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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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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의 중심에서 민중언론 세우다

[2012 만인보]대구·경북 인터넷 민중언론 <뉴스민> 창간한 20대 천용길·이상원씨
독자 후원금으로 운영하며 지역 노동 현안 추적 보도하는 청춘의 고투
등록 2012-05-16 14:47 수정 2020-05-03 04:26
‘진보의 불모지’ 대구에서 인터넷 민중언론 <뉴스민>을 창간한 천용길(왼쪽)·이상원씨가 5월10일 모교인 경북대 교정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뉴스민 제공

‘진보의 불모지’ 대구에서 인터넷 민중언론 <뉴스민>을 창간한 천용길(왼쪽)·이상원씨가 5월10일 모교인 경북대 교정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뉴스민 제공

5월9일 대구 경북대 앞 커피점 ‘희루’. 저녁 6시에 보기로 한 두 사람은 7시가 다 되도록 나타나지 않았다. 옆자리에선 경북대생으로 보이는 20대들의 토론이 한창이었다. “국방비 삭감하고 4대강 같은 토목사업에 낭비하는 돈만 줄여도 복지 확대가 가능하다니까.” “복지예산 늘린다고 그 돈이 고스란히 서민한테 가는 줄 아나? 정부 예산 가운데 공무원들 배불리는 데 들어가는 돈이 얼만데?”

“자신의 몫 주장 못하는 민중 대변하자”

조세 정책에서 시작한 대화 주제는 자유무역협정(FTA)을 거쳐 부동산 버블 논란으로 옮아붙으며 열기를 더해갔다. 경북 방언 특유의 억센 억양 탓인지 테이블에선 1980~90년대 운동권 학생들의 ‘사투’(思鬪·사상투쟁) 분위기마저 풍겼다. 연애와 스펙 쌓기에 여념 없을 귀때기 새파란 20대들이 정부 정책을 주제로 열띤 논전을 벌이는 모습이 기특해 찻값이라도 대신 내주고 싶었다. 기자 이상원(25)씨가 나타난 건 그때였다. 경북 예천의 공군부대에서 2박3일짜리 동원훈련을 받고 오는 길이라고 했다. 훈련받던 군복 차림 그대로였다.

함께 오기로 한 편집장은 어떻게 됐느냐고 물었더니 그제야 급히 휴대전화 버튼을 누른다. “형, 어디야? 뭐? 알았어. 빨리 와.” 전화를 끊더니 급한 취잿거리가 생겨 좀 늦을 거란다. 서울에서 취재 내려온 기자를 상대하는 솜씨가 영 서툴다. 그사이 옆 테이블의 토론 분위기는 한껏 달아올라 있었다. “야, 니는 원래 진보 아이가?” “얘기했잖아. 이 자리선 조갑제씨한테 빙의하기로 했다고.” 오가는 대화로 미뤄보건대 대학마다 성행하고 있다는 토론동아리 회원들이 아닌가 싶었다. ‘토요일 리허설’ 어쩌고 하는 얘기가 이런 추론에 무게를 더했다. 찻값 대납은 없던 일로 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편집장 천용길(27)씨가 온 것은 그로부터 30분쯤 지난 뒤였다. “죄송합니다. 꼭 와달라는 취재원 부탁을 거절하기 힘들어서.”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날 하루 들른 취재 현장만 4곳이라고 했다. 유일한 평기자인 이상원씨가 예비군 훈련에 소집되는 바람에 두 사람의 취재 몫이 편집장인 그에게 고스란히 몰린 탓이었다.

두 사람이 몸담고 있는 (www.newsmin.co.kr)은 인터넷 신생 매체다. ‘대구·경북 인터넷 민중언론’을 표방하며 지난 5월1일 창간했다. 두 사람은 경북대 교지인 선후배 사이다. 2년 간격을 두고 편집장을 지냈다. 처음 창간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궁금했던 질문을 던졌다. 진보언론도, 대안언론도 아니고 왜 민중언론인가. 그것도 ‘대한민국 보수의 본향’이라는 대구에서.

상원씨가 입을 열었다. “지역 어른들한테도 그런 지적을 많이 들었어요. 민중 자체가 옛날 단어인데다, 이 지역에선 민중언론이란 정체성을 앞세워 폭넓은 호응을 끌어내기 어렵지 않겠느냐는 말씀이셨죠.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민중’을 대신할 말이 마땅치 않았어요. 뭐랄까….”

뜸을 들이는 사이 용길씨가 말을 이어받았다. “‘시민’은 너무 정체가 모호하고, 막연히 ‘진보언론’이라 이름 붙이자니 맥이 좀 빠지는 느낌이고. 고민을 거듭하다 우리 매체가 누구의 열정과 이해를 대변할 것인지가 가장 중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그게 민중이었어요. 엄연히 이 사회의 구성원이지만 어떤 공적 영역에서도 자신의 몫을 주장할 수 없는 사람들. 그들의 목소리를 담아낼 언론을 만들자.”

대구 지역 각계 인사 100명 발기인 참여

이들이 처음 매체 창간을 생각한 것은 3년6개월 전이다. 시작은 단순했다. 교지 편집장 임기를 마친 상원씨에게 선배인 용길씨가 제안했다. “뜻이 맞는 사람끼리 대안 매체를 만들어보자. 지금까지 살아왔고 앞으로도 지켜야 할 이곳 대구에서. 10년 뒤가 됐든 20년 뒤가 됐든, 꼭.” 약속은 했지만 구상을 현실화할 수 있을지 두 사람 다 반신반의하는 상태였다. 우선 군대부터 다녀와야 했다. 지난해 가을, 제대한 두 청년이 다시 만났다. 용길씨가 물었다. “니, 아직 그대로가?” “변했으면 내가 사내가?” “그럼, 지금 칵 저질러뿔자.” “와?” “더 끌면 이리저리 재는 거밖에 더 하겠나?” “그럴까? 좋다.”

문제는 실무 지식이 일천하다는 점이었다. 우선 기성 언론사에서 일정 기간 경험을 쌓기로 했다. 용길씨가 선택한 건 진보 인터넷 매체 이었다. 수습사원으로 입사해 6개월간 기자 생활을 했다. 상원씨는 대학 은사의 소개로 인턴 과정을 밟았다. 교지 편집 경험이 전부인 두 사람으로선 큰 행운이었다. 6개월 남짓 현장을 포복하며, 취재와 기사 작성 요령을 익혔다.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도 한층 깊고 정교해졌다.

해가 바뀐 뒤 본격적인 창간 준비 작업에 들어갔다. 대구 지역 시민사회와 노동계, 학계 인사들을 찾아다니며 도움을 구했다. 2개월여 만에 100명의 발기인이 모였다. 진보적 지역 매체에 대한 열망이 그만큼 크다는 방증이었다. 이득재 대구가톨릭대 교수가 편집위원장을, 노태맹 대구경북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공동대표가 대표직을 수락했다. 10명의 편집위원진에는 지역에서 활동하는 진보적 교수와 노동운동가, 전교조 교사, 환경단체 활동가 등을 위촉했다. 민주노총 대구본부는 작은 사무공간을 무상으로 내놓았다. 4월1일부터 시험판 서비스를 시작했다.

“처음엔 ‘대학에서 교지 하던 애들이 얼마나 제대로 만들겠느냐’며 거리감을 두던 분들이 시험판을 본 뒤 태도가 달라졌어요. 특히 노동현장의 반응이 뜨겁습니다. 그동안 어떤 매체도 그분들 얘기를 진지하게 다뤄주지 않았으니까요.”(이상원)

의 차별성은 그동안 보도한 뉴스들의 목록에서도 확인된다. 4대강(금호강 구간) 건설현장 노동자들의 임금체불 항의농성, 학교 도서관 비정규직 사서 정리해고 반대투쟁, 학교급식 노동자 파업 현장중계 등 지역 방송과 신문이 소홀히 다뤄온 지역의 노동 현안을 집요하게 추적 보도했다. 용길씨는 “그동안 목소리를 낼 통로를 갖지 못했던 현장 노동자들이 이제 현안이 생기면 부터 찾는다”며 “그분들 기대를 깨뜨리지 말아야 한다는 부담감이 적지 않다”고 했다.

요즘 두 사람의 고민은 의 기사 형식을 어떻게 다양화할 것인지에 맞춰져 있다. 노동 현안을 다루더라도 단순한 팩트만 전달해선 독자들의 마음을 움직이기 힘들다는 판단에서다. “중요한 건 사람의 이야기를 얼마나 생동감 있게 풀어내느냐더군요. 의 표지나 특집 기사는 그런 점에서 좋은 교과서가 됩니다.”(이상원)

“재정 안정 확보해 최대한 오래 버틸 것”

신생 인터넷 매체인 만큼 발행 비용 대부분은 독자들의 후원금에서 충당한다. 한 달에 150만원 정도가 들어온다. 두 사람의 취재·교통비를 감당하기도 빠듯한 수준이다. 용길씨는 “기왕 시작한 만큼 재정 안정성을 확보해 최대한 오래 버텨볼 생각”이라고 했다. “망해도 잘 망해야 뒷사람들이 ‘대구에서도 민중언론 해볼 만하다’며 뛰어들 용기라도 생기지 않겠어요?”

시간은 어느덧 밤 10시를 넘겼다. 가난한 기자는 탕수육과 짬뽕 국물에 몇 잔의 ‘소폭’을 말아주는 것으로 청년들의 무운을 기원했다. 국물의 짠맛 뒤로 목구멍을 타고 넘는 탄산의 청량감이 상쾌했다.(뉴스민 기금계좌 : 대구은행 508-10-423433-9 예금주 천용길)

대구=이세영 기자 nom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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