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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작가’라는 이름보다 ‘기록노동자’라 불러주오

더 힘든 현장만 찾아 기록하는 르포작가 서분숙·이선옥·이혜정씨 트위터에 답우물 성명서 내고 기록노동자 선언한 그들의 삶과 노동
등록 2012-12-15 01:15 수정 2020-05-03 04:27

요즘 트위터에 성명서가 돈다. 성명서 글자 수가 110자 이내다. 성명서(트윗에서 ‘답우물’로 검색)가 짧다니 이상하고, 내용도 희한하다. 성명서 이름조차 생소하다. ‘답우물 성명서’라 불리는 글의 일부를 가져와 본다. “기록노동자들의 노동자 선언은 계속됩니다. 답답한 이가 우물을 판다! 답우물 성명서에 함께 해주세요.”

트윗에서 ‘답우물 성명서’를 내고 노동자 선언을 한 기록노동자 이선옥, 이혜정, 서분숙(왼쪽부터)씨가 11월29일 서울 마포구 서교동 카페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김명진 기자

트윗에서 ‘답우물 성명서’를 내고 노동자 선언을 한 기록노동자 이선옥, 이혜정, 서분숙(왼쪽부터)씨가 11월29일 서울 마포구 서교동 카페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김명진 기자

 

“썼는데 사람들이 르포라 부르더라”

이 짧은 성명서가 트위터에 퍼지기 전, 기록노동자라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내게는 그다지 생소한 이들은 아니었다. 나 또한 기록노동자이기 때문이다. 기록노동자를 설명하려면, 역시나 익숙지 않은 ‘르포 작가’라는 말을 가져와야 한다. ‘르포르타주 작가’의 줄임말이다. 사람들은 묻는다. 르포르타주는 뭔데? 기록문학. 다시 묻는다. 무얼 기록한다는 건데? 사람들의 말과 일, 그리고 그들의 삶. 또 묻는다. 인터뷰야?

나는 그 대답을 여기 모인 사람들에게 듣기로 했다.

어떤 일들을 기록하는가. 그것은 때로 ‘나’를 적어 내려가는 것으로부터 시작되기도 한다. 서분숙씨는 말한다.

“원래 시를 썼거든요. 백무산 선생님을 20대 때부터 만났는데, 제 시를 보시고 아무 말씀도 안 하시고 ‘왜 이러니, 다시 살아라’ 그러시더라고요. 그게 답이었는데, 그 이야기 듣고 힘들었어요. 마음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어요.”

노동시인 선배에게서 들은 그 짧은 말이 기존 삶을 무너뜨렸다. 어떻게 다시 살아야 하는가. 스스로에게 묻는 데 12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세월 동안 글을 쓰지 않았다.

“마흔이 되고 나서 어떻게 살아야 하나 싶은 게… 글을 늘 쓰고 싶었거든요. 일주일 정도 휴가가 주어져서 방문을 잠그고 혼자 틀어박혀 쓴 게, 그게 기록글이었어요. 제가 살아온 이야기인데. 전태일문학상에 공모해서 당선됐어요. 그때는 그게 기록글인지 르포인지 전혀 몰랐고요.”

전태일문학상이란 전태일 정신을 담은 문학을 발굴한다는 취지에서 만들어진 상이다. 그 상을 받은 뒤 서울 걸음을 하게 되고, 몇 해 전부터 제도권 언론이 다루지 않는 사건과 사람들을 기록하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것이 르포였다.

“나는 아직도 내가 르포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갖고 있는지 모르겠어.”

다른 이가 입을 열었다. 쌍용자동차 해고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사건으로 ‘무명세’를 누리는 이선옥씨다. ‘무명세’란 의자놀이 논쟁 과정 중 진중권씨가 ‘무명의 작가’라 그녀를 지칭한 까닭에 만들어진 말인데, 유·무명 상관없이 선옥씨는 그저 기록하는 사람이다.

“르포를 쓴다고 하고 시작한 건 아니에요. 썼는데 사람들이 르포라 불렀던 거고. 르포 작가라는 명함은 취재할 때 나를 설명할 말이 없으니까, 그 사람은 나를 처음 보는데 나는 기자도 언론인도 아니니까 소개하기 위해 들고 다니는 거지.”

 

배제, 소외, 이면을 기록하는 르포

이라는 잡지에 생활글을 연재하던 중 현대자동차 사내하청 노동조합의 안기호 위원장 인터뷰를 부탁받아 쓰게 된 것이 일의 시작이다. 외환위기가 지나고 비정규직이 급격하게 늘어났다. 정부와 기업은 노동이 유연화되지 않으면 나라가 죽는다고 했다. 하지만 진짜 죽어난 것은 비정규직 노동자들. 죽지 않으려고 노동조합을 만들었고, 현대자동차 사내하청 노동자들도 그러했다.

써오던 생활글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생활글을 쓸 적부터 그녀의 관심은 부당함에 맞서 싸우는 사람들이었다. 이후 그녀가 찾는 곳은 되도록이면 남들이 가지 않는, 상대적으로 더 어려운 처지의 현장이다. 텔레비전, 라디오, 신문, 요사이 인터넷 언론까지 매체가 넘친다 해도 그 공간에 자기 이야기 한 줄 못 올리는 이들이 있다. 아니 많다.

이혜정씨도 그런 이들에게 더 눈이 간다고 했다. 지난해 희망버스의 열기로 영도 앞바다가 뜨거웠을 때, 그녀도 부산을 찾았다. 하지만 그녀가 본 것은 85호 크레인 높은 저편이 아닌, 아무도 찾지 않던 한진중공업 하청노동자들이었다.

“비정규 노동자들이 거기 있다고 들었고, 그래서 취재했는데… 정말 놀랐어요. 비정규 노동자들 정말 개처럼 살고 있거든요. 일용직으로 고용되고, 하루 만에 해고되고. 며칠 뒤에 ‘다시 너 나올래?’ 그럼 다시 나가서 일하고. 그런 식으로 엉망진창인데, 한진에는 정규직 노동자들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걸 다 아는데, 아무도 그들 이야기를 하지 않는 거예요.”

정규직마저 그리 맥없이 쫓겨나는 것을 본 하청노동자들이다. 어디 숨소리라도 제대로 낼 수 있었을까. 인터뷰에 응한 하청노동자는 골목을 돌고 돌아, 더 멀리 더 깊숙한 곳에서 이야기를 나누기 원했다. 그들이 있는 곳은 그렇게 그늘이고, 어둠이었다.

“배제는 어디서나 이뤄지는데. 그걸 찾아서 남기는 게, 어디든 그게 기록으로 남았다는 게 중요하지요.”

선옥씨의 말처럼, 배제·소외·이면을 기록하는 것이 르포다. 말할 수 없던, 말해지지 않던 이들을 만나러 간다. 하지만 이들과 마주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기도 한다. 분숙씨는 취재를 갔다가 쫓겨난 경험을 말해준다. 예인선 노동자들을 만나러 갔을 때다.

“뱃사람들이라고 해서 험악하거나 이렇지 않거든요. 원양어선 타시는 분들은 6개월 동안 홀로 바다에 있어 굉장히 섬세하고 눈물도 많으신데….”

그 섬세한 이들이 그녀를 쫓아냈다. 언론에 대한 강한 불신 때문이었다. 너희 어차피 듣고 싶은 이야기만 듣고 갈 거잖아. 일부 언론이 예인선 노동자들의 파업을 취재해놓고 돌아서서 회사 입장을 기사로 내보낸 뒤였다. 하지만 그녀는 버텼다. 정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언론사 차가 오면 얻어타고 들어가길 반복했다. 결국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배 타는 직업 중에서 출퇴근하는 데는 여기밖에 없으니까. 배운 건 이거밖에 없고, 예인선 타면서 벌어놓은 것 다 까먹고, 배만 탔으니 세상 물정 모르고. 여기 있는 사람들 대부분 다 그래요. …출퇴근하고 가족들 같이 있고, 그거 하나예요. 그것 하나 때문에 모든 것 다 감수하고 사는 거예요.”(‘파업 현장에서 만난 예인선 노동자들’ 중)

분숙씨는 그때 기억을 더듬으며 나직이 말했다. “그래, 그 일은 해낸 거 같아.”

해냈다는 것은 거절에도 불구하고 인터뷰를 따냈다는 말이 아니다. 불신으로 벽을 친 뱃사람들의 마음을 연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런 그녀이기에 논란 당시, ‘인터뷰에 저작권이 어디 있느냐’는 주장을 보며 생각했단다.

지난 8월6일 서울 정동 덕수궁 대한문 쌍용자동차 분향소에서 3년 만기 출소한 한상균 전 쌍용차 노조 지부장이 사망한 해고노동자의 영정에 절하는 모습을 기록노동자와 기자들이 취재하고 있다. 한겨레 김태형 기자

지난 8월6일 서울 정동 덕수궁 대한문 쌍용자동차 분향소에서 3년 만기 출소한 한상균 전 쌍용차 노조 지부장이 사망한 해고노동자의 영정에 절하는 모습을 기록노동자와 기자들이 취재하고 있다. 한겨레 김태형 기자

 

성실한 기록이 주는 연대의 힘

“아, 이 사람은 상대방의 눈을 마주하고 하는 인터뷰를 모르는구나. 설사 인터뷰를 했다 해도 그건 르포 작가들이 하는 방법과 달랐겠구나. 인터뷰이에게 진정으로 감정이입한 적이 한 번이라도 있다면 그런 말은 나오지 않을 텐데….”

그녀는 자기 이야기를 한다.

“요즘 재래시장 노점 상인들을 취재하는데, 새벽시장에 한번 갔어요. 새벽 3시에. 자기 밥벌이를 해결하는 수단으로 노인들이 노점을 많이 하세요. 그 할머니는 여기서 50년을 하신 분이야. 밤에 물건을 내리고 아침 10시까지 장사하고, 가서 집안일하고 조금 자다가 밤에 다시 나오고. 새벽에 늘 깨어 있는 거야, 50년을. 캄캄한 새벽에. ‘새벽에 여기에 나와 계시면 어떤 생각이 나세요?’ 하니, ‘생각이 많이 나지’ 하셔. ‘어떤 생각이 나세요?’ 물으니까 가만히 있어요. 한참을 생각하시더니… 외로워. 너무 외로워.”

인터뷰이의 마음 저편에서 말이 올라오기를 기다리는 시간, 침묵이다. 한때 그 침묵이 못 견디게 힘들었다는 분숙씨는 이제는 기다릴 수 있는 힘이 생겼다고 한다. 외롭다는 노인의 말을 받아들일 수 있는 힘을 키우려고 무던히 노력했다. 자신을 돌아봤다. 타인의 말을 들으려면 내 안의 말에 귀기울여야 함을 알았다. 그것은 문학치료 공부로 이어졌다.

르포는 홀로 하는 작업이다. 인터뷰이의 입을 열게 한 것도, 그 말들을 듣는 것도 ‘나’이다. 나 홀로 그 책임을 져야 한다. 서너 시간 쏟아낸 말들을 원고지 20~30장으로 추리는 것도 쓰는 이의 몫이다. 말들을 받아 적어내리며 아파하는 것도, 극복하는 것도 자신의 몫이다.

또한 함께하는 작업이다. 서울 용산 참사 당시, 글쓴이 15명이 철거민 15명의 삶을 기록한 책 작업을 선옥씨는 함께했다.

“시간이 촉박해 굉장히 거칠게 나온 책이지만, 철거민들이 집회 현장마다 그 책을 들고 다니는 거예요. 그걸 보는데… 아, 이런 식으로 연대할 수 있구나 하고 굉장히 기뻤거든요.”

르포문학은 성실히 기록하는 장르다. 그리고 그 성실한 기록이 주는 연대의 힘이 있다. 가벼운 웃음, 한때의 유행, 멋들어진 수사가 아닌 사실의 힘으로 타인을 만나는 글이다. 그런데 르포 작가들이 발 빠르게 글을 써내고, 시의성 있는 연대를 보여주는 것이 쉽지는 않다. 르포가 품이 많이 드는 작업인데다, 다들 생활이 녹록지 못해 아르바이트를 겸하는 현실 때문이다.

사람을 만나고 취재하고 녹취 풀고 글을 쓰는 복잡다단한 과정을 거치지만 원고료와 작업비는 거의 지급되지 않는다. 남들이 꺼리는 이야기를 찾아 쓰는 것이 르포인지라 흔히 말하듯 ‘돈이 되지’ 않는다. 싸우는 현장, 없는 형편의 이야기를 쓰는지라, 어떤 대가를 요구할 수 없기도 했다.

선옥씨는 말한다. “우리가 남의 노동 이야기 하며 우리 노동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은 책임이 있는 거지.”

그리고 덧붙인다. “예전에는 ‘인정’이라기보다 ‘존중’이라는 단어를 계속 썼거든요. 그런 이야기 많이 했었는데… 이제는 인정도 받아내야 할 것 같아요.”

 

‘작가’라는 불편한 이름을 벗고

그 인정을 어떻게 받아낼까? 모인 이들은 노동자 선언으로 그 시작을 하자고 한다. 답답한 우리가 우물 파는 마음으로 선언을 한다 하여, ‘답우물 성명서’다. 용산 철거민들이 참 당연한 말인 ‘여기 사람이 있다’를 외쳤던 것처럼, 이제 이들은 ‘우리 노동을 하고 있다’라고 외친다. 더 나아가 노동자의 당연한 권리인 노동조합까지 꿈꾼다.

유명과 무명으로 나뉘는 ‘작가’라는 불편한 이름을 벗고, 오직 성실하고 진정 있는 기록을 하는 ‘기록노동자’ 선언이 시작되었다.

희정 기록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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