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매하다. 직업 활동가는 아닌데, 양식을 지닌 건전한 시민과는 더욱 거리가 멀다. 굳이 꼽자면 ‘전문 시위꾼’ 정도가 그의 정체에 가장 근접한 명칭일 터인데, 이 무겁고 건조한 치안 용어의 의미망으로 포획하기엔 그의 삶은 지나치게 가볍고 발랄하다. 그의 이름은 강성석(34)이다. 성스러운(聖) 돌(石). 순교자 가계의 내력이 담긴 이름이다.
반전집회서 ‘히피 퍼포먼스’하던 신학도
강성석을 처음 만난 건 2003년 봄이다. 이라크 파병 반대 집회 현장에서 심심찮게 마주치곤 하던 그는 진지하고 엄숙한 보통의 참가자와 달리 “좌지 부시, 꼴린 파월” 따위의 외설스런 구호를 외치거나, 기타와 플라스틱 말통을 두드리며 자작 반전 가요를 부르던 수상한 무리 안에 섞여 있었다. 그들은 대규모 집회 초반 초대가수의 공연이 있을 적이면, 요즘의 록페스티벌 행사장에서나 봄직한 과격한 춤사위로 행사장 한켠을 난장판으로 만들기도 했는데, 학교나 학과 단위로 모인 대학생 시위대는 이런 그들의 돌출 행동을 낯설고 불편해했던 것 같다.
무리를 주목하게 된 건 주말 집회가 한창인 서울 종로1가의 보도 위에서 심드렁한 구경꾼 몇몇이 지켜보는 가운데 벌인 ‘히피 퍼포먼스’를 목격한 뒤부터다. 일부가 길바닥에 주검처럼 드러눕고 몇몇은 가로 화단에서 따왔음직한 꽃잎을 그 위에 뿌리며 라디오헤드풍의 자작곡을 부르는데, 그 발상과 형식이 당시로선 제법 신선해 보였다. 퍼포먼스가 끝난 뒤 다가가 물었다. “정체가 뭐요?” “라라컬트요.” “뭣하는 곳이오?” “전위 문화예술 집단요.” 키가 큰 강성석은 무리 안에서도 단연 눈에 띄었다. 멋대로 기른 더벅머리에 숱 많은 검은 눈썹, 크고 서늘한 눈매가 인상적이었다.
노는 양이 흥미로워 종종 어울리며 술을 샀다. ‘라라’(Rara)라는 이름은 20세기 초반의 전위예술 집단 ‘다다’(Dada)에 대한 오마주라고 했다. 영화를 만들어보겠다며 한겨레문화센터 강의를 함께 들은 인연으로 모였지만, 그들의 관심은 영화보다는 집회현장에 나가 노래 부르고 퍼포먼스 하고, 모임 홈페이지에 글을 올리거나 함께 어울려 술 마시고 노는 데 있었던 것 같다. 강성석은 무리의 몇 사람과 영등포 신풍역 부근에 반지하방을 얻어 ‘코뮌 생활’ 비슷한 걸 했는데, 무리는 그곳을 ‘신풍교회’라고 불렀다. 임차권자인 강성석이 감리교신학대에 재학 중인 신학도였기 때문이다.
1년 남짓 이어진 그들과의 만남은 해가 바뀌며 끊겼다. 기자의 출입처가 바뀌고 때마침 결혼을 해 가정을 꾸리게 되자 그들과 어울릴 기회가 좀체 주어지지 않았던 탓이다. 라라컬트도 홈페이지 계정의 임대 기한이 만료돼 해체됐다는 후문이 들려왔다. 강성석도 라라컬트도 그렇게 기자의 기억에서 자연스럽게 소멸되는 듯했다.
재회는 우연하게 이뤄졌다. 지난 5월 환경재단이 제주 해군기지 시공업체인 삼성물산의 후원을 받아 서울환경영화제를 연 것이 논란이 일었고, 이 이 문제를 취재했다. 리슨투더시티라는 예술 프로젝트 그룹이 영화제 행사장 앞에서 1인시위를 펼쳤는데, 사진기자가 찍어온 현장 사진에서 낯익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강성석이었다. 연락처를 수소문해 그를 만났다.
강성석은 그대로였다. 집회·농성 현장을 유랑하며 놀고 노래하고 싸우는 게 일상이었다. ‘라이엇구로’(@riotguro)라는 트위터 계정으로 사회적 발언을 쏟아내는 데도 열심이었다. 허풍기도 여전해 “이 동네선 나도 제법 유명인사”라며 으스댔지만, 확인해본 그의 트위터 팔로어는 800명이 조금 넘는 수준이었다.
먹고 노는 동안 석사 학위 받기도
라라컬트가 해체된 뒤 강성석은 ‘투쟁과 밥’이라는 모임을 만들어 각지의 점거 농성을 지원하는 일에 뛰어들었다고 했다. 큰 집회가 열리면 모금함을 돌려 돈을 모으고 현장에 들어가 밥 짓고 노는 게 일이었다. 뚜렷한 소속도 없는 이들이 도움을 자청하고 나서자 현장에서도 처음엔 의심스런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변변한 족보도 없는 놈들이 밥해주겠다며 들어오니, 대부분 ‘이 날나리들 뭐야?’ 하는 분위기였다. 경건해야할 농성장에서 슬리퍼 신고 돌아다닌다고 핀잔도 많이 먹었다.”
2004년 명동성당 이주노동자 농성, 경기도 고양시 풍동 철거현장을 드나들며 먹고 놀고 공연했다. 풍동에서는 망루 안에 PC방을 만들어 ‘온라인 투쟁’의 신기원을 열었다고 강성석은 자랑했다. 철거용역과 대치하는 와중에 빈 건물 벽에 불법 다운로드 받은 영화를 빔프로젝트로 쏴가며 영화제를 열기도 했다. “거창한 이상이나 신념 때문에 들어간 게 아니다. 이라크전 반대 집회가 잦아들고 마땅히 놀 데가 없으니까 새로운 놀이터를 찾아 들어간 거지.” 그의 농성 이력은 미군기지터 조성을 위해 강제 철거에 들어간 경기도 평택 대추리의 빈집 점거 현장으로 이어졌다. 일주일에 하루이틀은 대추리에 들러 먹고 자고 노래하고, 빈 땅에서 푸성귀를 가꿨다.
인상적인 것은 그사이 강성석이 신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는 사실이었다. 2008년 감신대 대학원에서 기독교 아나키즘에 관한 논문을 썼는데, 강성석의 말로는 국내에서 이 분야 연구로는 자신의 것이 최초라고 했다. 신학도와 무관한 삶을 살던 그가 뒤늦게 학구열을 불태우게 된 배경이 궁금했다. “6년이나 다닌 대학을 졸업하게 되자, 목사인 아버지는 생활비 지원을 끊으려고 했다. 계속 돈을 타내려면 대학원 가는 것 말고 방법이 없었다. 기왕 신학대 물 먹은 거, 그럴듯한 논문이라도 한 편 써보자는 욕심도 있었다.”
대학원을 마치자 결국 집안의 경제적 지원이 끊겼다. 유학을 준비한다는 거짓 핑계로 돈을 타내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일자리를 구했다. 카드회사 콜센터의 야간상담 업무였다. 하루 일하고 하루 쉬는 격일제였다. 벌이는 괜찮았지만 스트레스가 심했다. “술 먹고 카드 결제가 안 된다며 다짜고짜 욕설을 퍼부어대는데, 8개월이 지나니 더 하다간 미쳐버릴 거 같았다.”
2011년 초부터 ‘래디컬 잉여’의 생활이 다시 시작됐다. 실업급여를 받으며 철거반대 투쟁이 한창인 서울 명동 마리 농성현장에 들어갔다. 반은 장난 삼아 ‘명동해방전선’이란 모임을 만들어 농성장에서 아나키즘 세미나를 열었다. 그해 여름 희망버스 행사를 앞두고는 2인조 밴드를 급조했다. ‘바리케이트 톨게이트’라는 이 밴드에서 강성석은 카주(kazoo)를 분다. 보컬도 연주도 특출난 게 없어서다. 어느 정도 이름이 알려져 이제는 부르는 곳이 꽤 된다고 했다. 밴드 자작곡이 대여섯쯤 되는데 제목이 이런 식이다. ‘내가 너에게 차마 말할 수 없는 게 있다’ ‘미식가가 되자’ ‘내가 널 설마 좋아하나봐’. 그는 이 래퍼토리를 갖고 경기도 양평 두물머리 농성장, 명동 잡년행진, 5·1 총파업 등에서 공연했다.
“삥 뜯으며 재밌고 치열하게 살겠다”
“30대 중반인데, 불안하진 않나?” 강성석에게 물었다. 답변이 단호했다. “어차피 뭘 해도 기성세대에게 허락된 삶을 우린 못 누린다. 그래서 그 사람들 것 ‘삥’ 뜯으면서 재밌고 치열하게 살기로 했다. 잉여, 백수라고 손가락질해도 좋다. 난 한 점 부끄럼이 없으니까.”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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