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스웨덴으로 입양된 아들은 한국말을 할 줄 몰랐다. 양부모가 있는 스웨덴으로 돌아가는 날, 전라도에 있는 친엄마와 마지막 전화 통화를 했다. 서로 안부를 물은 뒤 엄마가 어렵게 입을 뗐다. “내가 집을 비운 사이, 삼촌이 너와 동생을 데리고 고아원에 맡겨버렸다. 내 잘못은 아니지만 미안하다. 그리고 오늘 서울 못 가서 미안하다.” 알코올중독인 큰아들을 돌봐야 하는 노모는, 생환한 둘째아들을 배웅하러 상경하지 못했다. 아들은 울먹이며 자신이 알고 있는 유일한 한국말을 반복했다. “엄마, 사랑해. 엄마, 사랑해.”
낭떠러지에 떨어진 뒤 날아오르다
남혜미(28)씨는 2시간 동안 이어진 그날의 통화를 생각하면 여전히 가슴이 먹먹하다. 모자의 한마디, 한마디를 그가 통역한 까닭이다. “아들분이 ‘엄마, 사랑해’라고 말할 때, 저도 감정이 격해져서 같이 울었어요.” 그녀는 국제입양인봉사회(InKAS·www.inkas.org)에서 해외입양인을 돕는 자원활동을 3년째 해오고 있다. 친부모를 찾아 처음으로 고국을 찾는 이들의 한국 가이드 일부터, 가족상봉 통역, 교환 서신 번역까지 국제입양인의 친구가 돼주는 일이다.
월드비전에서 결연한 후원아동과 후원자의 편지 번역 자원활동도 함께 하고 있다.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가난한 아이들이 한국 후원자들에게 보낸 편지를 한국어로 옮기고, 후원자의 답장을 영어로 번역한다. 이역만리의 사람들이 편지로 사랑을 나누는 것을 보며, 자신이 원래 가지고 있던 꿈을 거듭 되새기게 됐다. 그녀는 애초 외교관이 되고 싶었다. 대학에서 경영학과 영어영문학을 전공하고 외무고시에 3차례 응시했지만 낙방했다.
자원활동은 그 실패에서 비롯됐다. “2차에서 최종 낙방한 2009년 8월, 쓸모없는 사람인 듯한 열패감으로 괴로웠어요. 그러다 마음을 다잡았죠. 내가 배운 영어로 세상에 보탬이 될 수 있는 일을 찾아보자고 마음먹었어요. 그러던 중 우연히 이 일을 알게 돼 자원했죠.” 지금이야 웃으며 얘기할 수 있지만 사실 그때는 심적인 고통 말고도 육체적으로도 아픈 날들이었다. 머리가 아퍼 들른 병원에서 뇌종양이 발견된 것이다. “한 달 동안 입원해서 수술을 받았는데 내 자신이 너무 딱한 거예요. 고시에 떨어진 것도 모자라, 고시 준비하며 병까지 얻었으니까요.” 고난은 혼자 오지 않는다 했던가.
바람 불어 춥고 모질던 세월을 견디게 해준 것은 엄마의 사랑이었다. “간이침대에서 한 달 동안 생활하시며 저를 보살핀 엄마를 보니까 제가 너무 불효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 꿈을 이루는 것도 좋지만, 무엇보다 부모님에게 가장 큰 효도는 자식이 건강한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몸을 추슬렀어요.”
그녀가 병상을 털고 일어나는 데는 그즈음 읽은 한비야씨의 도 큰 힘이 되었다. “천길 벼랑 끝 100미터 전/ 하느님이 날 밀어내신다. 나를 긴장시키려고 그러시나?/ 10미터 전. 계속 밀어내신다. 이제 곧 그만두시겠지/ 1미터 전. 더 나아갈 데가 없는데 설마 더 미시진 않을 거야/ 벼랑 끝. 아니야, 하느님이 날 벼랑 아래로 떨어뜨릴 리가 없어. 내가 어떤 노력을 해왔는지 너무나 잘 아실 테니까/ 그러나, 하느님은 벼랑 끝자락에 간신히 서 있는 나를 아래로 밀어내셨다/ …/ 그때야 알았다. 나에게 날개가 있다는 것을.” 그녀는 이 구절을 읽고 바닥에서 날아오를 수 있었다. 더불어 온전히 자신을 사랑할 수 있게 됐다.
독학으로 5개 국어를 연마하다
사실 그녀가 외무고시를 본 건 외교관이라는 직업에 대한 선망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녀는 외교관이 되어 국제구호 활동에 나서고 싶은 마음이 컸다. “우리나라가 국제적 위상에 비해 해외 원조나 구호 활동은 그에 미치지 못하잖아요. 외교관이 되면 부족한 부분을 메워나가고 싶었어요.” 그 꿈은 여전히 유효해 보인다. 많은 경우, 가난한 아이들을 구하는 것은 한 나라의 외교관이기보다 국제기구나 한비야와 같은 활동가들이니까.
다시 건강해진 몸과 마음으로 그녀는 그렇게 자원활동에 나섰다. 진로나 취업 등으로 불안해할 시간에 더 많은 입양인들을 만났다. 내 작은 수고가 다른 이들에게 도움이 된다는 생각에 기뻤다. 그러다 보니 영어 실력이 녹슬 기회도 없었다. 하긴 5개 국어를 구사할 정도로 남다른 언어감을 자랑하는 남혜미씨에게 영어는 그저 외국어 가운데 하나일 수 있겠다. 그녀는 민망한 수준이라고 겸연쩍어했지만, 주변에서 그녀의 영어와 중국어 실력이 수준급이라고 귀띔해줬다. 어학연수 한 번 안 가고 한국에서 배우고 익힌 실력이란다. 일본어는 독학했고, 최근 프랑스어 공부를 시작했다. 사람이 아닌 것 같다.
밝고 건강한 에너지와 화려한 ‘스펙’ 덕분일까. 2010년에는 자연스럽게 취업의 문도 열렸다. 직장생활에 적응하느라 몸살 나듯 바빴지만, 자원활동을 접을 순 없었다. 주말뿐만 아니라 주중에도 짬이 나면 번역과 통역 일을 거들었다. 이렇게 할 일이 많으니 연애할 시간은 있을까? “남자친구는 없는데요. 같이 봉사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고 싶어요.” 신애라 같은 그녀가 차인표 같은 남자를 찾고 있다. 둘만의 사랑이 아닌 세포분열하는 사랑을 나눌 ‘자봉(자원봉사자) 커플’의 출현을 기대한다.
오승훈 기자 vino@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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