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7일 저녁 8시30분 서울 정동 덕수궁 대한문 앞 쌍용차 해고노동자 농성장. 23명의 죽음이 드리워진 분향소 옆에 ‘거리의 병원’이 세워졌다. 고문생존자들이 국가폭력 피해자들을 도우려고 설립한 재단법인 ‘진실의힘’이 겨울 독감 예방주사를 접종하려고 방문했다. 지난해에 이어 두 번째다.
80년 광주에서 본 ‘거리의 의사’
독감 예방접종 프로젝트의 첫발은 가정의학 전문의인 강용주(50·아나파병원 원장) 진실의힘 이사가 내디뎠다. “지난해 10월 말 병원에 예방주사를 맞으러 오는 환자들을 보며 문득 거리에서 찬바람을 맞으며 독감에 걸리기 쉬운 환경에 노출된 노동자들이 떠올랐다. 진실의힘 씨앗기금을 출연한 쌍용차 해고노동자 가족 심리치료센터 ‘와락’이 문을 열 때 독감백신을 들고 갔다.”
강 이사는 그 자신이 고문생존자다. 전남대 의대에 다니던 1985년 이른바 ‘구미 유학생 간첩단 사건’으로 잡혀가 모진 고문을 겪었다. 허위 자백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그는, 준법서약을 거부한 탓에 열네 번의 겨울을 감옥에서 보냈다. 1999년 비전향 장기수로 출소해 늦깎이로 복학해 의대생이 됐다. 1980년 광주항쟁 때 의사들이 보여준 헌신적인 모습을 기억하고 있어서다. 당시 그 는 대학 입시를 앞둔 고3이었지만 계엄군의 만행에 분노해 총을 들었다.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병원에 총상을 입은 사람, 대검에 찔린 사람, 몽둥이에 맞아 머리가 터진 사람들이 실려왔다. 의사가 치료를 하면 계엄군이 응급실에 난입해 수술하던 사람들을 때리고 끌고 가기도 했다. 그래도 의사들은 공수부대가 총을 난사하는 거리로 나가 쓰러져 있는 사람들을 구급차에 실어날랐다.” ‘거리의 의사’에게 이끌렸던 그가 길거리 농성으로 지친 해고 노동자를 찾아간 것은 어쩌면 운명이었다.
강 이사를 따라 진실의힘도 거리로 나섰다. 20~30년 전 홀로 남았던 아픔이 그들에게도 생생하기에. 어느 날 갑자기 간첩으로 조작돼 억울한 옥살이를 한 고문생존자들은 가족 걱정으로 밤을 지새우곤 했다. ‘갑자기 가장이 사라진 집의 살림살이는 어떤지, 날이 추워지는데 겨울 양식은 장만했는지, 아이들은 아프지 않은지….’ 영문도 모른채 쩔쩔매고 있을 가족의 모습에 벽을 붙잡고 눈물을 흘렸다. 그때 누군가의 따뜻한 손길을 기대할 수 있었다면, 덜 아프고 덜 원망 스러웠을 것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그래서 거리로 내몰린 해고노동자에게 ‘혼자가 아니다’라는 메시지를 고문생존자들이 전하기로 마음먹었다.
지난해 쌍용차 노동자와 가족, 재능교육 농성자 등을 찾아가 200여 명에게 독감 예방접종을 했고 올해도 그만큼 해냈다. 다섯 차례에 걸쳐 인천 갈산역의 콜트·콜텍과 대우자판 농성장, 서울광장의 강정마을 주민과 용산 유가족 천막농성 등을 돌아다녔다. 지난 7월 문을 연 광주트라우마센터를 방문해 5·18 광주민주화운동 피해자와 그 가족들에게도 품앗이했다.
진료비는 초콜릿바
11월1일 서울 여의도 KDB산업은행 앞에서는 시그네틱스, 풍산, 공무원노조, 현대차 비정규직, 전국학교비정규직연대회의 노동자와 그 가족 80여 명이 거리의 병원을 기다렸다. 1년 만에 다시 만난 시그네틱스 노동자는 자녀와 손잡고 길게 줄을 섰다. 자원봉사자로 참여한 의사와 간호사가 체온을 재고 청진기로 심장 소리를 듣는 동안 부모는 아이들 곁을 지켰다. 윤선애씨의 삼남매는 의사 앞에 나란히 앉았다. 다정히 인사를 나누고 주사를 살살 놨지만 막내는 울음을 터뜨렸다. 그치지 않던 아이의 울음은 엄마가 주사를 맞은 뒤 포근히 앉아주자 비로소 잦아들었다. 거리에서 싸우는 해고노동자도 아이들을 보듬어야 하는 엄마라는 사실이 실감났다. 덩치 좋은 민용군은 잔뜩 찡그리며 주사를 맞다가 의사에게 장난스레 야단을 맞았다. 머쓱해하던 그는 농성장을 나서며 초콜릿바를 슬그머니 내밀었다. 민용군이 준비해온 ‘진료비’였다.
어두운 밤, 여의도의 찬바람을 맞으며 안 아무개(62)씨는 감회에 젖었다. 30여 년 전 남편 일가족이 간첩단으로 조작돼 홀로 젖먹이 딸을 키우던 때가 되살아나서다. “저 엄마 나이에 갑자기 남편이 잡혀가서…. 길거리에서 고생하는 엄마와 이를 지켜보는 어린 아이들의 마음에 상처가 남지 않을까….” 끝맺지 못하는 문장에서 안타까움이 묻어났다. 30년간 간호사로 일해온 안씨는 “추운 겨울, 추운 세월을 함께 견뎌내자”라는 마음으로 체온을 재고 주사를 놓았다.
23년 전 간첩 누명을 쓰고 6년간 복역했다가 최근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김철(81) 진실의힘 이사도 “대한민국의 현실이 그대로 보여 가슴이 아프다”고 했다. “먹고사는, 인간의 기본적인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추운날씨에 어찌 거리로 내쫓는지…. 아프지 않으려면 예방주사도 놔줘야 하지만 따뜻한 옷이나 이불도 필요하지 않나 싶고.” 주고 또 주고도 미안하다고 말하는 부모 마음과 닮았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예방접종을 맞은 쌍용차 해고노동자 김정욱(41)씨는 거리의 병원을 이렇게 평했다. “거리에서 투쟁하는 어려운 처지에 있는 노동자에게 마음을 보태려고 한걸음에 달려온 어르신들이다. 우리를 지켜보는 눈길에서 이미 큰 힘을 얻는다. 우리 사회가 가진 자들을 위한 사회가 아니라는 걸 체험하고 있다.”
“참 고마운 만남”이라고 박성희 진실의힘 사무국장은 응답했다. “지난해 예방접종 때 어떤 노동자가 그랬다. ‘진실의힘 선생님들의 삶에 견줘보면 우리의 어려움은 작은 모래알 같아요.’ 내 상처가 제일 깊고 내 짐이 가장 무겁다고 생각했는데 더 큰 상처를 견뎌낸 모습을 본 순간 거짓말처럼 제 자신의 어려움이 사소하고 가벼워진 거다. 그래서 그 노동자는 ‘결코 포기하지 않고 싸울 것’이라고 다짐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고문생존자들도 뿌듯해했다. ‘내 삶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 희망이 되고 다시 일어서게 하는구나, 우리의 삶이 헛된 것이 아니었구나.’”
하지만 그들은 내년을 기약하지 않는다. “만날 일이 없어야 하는데….” 헤어질 때 이렇게 인사를 나눈다. 모두 일터로 집으로 돌아가 겨울 독감 예방접종 프로젝트가 사라지길 바라니까 말이다.
고문생존자들이 놓는 희망 주사
진실의힘은 고문생존자들이 국가배상금의 일부를 내놓아 설립한 재단이다. 고문생존자 10여 명은 두려움과 치욕을 안겨준 고문과 수십 년간의 감옥살이, 간첩 낙인으로 인한 사회적 차별 등 온갖 고통을 견뎌내고 재심 재판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 그렇게 상처에서 돋아난 새 삶을 여전히 고통 속에 있는 다른 국가폭력 피해자들과 나누려고 진실의힘을 세웠다.
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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