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울루 코엘류의 에서 여행자 산티에고가 매료된 언어는 에스페란토였다. 새해 첫 달, 올해의 공휴일 수를 따지며 한해의 계획을 잡노라면 과감하게 끼워넣는 것 중 하나가 여행이다. 그쯤은 하고 살아야 한다 싶지만 대부분은 그저 바람으로 끝나고 마는 여행. 산티에고를 생각나게 하는, 생애 최초로 외국 여행을 다녀온 고등학교 2학년 청소년을 만났다. 부모는 다음을 기약하거나 노후에 가겠다 막연하게 미루더라도, 자녀에게는 어학연수든 유럽 여행이든 외국으로 보낼 기회를 마련하는 일이 공공연해진 요즘이다.
프랑스, 독일 10여개 도시 다녀
김융(18)군은 지난해 10월부터 45일간 독일과 프랑스 두 나라의 10여 개 도시를 다녀왔다. 대부분 홈스테이 방식의 생활이었고, 언어는 에스페란토를 사용했다. 다녀온 도시의 이름을 일일이 대가며 대단한 양 말하고 싶지 않아서 인터뷰를 망설였단다. 패키지 여행이나 어학연수, 수학여행 등 이미 일반화돼버린 학생들의 여행 방식이나 내용과 자신의 이번 여행은 다르다는 말을 에두르고 있는 것 같았다. 여행한 곳을 줄줄이 나열해야 하는 식의 수고를 끼치지 않겠노라 약속하고 인터뷰를 시작했다(그의 말과 달리 참고가 될지 모르겠다며 보내준 자기 기록에는 도시와 사람들에 대해 꼼꼼하게 적혀 있었다).
어떤 계기로 여행하게 되었나.
내가 다니는 충북 괴산의 ‘느티울 행복한 학교’에서 국제어 에스페란토 교과를 두 학기 동안 배웠다. 한국인 초록강 선생님과 프랑스인 미셸 선생님이 가르쳐주었는데, 미셸 선생님과는 인터넷 전화 프로그램 ‘스카이프’로 연결해 수업 시간에 함께 대화를 나누며 공부하는 방법이었다. 처음 수업 때 정말 신나고 흥분됐다. 외국인, 특히 백인에 대한 신기함도 있었고, 어설프지만 직접 말로 소통할 수 있다는 게 신선했다. 함께 수업을 들은 10여 명의 친구들과 그렇게 배운 언어로 여러 외국 사람들을 직접 만나고 소개받고 그들의 집에도 머물며 소통하는 수학여행을 시도한 거였다. 에스페란토는 소유국이 없는 언어다. 자국민끼리는 자국어로, 외국인과는 어느 나라 사람을 만나든 에스페란토로 통용한다.
한국 아이들과 선생님이 프랑스인 선생님과 한국어도 프랑스어도 영어도 아닌 제3의 언어로 공간의 제약을 넘어 매주 만나는 일은 꽤 재미있을 것 같았다. 두 학기 수업으로 과연 외국어 습득이 가능한지 궁금했다. “제 에스페란토 실력이 심오한 대화가 가능한 정도는 아니어서 잘하는 분도 많은데 제가 이런 인터뷰에 나와도 되나 망설였어요. (웃음) 수학여행 계획이 잡히고 여행 가기 전 한 달은 저희끼리 매일 공부했어요. 그렇게 회화의 기본적인 준비 정도는 해가지고 갔죠.”
직접 본 외국 도시의 첫인상은.
가장 먼저 간 곳은 에스페란토 시티로 알려진 독일의 헤르츠베르크였다. 거기에 에스페란토 센터가 있다. 센터라고 해서 직원들이 몇십 명씩 일하는 그런 규모가 아니라 작은 비영리 단체다. 정부의 자금 지원도 받지 않는다. 센터장 조피아는 중년의 헝가리 여성이다. 그와 센터에서 함께 일하는 페트로라는 분이 우리를 따뜻하게 환영해주었다. 센터에는 에스페란토에 관한 자료가 가득 차 있다. 유명한 프랑스 만화인 도 에스페란토로 번역돼 있었다. 한국말로 된 책도 있어서 반가웠다. 우리는 센터를 근거지로 하고 다른 도시 사람들을 만나러 가고, 초대받아 그들의 집에 묵고 서로 요리를 만들어 함께 식사도 했다. 센터장과 페트로, 센터에서 에스페란토를 가르쳐준 에바, 에바의 딸 에스테라, 특이한 슈테판, 친절한 에리카 등이 주로 함께했다.
에스페란토 사용자들 곳곳에서 도움
가까이에서 같이 생활해본 외국 사람들에 대한 느낌은.
에스페란토 여행답게 다양한 사람을 고루고루 만났다. ‘사람’은 이번 여행의 핵심 중 하나다. 어떤 장소를 갈 때마다 에스페란티스토(에스페란토 사용자)들이 도움을 주었다. 그들과 더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실력이 부족해 그러지 못한 점이 아쉬웠다. 유럽은 개인주의가 강한 편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오히려 ‘이런 것도 신경 써주네. 개인주의 나라 맞아?’라고 생각할 때가 많았다.
에스페란토 사용자가 한결같이 친절한 것만은 아니다. 모자란 실력으로 단어를 세심하게 조합해 질문했는데 ‘예’ ‘아니요’라고만 말하는 닐스 같은 사람도 있다. 그는 30대 초반의 호텔 요리사다. 베를린 여행을 같이 하며 친해졌는데 무뚝뚝한 성격을 다른 사람들이 안 좋게 생각하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었더니, 자신은 시간을 두고 사람과 친해진다며 친해지기까지 자기 방식대로 대한다고 했다. 그걸 나쁘게 본다 해도 ‘상관없다’는 말을 듣고, 외국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어떻게든 말을 걸려고 하는 나를 뒤돌아보게 되었다. 같이 대화하는 에스페란티스토들에 대한 배려와 예의라고 생각해서 적극성을 보였지만 스트레스를 받는 것도 사실이었다. 닐스를 보며 그게 뭐든 아무렴 내가 행복해야지 싶었다. 그렇게 무뚝뚝한 닐스는 선뜻 휴가를 내고 우리의 베를린 여행을 도와주었다. 매력적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상적인 일들이 있다면.
한국에서 학생들이 왔다는 에스페란토 센터의 알림에, 대부분의 수업을 독일 학생들과 같이 들을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어준 학교들이 있었다. 정말 큰 행운이었다. 대안학교를 다니는 나는 교육에 관심이 많은 편이다. 다 비슷한 머리를 하고 똑같이 허연 교복을 입은 우리나라 학생과, 코와 눈썹에 피어싱을 하고 형형색색의 화려한 옷을 입은 독일 학생들은 확실히 대조된다. 친구 중 한 명은 그곳 학교에서 알게 된 미모의 독일 여학생에게 호감을 표했는데 우연히 길에서 그 여학생이 담배 피우는 것을 보고 싫어졌다는 재밌는 일도 있었다. 수업 참관도 하고 체육 수업 때 같이 뛰기도 하며 학생인권조례로 교권이 무너진다 어쩐다 하는 우리나라의 일이 생각나기도 했다. 초등학교 3학년 학생이 예술 수업에서 빔프로젝터를 이용해 읽은 책을 소개하는 것과 발표와 대화만으로 대부분의 수업이 이루어지는 정치 수업도 흥미로웠다. 이번 여행에서 알게 된 세바스찬을 통해 가본 엠덴대학 강의실에서 갓난아기를 안고 강의를 듣고 있는 젊은 여자도 꽤 인상적이었다.
에스페란토를 1년 정도 공부했다. 긴 외국 여행에서 소통은 원활했는지.
아니다. (웃음) 대화는 물론 문화적 공유, 자기 세상과 안목을 넓힌다는 취지의 여행이었지만 준비가 미흡했다는 아쉬움이 있다. 그렇지만 에스페란토를 쓰는 사람들은 친절해서 사전을 찾는 동안 기다려주고 말을 끄집어낼 때까지 눈을 맞추고 함께해주었다.
깊게 소통하는 방법 배워
에스페란토와 영어·일어 등 알려진 외국어의 차이는 무엇인가.
에스페란토는 합리적이고 공평한 느낌의 언어다. 나 역시 처음 접할 때 이 언어가 과연 내 삶에 이윤이나 도움이 될 수 있을까를 생각했다. 그 이윤이나 도움이란 다른 게 아니라 ‘돈’이 되나 하는 판단에서 오는 불안 같은 것이다. 취직에 도움이 될까, 시험이나 점수에 도움이 될까 그런 게 따지고 보면 ‘돈’과 연관 있다. 그런 이득이 없는 에스페란토는 평등한 소통을 하겠다는 기본 취지에 공감을 해야만 배우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 욕심 없는 사람들이 ‘한번 걸러지는 장치’를 에스페란토가 하는 셈이다.
이번 여행의 경험으로 볼 때 현실에서 에스페란토의 쓸모는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나.
쓸모 있다. 쓸모라는 표현이 좀 그렇지만 ‘쓸모 좋다’고 할 수 있다. 진실한 인간관계를 맺기에 좋은 기반이 된다. 에스페란토를 쓰는 사람들끼리는 주로 여행자에게 자신의 집과 음식을 제공하는 홈스테이가 일반적이다. 그 언어를 선택하고 배워서 사용한 것만으로도 기본적으로 유대감 같은 게 형성된다. 우리나라에서 보통 경험하거나 생각하는 외국 여행과는 다르다. 사람들과 깊게 소통하고 조율하고 배울 수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눈으로 보면서 따라만 다니는 여행이 아니라 생활에서 직접 소통하고 사귐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장기간 여행이니 경비가 많이 들었을 것 같다.
유럽 물가가 무시무시하다. 그건 환전할 때부터 뼈저리게 느꼈다. 학교에 낸 수학여행비 외에 사비로 쓸 용돈도 내 나름으로 거하게 25만원, 155유로를 들고 갔다. 철물점에서 일해 번 돈이다. 난생처음 번 돈이 다른 문화를 접하는 데 쓰인다고 생각하니 뿌듯했다. 독일 물가는 비쌌지만 주식으로 먹는 빵과 잼, 햄이나 유제품은 우리나라보다 훨씬 싼 편이었다. 게다가 여행 중 우리는 하루 두 끼는 센터 등에서 해먹는 게 원칙이었기 때문에 식비로 많은 지출이 나가지는 않았다. 우리나라에서는 동전이 500원이지만 유로 동전은 우리 돈으로 1600원이다. 동전을 그렇게 소중히 다룬 건 처음이다.
가장 재밌었던 일은 무엇인가.
초록강 선생님의 친구가 사는 프랑스 마을에서 또래 아이들과 어울릴 기회가 있었다. 처음엔 말도 잘 못 섞고 주춤거렸다. 우리나라 아이들과도 처음 만나면 어색한데. 그들은 에스페란토를 배운 학생도 아니었다. 에스페란토로 신체 부위를 알 수 있는 고리타분한 게임을 한 뒤 무대가 만들어졌다. 처음엔 안경 쓴 아이 하나가 통기타를 들고 와 연주했다. 군가 같은 분위기의 프랑스 노래를 아이들이 따라 부르자 점점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우리는 춤과 택견 공연으로 답했다.
갑자기 아이들이 의자를 한구석으로 치우더니 불이 꺼지고 화려한 조명이 어둠을 밝혔다. DJ는 우리가 머물던 집의 아들인 알렉시였다. 꿈이 연극 조명연출자라고 말한 적 있었다. 빠른 비트의 클럽풍 노래가 나오자 아이들은 가운데로 모여 미친 듯이 흔들었다. 원의 가운데에서 잘 추는 아이들이 화려한 개인기를 보여주고, 못 추는 아이들은 손을 잡고 그저 돌기만 했다. 서로 목마를 태워주고 피라미드를 쌓기도 했다. 언어는 안 통하지만 목청껏 추임새를 넣고 소리 지르는 등 광란의 장이 따로 없었다. 저녁부터 밤 12시까지 미친 듯이 흔들어댔으니 다음날엔 모두 파김치가 돼버렸다. 아마 우리나라에서 그런 식으로 놀면 문란하다는 부정적인 취급을 받을지 모른다. 춤이나 음악 같은 문화의 역할이 대단하다는 것을 경험했다.
독일 작은 마을 호수가 준 선물김융군은 독일의 작은 마을에 있는 조용한 호수를 처음 보았을 때 의외의 선물을 받은 것 같았단다. 어느 하루 호수의 벤치에 앉아 책을 읽었는데 그때 본 호수의 아름다움에 감탄했다. 얼핏 들어도 낯선 나라에서 사람들과 부딪치며 보낸 45일의 일정이 여유로울 리 없었다. 설혹 시간이 많다고 해도 호숫가에서 책을 읽고 그 빛깔을 느끼는 외국 여행을 할 수 있는 청소년은 드물 것이다. 우리는 현실에서 힘든 일이 닥치거나 쉬고 싶을 때 여행을 꿈꾼다. 누구에게나 그렇듯 훗날 김군에게 그런 날이 오면 이번 여행의 추억과 만난 사람들의 기억은, 쇼핑과 관광명소를 찍어주는 대로 구경하고 오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자양이 되지 않을까.
글 신수원 제1회 손바닥 문학상 수상자
사진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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