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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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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에 대한 예의

등록 2009-02-26 16:51 수정 2020-05-03 04:25

한 특급호텔 노동조합이 꽤 오래 파업을 했다. 마지막 진압 때 노조원들은 호텔 연회실 문을 걸어 잠그고 있다 체포됐는데,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화상을 입었다. 노조원들 증언에 따르면, 경찰이 던진 연막탄 같은 것이 카펫에 옮겨붙었다는 것인데, 경찰은 불이 붙을 만한 것을 던지지 않았고 오히려 내부에서 노조원들이 경찰을 막으려고 뭔가를 준비했다며 발뺌했다.

이웃에 대한 예의.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이웃에 대한 예의.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재판정으로 간 특급호텔의 파업

조합원들은 진단서를 받아 국가를 상대로 재판을 시작했고, 경찰은 당시 진압에 사용했던 장비들의 도면까지 제출하며 반박했다. 그날 던진 것은 ‘섬광탄’이라는 영국산 장비로, 1개에 200만원이 넘고, 아주 환한 불과 큰 소리를 내 시청각을 순간적으로 마비시킨 다음 그대로 꺼진단다. 영어로 된 안전 점검 결과 보고서까지 제출하면서, 오히려 거듭된 퇴거 요청에도 불구하고 카펫과 커텐 등 불붙기 쉬운 물건이 많은 연회장 안에서 대치 상황을 만든 조합원들을 탓했다. 경찰의 어떤 장비가 어떤 작용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상황인데다 문을 걸어 잠그고 소화기 가루를 뿌리던 조합원들이 어떤 위험한 행동을 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어 재판 결과에 대한 전망이 어두워지려는 순간, “그럼 한번 가서 정말 던져보자”며 재판부가 선뜻 현장 검증을 제안했다. 사법 사상 최초의 ‘섬광탄 투척 검증’인 셈이다.

당일 아침까지도, 경찰이 자신 있게 검증하겠다고 하는 것을 보면서 ‘정말 불이 날 위험은 없는 게 아닐까? 설사 화력이 있다고 해도, 내가 던지는 것도 아니니 얼마든지 불이 안 붙게 할 수도 있어’ 등 온갖 걱정을 하면서 경찰특공대 훈련장으로 향했다. 2m 정도 땅을 판 뒤 몇 개의 공간을 나누고 안에는 책상, 의자, 마네킹 그리고 약간의 종이를 넣은 다음, 문제의 섬광탄을 안으로 던져 넣었다. 경찰 말대로 아주 밝은 불빛이 나고 파편이 튀어오르더니… 종이에 불이 붙기 시작했다. 너무나도 활활. 종이를 다 태우고 의자에 불이 옮겨붙으려고 해, 옆에서 여유 있게 구경 중이던 경찰관들이 내려가 불을 꺼야 할 정도였다. “불이… 잘 붙는군요.” 재판장의 한마디로 검증이 끝났고, 원고들은 승소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발화가 우려되는 상황에서는 화상의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이를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될 필요성이 있을 때 최소한의 범위 내에서만 경찰력을 사용하여야 한다”면서 “그 상당성을 넘어서는 진압은 위법”이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왜 재판부는 별 증거도 없는 원고들 말을 믿고 경찰특공대까지 찾아가 투척 검증을 해보자고 했을까? 매우 평범한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노조원들도 적이 아니라 그저 우리 이웃일 뿐이다. 그러니 압도적인 물리력과 권한을 가진 경찰의 진압이 적정한 것이었는지 훨씬 더 엄격히 살펴 그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지극한 상식.

경찰과 시민들을 같은 링에 올려 “청 코너- 철거민들이 시너를 준비했고, 홍 코너- 경찰은 화염병을 직접 던진 것도 아니니, 사람이 죽어도 경찰 책임은 아니다”라고 할 수는 없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최대한 안전하게 우리 동네를 지켜달라고 낸 세금으로 법을 만들어 월급을 받고 무장을 한 경찰은, 바로 그 동네 이웃들에게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래 놓고 그 사람들의 이웃이 돼준 사람들을 살인의 배후로 몰고, “같이 권리를 주장했다”는 것만으로 불온한 ‘제3자 개입’이라며 처벌하자는 이야기는, 더 말이 안 된다. 무조건 옹호하자는 게 아니라, 최소한의 예의를 말하는 것이다.

완벽한 이웃을 만나는 법

이라는 드라마가 있었다. 의문의 살인사건과 출생의 비밀, 재벌 2세와의 사랑이 고루 나오지만, 기본적으로 한 회사의 사택 단지에서 일어나는 일을 전하면서 ‘진정으로 함께 살아가고 싶은 이웃’이 누구인지 묻는다. 아마 정답은 “내가 먼저 좋은 이웃이 되는 것”이리라. 좋은 이웃은 예의를 아는 사람이고, 그것은 아침 엘리베이터 안에서 인사를 나누는 일을 말하는 게 아니다. 이웃에 대한 예의를 지키자.

김진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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