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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월곡동 성가복지병원의 호스피스 병동에서 지난 11월 한 달 동안 자원봉사자로 일했다. 7층 병동에서 환자들은 쉼없이 머물고 떠났다. 처음 호스피스에 갔을 때 8명의 환자가 있었고, 한 달 동안 7명의 환자가 새로 들어왔다. 이 가운데 12월17일까지 7명이 사망했다. 3명은 각자의 사연을 가지고 병동을 떠났다. 그렇게 15명을 만났다.
가까이에서 본 성가복지병원 7층은 세상의 축소판이었다. 오는 이가 있고, 떠나는 이가 있었다. 아픈 이가 있고, 사랑하는 이가 있었다. 모든 이들은 죽음을 향해 한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반대편으로 걷는 이는 아무도없었다.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가난한 이들에게 죽음은 약간 더 빠르게, 아프게 다가왔다. 몇몇에게는 이미 죽음이 문득 지나쳐 ‘과거’로 멀어졌다.
‘생명 OTL- 빈곤과 죽음의 이중나선’ 기획의 첫 회는 호스피스에서 세상을 등진 5명의 이야기였다. 이번에는 남은 10명의 사연이다. 첫 회 기사를 쓴 뒤 이들 가운데 2명의 부음을 들었다. 707호 창가에 누워 있던 이승호(65·가명)씨와 병원에 잠시 머물렀던 조미희(60·가명)씨다. 이들의 명복을 빈다. _편집자
이승호(65·가명)씨의 눈은 먼 곳을 향했다. 707호 창가 침대에 누운 그의 시선이 허공을 떠도는 동안, 입을 다문 시간은 길어졌다. 그는 지난 4월 담낭담도암 판정을 받았다. 암세포는 주변 장기로 퍼졌다. 간호사와 자원봉사자들에게 가벼운 농담도 자주 보내던 이씨였다. 그의 몸 상태는 침몰하는 배처럼 바닥으로 내려앉고 있었다. 기자가 그를 처음 만난 11월1일, 그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다가가 말을 걸었다. “죽어야지.” 그가 중얼거리듯 말을 던졌다. “이렇게 살아서 뭐하나. 일찍 죽는 게 낫지.” 그의 얘기을 들으면서, 그의 누이가 한 말이 생각났다. 그는 말이 무거운 사람이었다. 그가 오렌지를 한 개 달라고 해서 여유 있게 두 개를 들고 가면 하나는 다시 돌려보냈다. 표현이 분명하고, 행동도 분명한 사람이었다. 그가 말을 이었다. “더 이상 살 이유가 없어.” 그의 슬픔은 깊었다. 공감을 하기에 버거웠다. 그저 그의 옆을 오래 지켰다.
산재로 발가락 잃고 골수암, 결핵까지
저녁 식사가 도착했다. 간호사가 식사를 가져왔다. 소화 기능이 떨어진 그를 위해 가져온 것은 하얀 미음과 건더기 없는 어묵 국물, 김칫국물이었다. 그에게 미음을 떠먹였다. 다른 국물은 거의 마다했다. 미음만 간신히 떠먹은 그는 고개를 돌렸다. 식욕이 없어 보였다. 칫솔을 내밀었지만, 나중에 닦자고 했다. 모든 의욕을 잃은 표정이었다.
그는 하반신 장애인이었다. 생후 10개월에 소아마비를 앓은 결과였다. 지체장애 1급이었다. 유복하지는 않았지만 교양 있는 가정에서 자랐다. 초등학교에서 학력은 멈췄다. 당시에는 그를 받아줄 마땅한 장애인 학교가 없었다. 집에서 어머니가 중학교 이상 과정을 가르쳤다. 나이가 들어 납땜 인두를 만드는 공장에서 생산직으로 오래 일했다. 서울 변두리 공장을 개조된 오토바이를 타고 오갔다. 1988년에는 오토바이 사고가 났다. 사고 후유증으로 한동안 기억상실증에 시달렸다. 기억을 간신히 회복하면서 새로운 일자리를 구했다. 서울 성수동 길거리 옆 1.5평 열쇠 가게가 그가 찾을 수 있는 유일한 일터였다. 그렇게 20년 열쇠를 깎으며 지냈다. 흔히들 구두 수선도 함께 했지만, 장애 때문에 그럴 만한 여력은 없었다.
옆방인 706호의 서창호(49·가명)씨의 양쪽 팔뚝 안쪽에는 상처 자국이 있다. 살을 잘라낸 상처였다. 팔뚝에서 잘라낸 연한 살은 입속 혀로 갔다. 그가 입을 벌려 혀를 내밀었다. 분홍색의 왼쪽과 달리 오른쪽은 색이 연했다. 그는 병명은 설암이었다. 혀에 생긴 암이었다. 그는 2008년 6월 ‘설 종양 광범위 절제술’을 받았다. 혀의 오른쪽 절반을 잘라냈다. 동시에 ‘설 부위 재건술’도 받았다. 팔의 일부는 ‘혀’가 됐다. 그래도 그는 말을 했다. 알아들을 수 있는 수준이었다. 혀의 절반이 떨어져나갔지만, 암세포는 남았다. 식도까지 번졌다.
그가 처음 병원을 찾은 2일, 그는 애프터셰이브 로션이나 스킨로션 등을 침대 옆 테이블에 가지런히 정리했다. 깔끔한 성격으로 보였다. 그의 소지품 가운데 눈길을 끄는 것은 등산용 스틱이었다. 스틱은 그에게 레저 활동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 필요했다. 그의 무릎 아래는 의족이었다. 그가 바지를 걷고 의족을 떼어냈다. 무릎 아래의 뼈를 살이 둥그스름하게 둘러싸고 있었다. 그는 “겨울이면 살과 맞닿은 의족의 실리콘이 너무 차갑다”고 말했다. 그의 왼쪽 발은 깊은 상처로 얼룩졌다. 의족을 하고 걸어다니다 넘어지기 일쑤였다. 제대로 관리하지 않아 가벼운 찰과상이 염증으로 깊이 번졌다. 병원에 온 첫날 짐 속에 꾸려온 반창고와 소독약으로 혼자 왼쪽 발을 치료하다 지나가던 간호사의 눈에 띄었다. 간호사가 와서 거즈와 소독약을 듬뿍 써서 소독한 뒤 발을 감싸줬다. 당시 박우순 간호사는 “상처를 멋대로 놔둬서 깊기 때문에 새살이 돋는 데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다”고 말했다. 왜 상처를 간호사에게 보일 생각을 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그는 머리만 긁적였다.
그는 고향이 전북 익산이었다. 1975년 14살 소년은 상경했다. “절반은 가출이었고, 절반은 허락을 받았다”고 그는 알쏭달쏭하게 회고했다. 소년은 서울 방학동의 한 플라스틱 사출 공장에 취직했다. “당시에는 노동법이고 뭐고 없었다.” 공장에서는 TV 커버 등 온갖 플라스틱 제품을 만들었다. 그때는 자동화가 되지 않았다. 초등학교 졸업 학력인 그의 입에서 나오는 자동화라는 말이 왠지 낯설게 들렸다. ‘자동화’가 되지 않은 공장에서 노동자의 손은 기계를 대신했다. 화공약품은 직접 직원들의 손을 거쳤다. 약품이 뭔지도 몰랐고, 건강에 해로운지도 몰랐다.
결혼은 1984년에 했다. 고입 검정고시를 보려고 야간 학원을 다니다 한 여인을 만났다. 시험에는 떨어졌지만, 아들 하나와 딸 하나를 낳았다. 모든 것이 순조로워 보였다. 그는 회사와 운명을 함께했다. 회사가 방학동에서 반월로, 구로로, 시화로 옮길 때마다 그의 터전도 함께 이동했다. 그 일터에서 자리를 잃은 것은 1998년 2월이었다. 금융위기의 유탄은 그의 가정에도 떨어졌다. 회사는 당시 ‘미원’의 협력업체였다. 대기업은 그의 회사와 계약을 끊었다. 회사는 공중분해됐다. 서씨의 일자리도 사라졌다. 퇴직금도 없었다. 경기가 바닥이어서 일자리를 구하기 힘들었다. 서울에서 간신히 공장 일자리를 얻었다. 그곳에서 그는 오른쪽 엄지발가락을 잃었다. 산재 보상금도 변변히 받지 못했다. 재앙은 혼자 다니지 않았다. 그해 그는 골수암 판정을 받았다. 아예 다리 반쪽을 절단했다. 피를 토했다. 결핵이었다.
폐병앓는 무표정의 전직 사업가불행이 겹치면서 가족도 조각났다. 거리에 나서면 그가 만든 무수한 플라스틱 제품들이 눈에 들어왔다. 텔레비전과 시계, 밥통 등 플라스틱은 널렸다. 그렇지만 어느 하나도 그의 것은 없었다. 더 이상 물건을 만들 수도 없었다. 이 말을 하는 순간, 언제나 낮게 깔려 있던 그의 눈꺼풀이 위로 올라갔다. 눈도 반짝거렸다. 화가 난 것 같기도 했다. 자부심과 분노가 아주 짧게 그의 눈에서 교차했다. 잠깐 동안 그는 아주 다른 사람이 됐다. 그는 항상 수면제 반쪽을 먹은 듯한 표정이었다. 12년 전의 이야기가 그의 기억을 휘저은 듯했다. 그것도 잠시였다. 1998년 사출 공장에 잠시 서 있던 그는 다시 2010년 서울 월계동 병원으로 돌아왔다. 눈꺼풀은 다시 내려앉았다. 말기암의 기운이 다시 얼굴에 병색으로 떠올랐다.
서씨의 옆 침대에 있는 김성구(69)씨는 자주 병동의 복도 의자에 앉았다. 지나가는 간호사들과 자원봉사자들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는 만성폐쇄성폐질환을 앓고 있었다. 폐에 일종의 염증이 생기면서 기능이 떨어지는 병이었다. 암은 아니었지만 생명에는 치명적이었다. 말을 한두 마디 할 때마다 그는 낮게 잔기침을 했다. 폐 속에 고인 가래는 그의 말을 삼키고 있었다. 몸이 수척했지만 눈은 밝게 빛났다. 그가 호스피스에 입원한 지 11일이 지난 11월21일, 그의 방을 찾았다. 마침 집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혼자 살던 그의 월세방에서 짐을 정리하고 오는 참이었다. 보증금 500만원에 월세 30만원짜리 사글셋방은 깨끗이 비워졌다. 방을 채우던 옷과 이불, 가구, 생활용품 등은 주인의 손을 떠났다. 주인을 따라온 건, 점퍼와 바지 등 옷가지 몇 개와 책 10여 권이었다. 책은 모두 성명학이나 주역 등에 관한 것이었다. 짐을 정리하고 앉은 그에게 물었다. “많이 아쉬우시죠?” 그가 “어쩔 수 없지”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그가 고개를 낮게 숙이고 잔기침을 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침대를 바라보던 그가 문득 책 가운데 하나를 집어서 내밀었다. 이라는 책이었다. “가져가소. 내 죽으면 쓸 사람도 없으니….” 몇 번이고 사양했다. 그가 다 버리고 마지막까지 잡은 몇 안 되는 물건이었다. 그가 계속 책을 들고 있었다. 할 수 없이 받았다. 책의 표지에는 ‘원하는 것을 이루는 뇌의 비밀’이라고 적혀 있었다.
젊을 때는 그도 원하는 것을 많이 이뤘다. 부산에서 떵떵거리는 사업가였다. 포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부산의 한 스테인리스 회사 대리점에서 일자리를 잡았다. 일가 어른이 가지고 있던 가게였다. 당시는 놋그릇에서 스테인리스로 주방용품이 바뀌는 때였다. 그는 수완을 인정받았다. 대리점은 그의 손으로 넘어왔다. 다루는 상품도 풍로, 난로 등으로 다양해졌다. 서울에서 부산으로 전자제품이 내려오면 거의 그의 손을 거쳤다. 서울에서 오는 손님들을 자주 접대했다. 아예 유흥업소도 하나 열었다. 낮에는 유통, 밤에는 유흥이었다. 43살께 유통업은 그만뒀다. “너무 오래 했다.” 정수기 사업에도 손을 댔다. 금융위기가 닥치면서 문제가 생겼다. 사업을 하면서 빚진 돈은 다 갚았는데, 받을 돈은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내만 바보 같은 짓을 했다”고 말했다. 그의 얼굴에 쓸쓸한 웃음기가 남았다. 부인과는 10여 년 전부터 따로 살았다. 미국으로 건너간 딸은 소식이 끊겼다. 아들은 대기업의 금융 계열사에 있다가 일자리를 잃었다. 복도에 앉은 그가 사람들을 무표정하게 바라봤다.
본처있던 남편 떠나 식당·다방으로
김씨가 머물던 706호를 나오면 복도 건너편에는 여성 환자들이 머무는 702호가 있다. 이 방의 창가 자리에 누운 최효인(62)씨가 11월 들어 부쩍 집에 가자는 말을 자주 했다. 문득 옷을 갈아입혀 달라고 하기도 했다. 왜 그러냐고 물으면 “집에 가야지”라고 답했다. 밥을 먹다가도 갑자기 “집에 가자”고 말했다. 친언니에게 전화를 걸어달라고도 부탁했다. “언니더러 집에 가자고 해.” 그의 말은 간절했다. 폐에서 시작된 암은 뇌까지 번졌다. “집에 가자”는 말은 뇌 속의 암세포를 지나 끈질기게 입으로 나왔다.
그의 친언니 최정인(74)씨는 독거노인이었다. 임대아파트에 사는 그는 매일 동생을 보러 병원에 찾아왔다. 동생은 그 언니의 집에 가고 싶었다. 동생이 병원에 오기 전 두 늙은 자매는 임대아파트에서 반년을 같이 살았다. 환자의 요구에, 간호사들로서도 난처했다. 나이 많은 언니가 데려갈 수 있는 처지도 아니었다. 70살 넘은 노인이 환자를 돌볼 여력이 없는 까닭이었다. 환자가 몸져누울 곳은 호스피스 말고 없었다. 환자는 “집에 가면 혼자서 챙겨먹을 수 있다”고 우겼다. 그는 발에는 아예 힘이 없고 두 팔은 간신히 드는 수준이었다. 식사도 자원봉사자가 떠먹였다. 고개도 가누지 못했다.
그의 언니가 또 병원을 찾았다. 찹쌀떡을 들고 왔다. 환자는 떡에는 관심이 없었다. 언니가 집에 데려가지 않을까, 그의 표정에는 그 질문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늙은 언니에게는 그럴 힘이 없었다. 박우순 간호사가 권유했다. “환자의 마지막 소원이잖아요. 하룻밤 데려가서 같이 주무세요.” 최근 최씨는 앉아 있을 때 몸의 균형을 잡지 못하고 한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었다. 횡설수설하는 경우도 많아졌다. 상태가 점점 안 좋아진다는 뜻이었다. 건강이 더 나빠지면, 집에 갈 수도 없게 된다. 늙은 언니는 우물쭈물했다. 거동이 불편한 환자를 집에까지 데려갈 엄두가 나지 않는 표정이었다. 언니를 설득하는 간호사를 박미애 조무사가 거들었다. 고민하던 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약속이 만들어졌다. 기자가 다음날 차를 몰아 최씨를 데리고 가기로 했다. 무표정한 최씨의 뺨이 발그레하게 상기됐다.
다음날 병상을 찾아 말을 건넸다. “오늘 집에 가셔야죠?”라고 말하자 흘긋 보더니 “누가?”라고 물었다. 어제의 말은 그새 잊었다. 2시가 되자 언니가 왔다. 옷을 함께 입었다. 흰색 털실 상의에 파란색 트레이닝복 바지에 흰색 운동화를 신었다. 날씨가 추워서 두툼한 외투에 흰색 털모자도 눌러썼다. 아파트는 멀지 않았다. 자동차로 5분 거리였다. 임대아파트 15층이었다. 언니와 함께 들어간 아파트는 15평 남짓, 좁았다. 최씨의 표정이 상기됐다. 베란다 너머로 보이는 개운산의 단풍이 최씨의 볼만큼이나 붉었다.
최씨의 아버지는 광주 지역 공무원이었다. 집안도 유복했다. 귀하다는 ‘밀감’ 박스가 집에 수북했다. 전쟁이 운명을 바꾸었다. 온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다. 어머니는 인민군에 잡혀갔다. 3남2녀 가운데 셋째아들과 막내딸인 최씨는 외가로 보내졌다. 전쟁이 끝난 뒤 가족들은 전남 곡성에서 자리를 잡았다. 아버지는 더 이상 공무원이 아니었다. 기와 공장을 운영하기 시작했지만, 장사는 수월찮았다. 형편은 쪼들렸다. 최씨는 초등학교까지만 마쳤다. 온 가족이 서울로 상경했다. 변변한 기술도 없는 최씨는 가발 공장에서 일을 시작했다. 남자를 만났다. 아이를 둘 낳았지만, 알고 보니 남자에게는 본처가 있었다. 집을 나왔다. 아들 둘은 집에 남기고 왔다. 경기도 수원에서 다방을 했다. 식당도 했다. 본인은 입을 다물었지만, 언니는 “전국 안 가본 데가 없다”고 말했다. 가족들과 연락도 끊었다.
20년 만에 만신창이로 돌아온 동생최씨가 언니에게 다시 연락을 한 것은 지난 5월이었다. 그 사이 20년이 흘렀다. 몸은 만신창이가 됐다. 서울 원자력병원에서 진단을 해보니, 폐암이었다. 언니는 “배운 것도 없이 고생을 너무 많이 했다”고 말했다. 언니가 최씨의 젊은 시절 사진을 보여줬다. 석 장이었다. 하나는 다방에서 일하던 시절의 사진이었다. ‘남지다방’이라고 적힌 카운터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알록달록 색동저고리에 특이하게도 검은색 치마를 입었다. 볼에 살이 오른 그는 밝게 미소짓고 있었다. “30대 초반일 때”라고 최씨가 말했다.
다음날 점심시간에 맞춰 아파트를 다시 찾았다. 최씨는 잠들어 있었다. 아기처럼 평화로운 얼굴이었다. 병원에서는 보기 힘든 표정이었다. 분홍색 바탕에 붓꽃이 그려진 잠옷을 입고 있었다. 왼손 주먹을 반쯤 움켜쥐고 오른쪽은 가슴 위에 얹은 채 잠이 들었다. 입은 앞니가 드러나도록 벌리고 있었다. 산등성이를 넘어오는 햇살에 얼굴이 반짝였다. 자매는 새벽 4시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동생은 낮은 침대 위에서, 언니는 바닥에서 잤다. 동생은 언니가 잠든 바닥으로 내려오려고 몸서리를 치다가 떨어졌다. 언니랑 나란히 눕고 싶었기 때문이다. 늙은 언니는 동생을 다시 침대로 올렸다. 몸에 연결된 일종의 인공방광인 ‘유치도뇨관’이 몸보다 낮은 곳에 있어야 했다. 스스로 배설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환자들에게는 소화기관에 유치도뇨관이 연결됐다. 도뇨관을 통해 나온 소변은 투명한 비닐백에 쌓이고, 간병인이 수시로 비워준다. 언니와 함께 자려는 동생 때문에 언니가 결국 항복했다. 좁은 침대 위로 두 자매가 나란히 누웠다. 자매는 30년 전에 돌아가신 엄마 이야기를 하며 계속 눈물을 흘렸다. 60대의 노환자는 소녀가 됐다. 아침에 일어서서는 남대문시장에 가서 옷을 사자고 언니를 보챘다.
잠든 최씨의 얼굴을 보았다. 그는 어쩌면 남대문에서 장을 보는 꿈을 꾸고 있을지도 몰랐다. 1시간 뒤 그가 깼다. 차에 태웠다. 백미러를 통해 본 최씨의 표정은 어두웠다. 어쩌면 마지막으로 들르는 집이라는 것을 그도 잘 알고 있는 듯했다. 바깥 온도는 8도 남짓했다. 병원에 돌아온 뒤, 최씨는 다시 집에 가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최씨의 병실에는 또 한 명의 환자가 있었다. 김종희(47·가명)씨였다. 유방암을 앓고 있었다. 다른 환자들보다 의식도 또렷하고, 상체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다. 식사도 혼자 할 수 있었고, 칫솔질도 혼자 했다. 남에게 신세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한번은 무료한 김씨를 위해 휠체어에 태우고 뒷마당을 산보했다. 옷을 두둑하게 입혔지만 날씨가 몹시 쌀쌀했다. 괜찮냐고 물어도 “괜찮다”는 답만 계속했다. 병실에 돌아와서도 “고맙다”는 답만 했다. 무언가 다가서기 힘든 부분이 있었다.
그의 말에는 ‘치료자와 치료받는 자’ 사이에서 은연중에 형성되는 일방적인 관계를 거부하는 듯한 느낌이 실렸다. 상대를 배려하지만 동시에 상대방과 분명한 선을 그었다. 어쩌면 죽음에 대면한 사람이, 도대체 자신의 처지를 이해할 것으로 보이지 않는 사람들과 마주하면서 보일 수 있는 나름의 대응 방식 같았다. 자신의 죽음과 고독하게 직면한 사람이 어쩌면 가장 예의 바르게 타인을 수용하거나 거부하는 방식일지도 몰랐다. 그는 병동에서 가장 건강했지만, 가장 위태로워 보였다. 안경 너머 그의 눈빛은 선했지만, 왠지 초조하게 외로웠다.
김씨의 이야기는 조각으로만 들었다. 워낙 과묵한 성격이었다. 김씨는 광주 출신이었다. 20년 전 결혼한 남편과는 이혼했다. 이혼한 뒤에는 “살기 위해” 식당일을 했다. 모든 종류의 식당일을 했다. 일식집이 그나마 가장 편했고, 고깃집이 가장 힘들었다. 월세 35만원짜리 방에서 혼자 살다가 암에 걸렸다. 동사무소의 소개를 받고 성가병원에 오게 됐다.
알콜중독 남편에게 매 맞는 암환자
조용한 호스피스에도 가끔은 소동이 있다. 이번에는 난동에 가까웠다. 정영희(49·가명)씨 때문이었다. 그는 3일 남편과 함께 병원을 찾았다. 정씨는 165cm 정도 되는 키에 얼굴이 무척 야위었다. 얼굴색이 거무스름했다. 병색이었다. 회색 오버에 푸른색 트레이닝복, 은색 운동복을 입었다. 모현호스피스라는 다른 가톨릭 단체의 안내를 받아 왔다. 그곳의 김은배 수녀가 동행했다. 환자의 휘청거리는 모습이 위태로웠다. 환자는 2층 내과에 들러 이승훈 의사와 상담을 했다. 정씨가 검사를 받는 동안 남편 홍영준(가명)씨가 부인에 대해 입을 열었다. 부인의 암은 지난 3월에 발견했다. 남편은 “겁이 나서 치료도 못하고 내버려뒀다”고 한다. 아내마저 어떻게 되면 어쩌나 싶었다. 남편은 그냥 죽어버리고 싶었다. 홍씨는 “내가 아내를 죽인 셈”이라고 중얼거리듯이 자책했다. 그는 병원 사람들에게 계속 고개를 숙이며 고맙다고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그의 입에서 술냄새가 희미하게 났다. 그는 “너무 괴로워서 술이라도 먹지 않으면 힘들다”고 말했다.
간단한 입원 수속을 마쳤다. 기자는 이날 김은배 수녀와 함께 가정방문 활동에 나섰다. 병원을 떠난 지 2시간이 안 돼 병원에서 연락이 왔다. 남편 홍씨가 병원에서 소란을 피운다는 얘기였다. 전화기에 실려오는 얘기를 들어보니, 홍씨가 부인을 다시 데려가겠다고 우기고 있었다. 영문은 알 수 없었다. 술 취한 그는 “기분이 나쁘다”는 말만 반복했다. 병원 근처 어디선가 술을 먹은 듯했다. 김 수녀는 난처해 보였다. 자신이 데리고 온 환자였다. 그렇다고 그를 기다리는 환자들과의 약속을 포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다음 환자를 찾으러 가는 중에 병원에서 다시 전화가 왔다. 정씨가 아예 윗도리까지 벗고 폭력을 휘두른다고 전해왔다. 김 수녀가 가도 달리 뾰족한 수가 없었다. 부인의 동의를 받아 경찰을 부르거나 부부를 그냥 보내는 수밖에 없었다. 차를 운전하면서 김 수녀의 혼잣말이 나왔다. “영희씨 불쌍해서 어떡하나. 집에 돌아가면 남편한테 또 맞고 살 텐데….”
6시간 뒤, 병원에서 다시 연락이 왔다. 홍씨는 끝내 부인을 데리고 갔다. 입원한 지 불과 6시간도 안 됐다. 몸도 잘 가누지 못하는 정씨를 끌고 병원 문을 나섰다. 김 수녀의 표정이 어두웠다. 정씨가 걱정됐다. 그는 단호하게 대처해야겠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한동안 정씨에게는 가지 말아야겠다”고 했다. 남편 홍씨에게 자신의 행동의 결과를 똑똑히 보게 해야 한다고 김 수녀는 말했다. 정씨의 약이 문제였다. 정씨에게는 진통제가 필요했다. 전문적인 간호도 필요했다. 그걸 홍씨에게 요구하는 것은 무리였다. “일단 약은 우편으로 보내야겠어요” 김 수녀가 말했다.
노름빚으로 ‘빨갱이’에게 팔려가다702호 옆에는 여성용 병실이 하나 더 있었다. 710호였다. 이 병실의 환자들은 대체로 조용했다. 병실에 들어서면 오른쪽에 한순택(91)씨가 누워 있었다. 90을 넘은 나이지만 눈빛은 빛났다. 자원봉사자가 찾을 때마다 손을 힝없이 들어 반겼다. 직장암을 앓는 그는 자신에 대해서는 입을 꾹 다물었다. 가끔 찾아오는 중년 여성도 “성당에서 만난 사이”라며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입을 다물었다. 어쩐지 두 사람의 눈매와 코는 닮은 듯했다.
띄엄띄엄 말하는 한씨의 얘기를 들어보면, 그는 일본 도쿄에서 법대를 나왔다. 1919년생이니까, 1940년을 전후해 도쿄에서 공부했다는 말이다. 고향이 충남 아산인 그는 어릴 때 집에 전화기가 있을 정도로 부유했다. 그는 “벽에 거는 전화기가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서울에 돌아와 혜화동에서 유치원 선생님을 했다. 왜 법조계에 몸담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전쟁 때문”이라고 끊어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한씨는 발이 유독 저리다고 했다. 종종 그의 발을 주물러줬다.
한씨의 옆 침대에는 장은숙(80)씨가 말없이 누워 있었다. 뇌종양을 앓는 그는 거동이 불가능했다. 뇌 기능이 떨어지면서 음식을 소화하지 못했다. 11월 들어서는 매일 포도당 수액 500㏄로 명을 잇고 있었다. 그는 그저 눈만 껌뻑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가까이 다가가도 눈의 초점에는 변화가 없었다. 허공을 향해 치켜뜬 동공의 테두리에 옅은 푸른색 테두리가 둘러졌다. 그의 시선이 꽂히는 지점에 누군가 성모마리아 그림을 놓았다. 머리맡 형광등 위에 놓인 우편엽서 크기의 그림 속에서 성모마리아는 그를 마주 내려다봤다. 성모의 눈은 진한 파란색이었다. 그림에는 환자를 위한 기도가 적혀 있었다. “주님의 손으로 일으켜주시고/ 주님의 팔로 감싸주시며/ 주님의 힘으로 굳세게 하시며/ 더욱 힘차게 살아가게 하소서.”
병원을 찾은 그의 둘째딸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장씨는 평안북도 선천 사람이다. 초등학교는 다니다가 말았다. 한글을 간신히 읽는 수준이다. 결혼은 “빨갱이”랑 했다. 그의 오빠가 “화투를 치다가” 돈을 잃었다. 노름빚을 갚기 위해 장씨는 “빨갱이에게 팔렸다”. 남편 이름은 장맹필이었다. 딸이 생겼다. 이름은 순옥이었다. 1·4 후퇴 때 남편과는 헤어졌다. 피난 가다가 둘째 남편을 만났다. 새 남편은 순옥이를 서울 신촌의 큰 쌀집으로 넘겼다. 모두 굶던 시절이었다. 어차피 잘된 일이었다. 남편에게는 첫째 부인이 있었다. 장씨는 둘째 부인이었다. 장씨는 딸 둘을 낳았다. 가족은 서울 창신동에 자리잡았다. 두 딸이 나이가 들면서 장씨는 집을 나왔다. 둘째와는 25년 전부터 함께 살고 있다. 두 딸은 가족관계등록부로는 첫째 부인의 자녀로 돼 있었다. 덕분에 그는 독거노인으로 수급권을 받을 수 있었다. 뇌종양으로 쓰러진 것은 4년 전이었다. 둘째딸이 정성으로 돌보고 있다. 병원비를 감당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한양대병원과 길병원을 거쳐 이곳까지 오게 됐다. 딸은 어머니를 보며 “남한테 나쁜 짓 한 번 안 하고 착하게 살아온 분”이라고 말했다.
장씨의 맞은편에는 조미희(60·가명)씨가 종종 이불에 고개를 처박고 있었다. 그의 몸은 부러질 듯 앙상했다. 위암을 앓고 있었다. 지난 6월 수술을 시도했지만, 식도까지 암이 전이돼 “배를 다시 덮었다”. 앙상해진 자신의 팔을 보며 “이제는 괴물같이 돼버렸다”고 말했다. 그는 호스피스에 온 첫날인 11월12일 병원에서 주는 링거를 거부했다. “그거 맞으면 더 사는 거 아니냐”라고 말했다. “일찍 죽고 싶다”는 말만 반복했다. 정서적으로도 불안했다. 하루에도 서너 번씩 샤워실을 찾아 목욕을 했다. 거동이 불편한 환자였다. 샤워실로 이동하다가 넘어지기라도 할까봐 간호사들은 긴장했다. 병원 복도를 불안하게 오가던 그는 사흘 만인 15일에 병원을 떠났다. 그에게 전화를 했다. 병원에서 도무지 잠을 잘 수 없다고 했다. “예민한 성격 탓”이라고 말했다.
태풍이 날려버린 희망여고를 졸업한 그는 결혼하기 전까지 정부 부처에서 일했다. 남편과의 사이에서 아들 둘을 낳았다. 남편은 폭력적이었다. 이혼했다. 20년 전 얘기였다. 10년 전 강원도에서 작은 식당을 열었다. 2003년에 몰아친 태풍 ‘매미’가 인생을 바꿨다. 식당 주변이 온통 쑥대밭이 됐다. 자동차와 임대아파트를 정리했다. 남은 것은 빚만 4500만원이었다. 그 빚을 갚으려고 닥치는 대로 일했다. 간병인, 베이비시터, 파출부 등의 일이었다. 익숙하지 않은 일과 줄지 않는 빚은 마음의 병을 만들었다. 지난봄 변비가 심하게 왔다. 변비약을 먹어도 낫지 않았다. 내시경을 햇다. 위암 3기 판정을 받았다.
그는 기자와 통화한 아침에 “면도칼로 동맥을 자르려고 한다”고 말했다. 아침에 미음을 두 숟가락 먹었다고 했다. 간호를 받을 수 있는 병원으로 오라고 권유했다. “집 안에서 조용히 죽고 싶다”고 답했다.
조씨가 병원을 떠난 지 2주가 지난 뒤, 장경옥(64)씨가 짐을 싸서 입원했다. 조씨가 눕던 병상에 자리를 잡았다. 폐암을 앓는 환자였다. 얼굴의 굵은 선은 강인한 인상을 줬다. 오른쪽 가슴과 무릎 양쪽에 통증을 호소했다. 양쪽 무릎을 계속 주물러줬다. 그는 서울 신당동이 고향이었다. 무학여고를 나왔다. 학교를 졸업해서는 재봉일을 했다. 혼자 군고구마 장사도 했다. “추운 날은 정말 매서웠다”고 말했다. 20대에 결혼했지만 금방 이혼했다. 40년을 혼자 살았다. 자식은 없었고, 혼자뿐이었다. 형제도 없었다. “먼 친척”만 있을 뿐이었다. 그를 먹여살릴 수 있는 가족이 없어서, 기초생활수급권자가 됐다. 그는 “호스피스가 뭐하는 곳이냐”고 물었다. 설명해줬다. 그가 표정을 찌푸렸다. 어느 정도는 체념한 듯했다. 무릎을 계속 주물러줬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그렇게 11월이 점차 기울어갔다. 환자들은 계속 움직였다. 12월의 어느 날 병원을 다시 찾았다. 설암을 앓던 서창호씨는 아예 병원을 떠났다. “집에 보일러를 고치고 오겠다”던 그는 소식이 끊겼다. 휴대전화로 전화를 했다. 그가 휴대전화 너머에서 “지낼 곳이 있어서 머물고 있다”고 말했다. ‘지낼 곳’이 어디인지는 말하지 않았다. “지방”이라고만 말했다. 기자의 말에 그는 건성으로 답했다. 더 이상 물을 수는 없었다.
김성구씨는 5층 일반병동 입원실로 옮겨졌다. 치료를 포기하기엔 아직 이르다는 병원 쪽의 판단 때문이었다. 5층으로 찾아가니, 그는 복도 의자에 앉아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복도를 지나치는 사람은 더 많았지만, 그의 눈은 계속 쓸쓸했다.
최효인씨의 언니는 여전히 매일같이 동생을 찾아왔다. 과일을 갈아와서 동생에게 먹이고 있었다. 고개를 잘 가누지 못하던 최씨의 얼굴이 조금은 더 밝아졌다. 말이 없던 김종희씨는 표정이 더 굳어졌다. 허리 통증이 하반신까지 옮겨졌다. “하반신에 감각이 없다”는 그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한정희 간호사는 “종희님이 응어리를 마음속에 담고 풀지 않는 것 같아서 안타깝다”고 말했다.
병원에서 소란을 피운 홍영준씨에게도 전화를 걸었다. 답은 없었다. 부인인 정씨에게 전화를 했다. 고3인 딸이 받았다. “엄마가 집에서 통원 치료를 받는다”고 대답했다. 잠시 발을 끊었던 김은배 수녀도 다시 일주일에 한 번씩 엄마를 찾아왔다. 아빠는 “노동일” 하러 나갔다. 월세 20만원짜리 방에 엄마와 딸이 있었다.
한순택씨과 장은숙씨는 701호에서 거의 똑같은 자세로 누워 있었다. 장경옥씨는 인상을 잔뜩 쓰고 텔레비전을 바라보고 있었다.
병원을 사흘 만에 떠나간 조미희씨에게 전화를 했다. 연락이 닿지 않았다. 서울 노원구 공릉동 집을 찾았다. 단독주택의 구석에 난 작은 철문을 열고 길게 담을 따라 돌아간 곳이 그의 방이었다. 월세 20만원짜리였다. 돌계단을 세 번 밟고 이른 현관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겨울바람이 찼다. 바람에 떨어진 낙엽으로 현관 앞은 어지러웠다. 다음날 그의 아들과 연락이 닿았다. 최씨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12월5일 원자력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아들은 말했다. 아들은 “어머니가 20일 넘게 거의 곡기를 끊어서 마지막은 아주 조용히 돌아가셨다”고 말했다. “빚 때문에 스트레를 많이 받았다”고 그는 덧붙였다.
하반신에 장애가 있던 이승호씨가 돌아간 때는 5일 뒤인 12월10일 새벽이었다. 다음날 빈소를 찾았다. 성가복지병원 옆의 작은 장례식장이었다. 찾는 이 없는 빈소는 조용했다. 누이동생 내외와 조카딸, 그리고 누이동생의 친구 2명뿐이었다. 사진 속에서 이씨는 젊었다. 하얀색 트레이닝복을 입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병원에서는 본 적이 없는 표정이었다. 이생에서 오래 웃지 못한 얼굴을 영정 속에서 펴보이는 듯 했다. 그의 누이동생은 “마땅히 쓸 사진이 없어서 젊을 때 찍은 것을 썼다”고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조문객 명단을 봤다. 이틀 동안 다녀간 조문객이 23명이었다.
2400여 명의 아픈 죽음12월에 들어온 낯선 환자들도 서둘러 성가복지병원 7층을 떠나갔다. 자궁경부함은 앓던 이정화(46·가명)씨는 11일 10살 딸이 울면서 임종한 가운데 사망했다. 결장암을 앓던 김무영(81·가명)씨도 같은 날 2시간 동안 눈물을 흘리다가 숨을 거뒀다. 지난 1992년 성가병원 호스피스가 문을 연 이후 이날까지 사망한 이는 2403명이었다. 가난해서 아프게 죽음을 맞은 이들이었다.
글 김기태 기자 kkt@hani.co.kr·사진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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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스피스 환자 15명의 학력 분포는 폭이 넓었다. 무학에서 대졸까지였다.
담낭암으로 사망한 장인철(68·가명)씨는 배움의 기회가 없었다. 초등학교를 중간에 그만두거나 졸업한 이가 5명이었다. 대부분 고졸 정도의 학력이었다. 대졸 이상 학력을 가진 이는 한순택씨가 유일했다. 그는 일제강점기에 도쿄로 유학해 법대를 졸업했다. 매우 예외적인 경우였다. 이들을 다시 두 집단으로 나누었다. 고졸 이상 학력을 가진 집단과 나머지 집단이었다. 한순택씨 등 7명이 고졸 이상 학력이었고, 나머지 8명은 그보다 배움이 적었다. 학력이 높은 집단은 평균나이가 65.9살, 낮은 집단은 62.8살이었다. 말기암으로 호스피스 병동에 오게 된 나이가 평균 3.1살 차이가 나는 셈이다. 배움이 많은 쪽 평균나이가 상대적으로 높았다.
국민 전체의 경향은 어떻게 나타날까? 손미아 강원대 교수(예방의학) 등이 만든 ‘암 발생과 사망의 건강불평등 감소를 위한 역학지표 개발 및 정책개발연구’를 다시 펼쳐보았다. 보고서를 보면, 대졸 이상 학력의 인구 가운데서 100명이 암으로 죽는 동안 고졸 학력자는 122명이 사망했다. 집단마다 연령 분포가 다른 점을 감안해서, 연령 분포가 같도록 인구를 보정한 뒤 계산한 결과였다. 같은 조건에서 중졸 학력자는 157명이, 초등학교 졸업 이하의 학력을 가진 사람은 168명이 사망했다. 대졸 이상의 학력을 가진 인구는 암으로 죽을 확률이 상대적으로 매우 낮게 나타났다.
학력은 개인의 수명에도 영향을 미쳤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서 2008년에 내놓은 ‘건강수명의 사회계층 간 형평성과 정책과제’ 보고서를 보면, 2005년 기준 20살 성인 가운데 초등학교 졸업 이하의 학력을 가진 사람은 49년을 더 살 것으로 기대되지만, 대졸 이상 학력을 가진 인구는 62살을 더 살 것이라는 기대치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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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스피스를 처음 찾는 환자들은 종종 가족관계를 숨겼다. 때로 “가족이 없다”는 거짓말도 했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는 기초생활수급권 혜택 때문이었다. 경제활동이 가능한 자녀나 배우자가 있으면 수급권 혜택을 받을 수 없다. 또 성가복지병원도 노숙인, 행려환자, 영세민, 이주노동자, 차상위 계층 등 경제력이 없거나 취약한 계층을 치료 대상으로 하고 있다. 환자들은 자칫 호스피스에서 받아주지 않을 것이라는 조바심 때문에 가끔 없는 말을 했다. 둘째, 가족이 있어도 실제로는 연이 끊긴 경우가 많았다. 부부 사이에, 부모와 자식 사이에 ‘남’이 된 탓이었다. 이런 마당에 연락이 끊긴 ‘경제력 있는’ 가족은 오히려 당사자에게 복지 혜택을 가로막는 방해물일 뿐이었다. 두 가지 이유는 자주 맞물려 돌아가면서 ‘거짓말’을 만들어냈다. 따라서 이들의 ‘거짓말’은 실제로 거짓이 아닌 경우도 자주 있었다.
호스피스에서 만난 14명의 가족관계를 살펴봐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가족관계에 대해 입을 다문 한순택씨는 대상에서 일단 제외했다. 구술을 근거로, 14명의 가족관계를 살펴봤다. 평생 독신으로 살아온 이승호·장인철씨를 제외한 12명 가운데 이혼을 경험한 이가 5명이었다. 서창호씨도 이혼 절차를 밟진 않았지만 부인과 연락이 끊긴 지 오래였다. 절반이 배우자와 결별했다.
자녀와 연이 끊긴 경우도 많았다. 자녀가 있는 것으로 확인된 환자 10명 가운데 자녀 1명 이상과 오랫동안 연락이 끊긴 경우가 5명이었다. 또 질병 등 위기 상황을 가족과 연이 끊긴 채 완전히 홀로 겪어본 경험이 있는 이가 14명 가운데 6명이었다. 부분적인 가정 해체를 경험한 환자는 3명(이종길·김성구·조미희씨)이었다.
‘가족 해체’를 경험하지 않은 환자는 이승호·김성범·이순임·장은숙·정영희씨 등 5명이었다. 이 가운데 이승호씨는 독신으로 살아온 경우였다. 배우자가 살아 있어도, 11월4일 사망한 이순임씨처럼 어려울 때 그다지 지지가 되지 않거나, 정영희씨처럼 폭력을 휘두르는 사례도 있었다. 결국 가정이 만들어지고 나서 파괴되지 않고 유지된 환자는 김성범·장은숙씨뿐이었다. 빈곤과 질병 속에서 가족이 복지의 첫 번째 안전판 구실을 못하면서 나머지 환자들의 고통은 더욱 컸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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