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에 가면 사과도 있고 배추도 있고….” 어린 시절 심심하면 친구와 함께 주거니 받거니 하던 노래를, 이 시대의 아이들은 잘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지.
시장에만 가면 모든 것이 있던 시대를 살아온 기성세대와는 다르게, 요즘 아이들에겐 대형마트가 그 역할을 대신한다. 장난감도 있고 옷도 있고 양말이며 과자, 심지어 애완동물까지 있는 곳. 간식을 먹거나 식사도 가능하며 문화센터 강좌까지 들을 수 있다. 그런 곳을 놔두고 시장을 찾는다는 것이 아이들에게는 오히려 낯선 일일지 모르겠다.
<font color="#017918"> 12개 점포, 17명의 청년 사장 ‘개업’ </font>그러나 시장은 단순히 재화만을 주고받는 곳이 아니다. 사람 사는 이야기가 있고 흥겨운 놀이가 있으며, 재화가 아닌 인심을 주고받는 곳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그 나라에 대해 알고 싶으면 시장부터 가보라’는 말이 있는 것이다. 최근 전통시장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두드러지고 있다. 대형마트 의무휴일제 도입 같은 법적인 행보도 있으나, 더 가까운 변화는 그 내부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전북 전주의 터줏대감’이라 불리는 남부시장. 풍남문을 중심으로 자리한 이 시장은 오랫동안 전주 시민의 사랑방이자 중추적인 도매시장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최근에는 여느 전통시장과 마찬가지로 빈 점포가 늘어가고 사람들의 발걸음이 뜸해지고 있다. 그런 이곳에 묘한 청년장사꾼들이 등장했다. ‘암행어사 출두요’를 외치던 포졸들만큼이나 경쾌하고 신나는 등장이다. 지난 5월4일 남부시장 6동의 2층에 총 12개 점포, 17명의 청년 사장님들이 ‘청년몰’을 개시한 것이다.
식충식물 화원, 디자이너들이 운영하는 잡화점, 테이크아웃 요리점, 한방찻집, 칵테일바, 재활용 공방, 수제소품 공방, 온·오프라인 패션 쇼핑몰, 손으로 만드는 뽕잎버거 등 가게들은 하나같이 톡톡 튀는 아이디어와 오랫동안 준비해온 실력으로 반짝인다.
그들 중에 일명 ‘준비된 장사꾼’이라 불리는 ‘더 플라잉팬’의 사장 김은홍(39)씨가 있다. 사람의 신체 나이는 그 영혼에 잇닿아 있다더니, 서른아홉의 나이가 무색하도록 동안인 그다. 그는 오랫동안 창업을 꿈꾸었다. 전북 익산의 한 육가공업체 식품개발부에서 일해오며 아이템 연구를 소홀히 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역시 그의 도전을 어렵게 한 것은 가정에 대한 책임감과 위험부담이었다. 남편의 마음을 헤아린 아내가 먼저 ‘남부시장 청년장사꾼 모집’ 안내 글을 보여주었다. 문화체육관광부와 전주시가 지원하는 ‘문전성시 프로젝트’의 일환으로서, 프로그램 교육 위주의 단발적 효과보다는 청년장사꾼을 통해 전통시장의 자발적인 변화를 도모하려는 사업이다. 1년간 임대료가 면제되고 소정의 리모델링 비용도 지원된다. 이거다, 싶었다. 지난해 10월 ‘나비’라는 카페와 ‘캘리그라피’라는 공방이 문을 열어 성업 중이고, 한옥마을과 연계해 새로운 관광형 시장으로서의 가능성도 엿보였다. 한번 마음을 먹자 두려움은 없었다. 그는 테이크아웃형 볶음면과 볶음밥, 치킨텐더 등 퓨전 메뉴를 골자로 한 사업계획서를 냈다. 가슴에 뜨거운 불이 일었다. 열정과 즐거움의 불이다. 마침내 청년장사꾼으로 선정된 그는, 본격적으로 창업 준비에 뛰어들었다.
<font color="#017918"> 걱정을 잊을 만큼 큰 즐거움 </font>‘전통시장의 부활’이라는 콘셉트와 비용의 절감을 위해, 장사꾼들이 다 함께 모여 버려진 가구와 목재, 돌 등 재활용품을 이용해 새로운 공간을 창출해냈다. 다양한 재능을 가진 이들이 모였기에 아이디어도 넘쳤다. 양은냄비는 간판으로, 장롱은 카운터로, 웬만한 집기와 창문 정도는 뚝딱뚝딱 만들고 페인트칠도 직접 했다. 창업 비용이 낮아진 이유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가게를 열고, 첫 손님을 맞았다. 처음으로 주문을 한 이는 바로, 같은 2층에 자리하고 있는 채소 등속을 파는 어머니였다. 개업 전 고춧가루 등을 구입했더니 맛이나 봐야겠다고 오셨단다. 볶음면을 후룩후룩 드시더니 맛있다고 싱긋 웃어주신다. 은홍씨는 영원히 그 기분을 잊지 못할 것 같다.
물론 사람이 백이면 빛도 백 가지라고, 남부시장의 모든 상인에게서 응원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젊은이들이 왔다가 금세 나가버릴까 의심하거나, 분위기만 들뜨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있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런 경계나 근심에도 불구하고 이 사교성 좋고 감성이 풍부한 청년장사꾼들은 스스로 남부시장인이 돼가고 있다는 것이다. 일부러 청년몰을 홍보해주시기도 하고, 기웃기웃 오셔서 밥 한 그릇, 차 한 잔 사주시는 어르신들께 감사한 마음으로 인사를 건네고, 어떻게 하면 남부시장을 활성화할 수 있을지, 시민들에게는 어떻게 양질의 문화를 되돌려드릴 수 있을지 벌써부터 고민하고 있다. 그러한 취지로 그들은 매주 수요일 저녁 ‘반상회’란 이름 아래 머리를 맞댄다.
청년들은 이 반상회를 통해, 주 1회 사회공헌 프로그램을 추진 중이다. 디자이너들의 재능기부를 주축으로 하는 무료 체험과 놀이문화 활용, 특별한 음식 제공 등이다. 이것은 얼마 전 은홍씨가 스승의 날을 맞아 지역아동센터에 있는 어린이들을 초대해 무료 체험과 식사 제공 등을 한 일을 모티브로 삼았다. 이런 사회공헌 활동을 계속해나가려면 청년몰의 흥행도 중요한 요소다. 한옥마을에 거리홍보를 나가거나 광고지 등을 직접 제작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신기한 것은, 이들에게 이처럼 새로운 (혹은 엉뚱한) 사업을 진행하는 일에 두려움은 없다는 것이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신이 나고 흥이 난다는 은홍씨의 말대로, 이 청년장사꾼들에게는 걱정이 없다. 진짜로 걱정이 없는 게 아니라, 걱정을 잊을 만큼 즐거움이 크다. 무엇이든 서로 돕고 나눌 수 있는 동지가 있기 때문이며,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적당히 벌고 아주 잘 살자’는 비전을 세울 만큼 욕심 앞에 당당하기 때문이다. 아마 희망이라는 것이 꿈을 현실로 이뤄줄 수 있는 마법을 지녔다면, 남부시장의 낡은 상가 2층에 위치한 이 자그마한 꿈의 공간을, 분명 더 많은 사람들의 놀이터로 만들어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font color="#017918"> 시작은 미미하지만 곧 북적일 미래</font>
인터뷰를 마친 뒤 가게를 둘러보았다. 어머나, 신기한 것들! 친구들과 찾아와 밥 먹고 차 마시고 구경하고 체험하고 놀이까지 즐기기에 딱일 듯싶었다. 지상낙원이 그곳에 있는 줄 몇이나 알까. 그중에서도 파리지옥 등 식충식물을 파는 가게가 눈길을 끌었다. 다음날, 그동안 절대로, 네버! 있을 수 없었던 일. 토요일 오전에 시장 가기를 실천해, 아들 녀석에게 파리지옥을 고르게 해주었다. 이렇게 시작은 미미하지만 이것이 곧 북적이는 우리만의 풍물시장을 되돌려주리라 기대한다.
전주=글 김소윤 제2회 손바닥 문학상 당선자사진 탁기형 선임기자 kht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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