 그래서 B+ 모임 사람들을 만나보기로 했다. 점잖지 못한 사람들은 왠지 재미있을 것 같았다.

<font color="#1153A4">숨겨온 속살을 드러내는 ‘핑크 영화’</font>

예상은 빗나갔다. B+ 모임원이라며 인터뷰 자리에 나온 피디와 감독들의 첫인상은 꽤 점잖았다. 아니, 점잖을 나이 대였다. B급 영화는 젊은 친구들만 만드는 게 아니었구나. 나는 그들을 앞에 두고 생각했다. 그제야 모임 구성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40대 이상의 감독과 제작피디, 작가들이 모였다고 했다. 그러니까 중년이었다.

10년 넘게 영화를 만들어온 이들이었다. 를 만든 임창재 감독, 의 고은기 감독, 제작을 맡은 고영준 피디. 다들 자기 색깔이 넘치는 영화인이라 했다. 그건 대중적이지 않은 작품을 해왔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데 B급 영화는 대중적인 장르가 아닌가. 안 그래도 중년의 영화인들이 만드는 B급 영화라는 것이 의아하던 터라 물었다. “왜 이런 작업을 하나요?”

연장자인 임창재 감독이 먼저 입을 열었다.

“스스로 중견이라고 하진 않지만 안팎의 상황으로 볼 때는 중견이라고 하니, 독립영화 공간에서 의미 있는 작업을 해야 되지 않을까. 그런 반성을 한 거죠.”

B급 영화가 의미 있는 작업이라고?

“영화의 내용이나 담론이 많이 규격화되어 있잖아요. 영화를 만드는 길도 돈이 많은 영화 아님 돈이 전혀 없는 저예산 영화로 제작 규모가 양분화되어 있고. 그런 것들을 터부하고 다양함을 모색해야 하는 거고. 그래야 후배들에게도 대안을 줄 수 있는 건데, B+ 모임에서 하는 작업이 그 계기가 되지 않을까 하는 거죠.”

고은기 감독이 말을 거들었다.

“기존의 틀을 깨 변화를 주기에는 이런 장르가 더 쉽기도 하고 도전적일 수도 있잖아요. 장르적 결합을 해보자 한 거죠. B급 영화는 음악으로 치면 락이라고 할 수 있을 거 같아요. 일탈된, 그런 거.”

락? 그러니까 이들은 중년의 락그룹이라는 말인가? 혁대를 느슨히 맨 양복바지가 어울리는 몸으로 청바지를 꿰어 입고 기타를 둘러맨, 나이든 락그룹이 설핏 그려졌다.

이어 아무리 락이라 해도, 핑크 영화는 좀 무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뒤따랐다. 모임에서 핑크영화라는 장르를 고민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터였다. 핑크영화란 정사(情事)를 중심으로 인간을 그리는 영화라고 한다. 벗는 데 목적을 둔 에로 영화하고 다르다 하지만, 그럼에도 변화를 꾀한다며 헐벗은 영화를 내놓는 것은 위험하지 않을까?

정작 이들은 대수롭지 않아 했다. 핑크 영화도 결국 멜로라는 반응이었다. 임창재 감독은 가장 겉으로 드러나는 속살이 피부라며, 피부를 보이는 것은 숨겨 온 속살을 드러내는 작업이라 했다.

<font color="#1153A4"> “불온이요? 불안하죠”</font>

“핑크를 한다고 하지만, 그리고 싶은 것은 어른의 멜로? 우리의 속살, 속내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멜로인 것 같아요. 그 안에 아름다움과 추함도 같이 보여주는 멜로요.”

임창재 감독은 예쁘고 동화 같은 10대, 20대의 사랑이 아니라, 다른 색을 가진 사랑을 표현하고 싶다고 했다.

“요즘은 사랑도 교육도 사는 것도 획일적이잖아요. 그건 위험한 거고, 영화가 그것을 닮아 가면 문제가 되는 건데, 요즘 영화들이 실은 그렇죠. 영화에서 20대의 사랑 밖에 볼 수가 없고. 다른 사랑의 색깔들이 있는 건데 너무 특정 나이대로만 이야기가 되니까. 뭐, 그 안에는 영화 배급의 한계 등이 있는 거죠.”

규격화된 소재와 틀에서 벗어난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바람이 어른들의 멜로로 표현된 것이다. 저항이니 락밴드니 하는 말이 어울리는 듯도 싶었다. 점잖은 얼굴들이 어쩐지 불온해 보였다. 나는 물었다.

“실제 불온한가요?”

“불온이요? 불안하죠.”

중년의 영화인들이 죽는 소리를 했다. 제작자의 처지에서 고영준 피디가 이들의 불안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독립영화 같은 경우는 자비를 털어 만들거나 정책 지원을 받아 만드는 방법 밖에 없거든요. 게다가 독립영화계도 2-30대 감독, 새로운 얼굴들을 좋아해요. 나름대로 색깔을 갖춰온 감독들이 갈수록 제작 여건이 어려워지는 일이 벌어지는 거예요. 장르영화 제안을 제가 처음 했는데, 각자의 영역에서 독립영화를 만들어 온 감독들이 대중과 거리가 가까운 장르 영화와 만나는 것을 보고 싶기도 했고, 또 이것이 이 감독들이 앞으로 꾸준히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주지 않을까 해, 한번 해보자 한 거고요.”

그가 말한 기반이란 안정적인 수익이다. 그럼에도 고영준 피디는 외부에 ‘돈 때문에’ 장르 영화한다는 식으로 보여질까봐 고민이라고 했다. 자신의 색깔과 대중의 코드 사이에서 줄타기해야 하는 처지들이다. 그것은 이들이 십년 넘게 영화일을 하는 동안, 내내 고심해온 것이다.

그렇게 고심하고 갈등하고 자비 제작까지 불사하며 영화판에서 버티었다. 그럴 만큼 영화가 할 만한 것인가? 할 만한가 물었는데, 임창재 감독은 ‘답답하다’고 답했다. 그럼에도 20년 전, 자신의 첫 영상을 대중에게 선보이던 때를 기억한다고 했다. 노동 관련 사진을 가지고 슬라이드 영상을 만들었는데, 그 영상과 광장을 메운 수 천 명의 노동자 대오가 나눈 교감을 잊지 못했다. 불안하다는 그의 말에는 생존의 불안도 있지만 새로운 것, 더 나은 것을 찾아내지 못할지 모른다는 영화적 불안이 함께 했다.

고은기 감독은 오히려 불안하기에 영화를 한다고 했다. 사는 것은 늘 불안한데, 불안을 진정시켜주는 것이 영화란다. 그래서 영화를 멈추지 않는다. 이들 말을 들어보니, 영화는 인생을 사는 일과 비슷한가 싶다. 불안하고 답답하지만, 그렇기에 더 애쓰며 살고, 결국은 살 만한 인생처럼 말이다.

<font color="#1153A4">시나리오 공유하던 모임에서 발전</font>

인터뷰가 끝날 즈음, 이들은 정말 불안해했다. 덜컥 인터뷰를 하긴 했는데, 모임이 한 일이 없다는 이유였다. 그러더니 이것을 시작으로 제대로 해보자 뒤늦게 의지를 다지기 시작했다. 시나리오를 공유하던 모임으로 시작해 지금의 합의에 이르러 B+ 이름을 다는데 1년이 걸렸다. 개성 강하고 서로 입장이 다른 감독, 작가, 제작피디가 모였으니 앞으로 또 얼마간의 시간이 걸리지 모른다. 그럼에도 그들이 말하고 싶은 인생과 영화를, 조만간 하나의 실체로 접할 수 있길 바란다.

글 희정 제2회 손바닥 문학상 당선자
사진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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