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기타 만든 손으로 희망 코드를 잡다

공장에서 쫓겨난 뒤 밴드 만들어 노래하는 콜텍악기 노동자들 직장폐쇄 2천 일 앞두고 부르는 서럽고도 뿌듯한 싸움의 노래
등록 2012-06-27 14:20 수정 2020-05-03 04:26
‘콜텍악기 노동자들의 밴드’가 지난 6월20일 인천 부평구 갈산동 콜트공장 농성장에서 웃는 얼굴로 어깨를 겯고 있다. 이인근 지회장, 임재춘 조합원, 장석천 사무장, 김경봉 조합원(왼쪽부터)

‘콜텍악기 노동자들의 밴드’가 지난 6월20일 인천 부평구 갈산동 콜트공장 농성장에서 웃는 얼굴로 어깨를 겯고 있다. 이인근 지회장, 임재춘 조합원, 장석천 사무장, 김경봉 조합원(왼쪽부터)

“여행을 떠나요! 메아리 소리가 들려오는~.”

음악이 울려퍼진다. 4인조 밴드가 나와 기타를 치고 타악기를 두드린다. 실력은 서툴지만 듣는 사람, 부르는 사람 흥을 돋운다. 그런데 연주가 갈수록 묘하게 느려진다. 1절을 부르기도 전에 음악이 멈춘다. 연주 실수다. 방금 전까지 노랫소리가 요란하던 곳에 정적이 흐른다. 관객은 익숙하다는 듯, 박수로 그 간격을 메운다. 연주자들도 태연히 연주를 다시 한다. 자주 있는 일이다.

기타 소리 없는 기타 공장

이 미숙한 밴드는 결성된 지 6개월밖에 되지 않았다. 밴드 이름은 ‘콜밴’이다. ‘콜텍악기 노동자들의 밴드’의 줄임말이다. 대전에 자리한 (주)콜텍악기는 2007년 직장폐쇄를 했다. 이것이 위장폐업이라 주장하며 콜텍 노동자들은 싸우고 있다. 이들은 5년을 싸우는 동안 ‘기타 칠 줄 아냐’는 질문을 가장 많이 받았다. 콜텍은 기타를 만드는 회사다. 그럴 때마다 이들은 정색을 한다.

“우리한테 그럴 시간이 어디 있었어요?”

13년 전, 콜텍에 첫 출근을 한 김경봉씨는 생각했다. ‘제대로 찾아왔구나.’ 다니던 직장이 두 차례나 문을 닫아, 이곳이 마지막 직장이길 바라던 그였다. 다행히 회사 분위기가 좋아 보였다. 사람들이 출근 시간도 되기 전에 나와 알아서 일을 했다. 얼마나 가족 같은 회사이기에, 사람들이 더 일을 하지 못해 안달할까. 정문에서 출근하는 사람들에게 눈도장을 찍는 관리자들을 보지 못한 순진한 판단이었다. 얼마 안 가 그는 알게 되었다. 그렇게 서둘러 출근해도 제시간에 마치기 어려울 정도로 일이 많다는 것을.

도장 라인에서 근무하던 장석천씨는 입사하고 3개월이 지나 어이없는 질문을 받았다. “너도 여기 다니는 애냐?” 같은 회사 사람이 한 말이었다. 자신을 처음 본다고 했다. 작업 라인이 같지 않더라도 화장실 가다, 담배를 피우다, 밥을 먹다가 한 번이라도 인사를 나눴을 만한데 이 회사에서는 그것이 가능치 않았다. 화장실 가는 것조차 눈치가 보였다. 여성들의 경우, 아예 관리자가 화장실 가는 시간을 체크했다. 그는 유기용제 냄새가 가득한 작업장에 갇혀 하루 8∼10시간 일만 했다.

이인근씨는 이 공장에서 유일하게 노래를 흥얼거리며 일하는 사람이었다. 포장운반 라인이라 시끄러운 기계음도, 입을 열면 들어오는 톱밥 먼지도 없어 가능한 일이라며 다른 이들은 부러워했다. 그러나 그에게도 속사정이 있었다. 기타가 6개씩 담긴 상자 하나 무게가 20~30kg 나갔다. 바쁜 날은 종일 100여 개 상자를 들고 날랐다. 노래라도 들어야 살 것 같았다. 그는 음악을 좋아했다. 한때 화물차 운전사가 꿈이었다.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고속도로를 달리는, 그렇게 노래만 내리 들으며 사는 것이 꿈인 사람이었다. 그러나 가정 있는 몸이 제 꿈만 좇으며 살기는 어려웠다. 그는 기타 만드는 공장에 취직했다. 기타 만드는 공장이라고는 하지만, 기타 줄 튕기는 소리 한 번 들어본 적 없었다.

그들은 생각했다. 버티다가 못 버티면, 뭐 그만두는 거지. 그러고는 꿈도 감정도 자존심도 버리고 버텼다. 창문을 막은 공장 안은 늘 뿌연 먼지가 가득했다. 기침을 달고 살았다. 반질거리는 기타 표면처럼 지문이 닳은 노동자들의 손가락은 매끈했다. 각종 유기용제들이 폐를 갉아먹었다. 기침 소리, 톱날 돌아가는 소리, 관리자들의 욕설 소리가 뒤섞였다. 관리자들은 실없이 야한 농을 던지고, 노동자들은 그것을 웃으며 받아주어야 했다. 욕을 하면 들어야 했다. 쥐 죽은 듯 일해야 했다. 그래야 최저임금에 가까운 월급이라도 집에 가져갈 수 있었다.

30년 일했지만 하루아침에 등돌린 회사

더 이상 버틸 수도 나갈 수도 없던 이들은 노동조합을 만들었다. 당시 관리자인 임재춘씨는 노동조합을 만들려는 움직임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말리지도, 가입하지도 못하고 지켜만 봤다. 회사가 처음 만들어졌을 때, 몇백 대의 기타밖에 팔지 못한 시절부터 그는 콜텍 노동자였다. 30년이었다. 나이가 들어 관리자 자리에 올랐지만, 회사가 원하는 관리를 할 수 없었다. 화장실 드나드는 것을 감시하고, 서로 말 못 붙이게 이간질하는 것이 관리였다. 그렇다고 청춘을 다 보낸 회사를 그만둘 수도 없었다.

그런 그가 하루아침에 공장을 나와야 했다. 임재춘씨만이 아니었다. 모든 노동자가 그러했다. 2007년 콜텍은 문을 닫았다. 노동조합이 생긴 지 1년 만이었다. 출근을 하니, 경영상의 이유로 직장폐쇄를 한다고 적힌 종이쪽이 붙어 있었다. 경영이 어렵다는 회사는 지난해 87억원 순이익을 냈다. 직장폐쇄의 진짜 이유를 노동자들은 알았다. 노동조합이 있는 꼴을 보기 싫은 거였다.

노동자들은 부당해고라 주장하며 싸움을 시작했다. 그것이 5년 전 일이다. 이렇게 길게 갈 줄 몰랐다. 아내 없이 딸 둘을 키우는 임재춘씨는, 사춘기를 겪는 아이들을 두고 서울로 올라갔다. 같은 계열사이자 역시 파업 중인 콜트 공장에서 농성하기 위해서였다. 이제 큰딸은 대학 졸업을 앞둔 나이가 되었다. 부모가 필요했을 예민한 시기에 딸아이 곁에 있어주지 못한 것이 가슴에 맺혔다. 가족에게 면목이 서지 않았다. 아이들은 아빠가 너무한 것이 아니냐고 원망했다. 그래도 싸움을 크게 말리지 않는 것은, 아빠가 참 억울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30년을 근무했다는 임재춘씨는 딸에게 말했다. “한 직장에서 너무 오래 일하지 마라. 아빠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그 일밖에 모르는 사람이 된다.” 한 직장에서 30년, 달인이라고 칭해도 좋을 시간이었지만 하루아침에 등을 돌린 회사와 그 뒤로 겪어야 했던 무수한 일들이 그를 한탄하게 했다. 억울했고, 그래서 싸웠다.

“노동조합을 하기 전에는 사회문제에 관심이 없었죠. 일하다 보면 뉴스도 보기 힘들고. 알아도 내가 한다고 되겠느냐, 그런 생각이 있고. 그런데 노동조합을 하며 ‘아, 사회를 바꾸려는 사람들도 있구나’ 알게 된 거죠. 요즘은 아이들에게 위만 보지 말라고 해요. 아래 있는 사람, 그늘진 곳에 있는 사람도 보라고.”

이인근 지회장의 말처럼 면목 안 서는 아빠들이지만, 아이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것이 있다. 그들은 오래 싸웠고 조금씩 달라졌다. 변한 그들은 기타를 잡았다. 기타 본을 뜨고 사포질을 하던 손으로 코드를 잡았다.

7월23일, 2천 일 맞는 싸움

지난 1월, 콜밴은 첫 공연을 했다. 전날 새벽 3시까지 연습했다. 그런데도 다리가 후들거렸다. 뜨거운 조명은 비치지, 사람들 박수 소리는 요란하지, 장석천씨는 울컥 눈물이 났다. 많이 울었다. 서럽고도 뿌듯했다. 긴 싸움 동안 반복되던 감정을 그날 쏟아냈다. 그 뒤 6개월이 지났다. 콜텍 기타 노동자들의 농성은 계속되고 있다. 여전히 싸움은 서럽고, 뿌듯하다. 그들의 연주 실력은 나날이 나아지고 있다.

7월23일, 콜텍 노동자들의 싸움이 2천 일을 맞는다.

글 희정 제2회 손바닥문학상 당선자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