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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항공 참사 1년 넘었는데 유해, 유류품 648묶음 발견

저 사람은 가족을 지킬 수 있길… 무안국제공항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 희생자의 기록④— 고재승씨 인터뷰
등록 2026-03-05 21:07 수정 2026-03-11 11:14
2024년 가을 가족여행에서 유가족 고재승씨 부모님. 고재승 제공

2024년 가을 가족여행에서 유가족 고재승씨 부모님. 고재승 제공


 

179명이 사망한 ‘12·29 무안공항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 사고기 잔해 재조사가 2026년 2월12일 시작된 가운데, 희생자 추정 유해 아홉 점(한 점은 유해 확인, 여덟 점은 분석 중)과 휴대전화 4대, 유류품 648묶음이 추가로 발견됐다. 김윤덕 국토교통부 장관이 3월9일 공식 사과했지만, 유가족들은 “수습 과정이 충분치 않았다”며 분노했다. 경찰은 그간 전남경찰청을 통해 관련 수사를 해왔으나 1년 넘게 지지부진하다는 비판이 나오자 1월29일 48명으로 구성된 특별수사단을 꾸렸다. 국토교통부 산하에 있어 독립성 논란이 있던 항공철도사고조사위원회는 관련 법 통과에 따라 국무총리실 산하로 이관됐다. _편집자

1.

원래 살았던 집은 전남 순천이에요. 아버지가 방송사에서 일했는데 서울에서도 근무하고 광주에서도 근무해서 중학교 때는 아버지와 떨어져서 지냈죠. 저랑 나이 차이가 나는 누나들은 졸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타지로 갔고요. 어느 순간은 아버지가 없고 어느 순간은 누나들이 없어서, 가족 다섯이 다 같이 모여서 산 기간은 그렇게 길지 않았어요. 그래서 할아버지 할머니 다 돌아가시고 나서 부모님께 서울에 올라오시라고 했어요. 자식들 다 서울에 있는데 같이 지내자고요. 그렇게 큰누나가 부모님과 같이 살았죠. 차로 한 30분이면 부모님 집에 갈 수 있었어요.

부모님이 무안국제공항을 이용하게 된 건, 아버지 직장 은퇴하신 분들끼리의 모임이었기 때문이에요. 모임 계를 들어 여행을 간 거죠. 저는 “서울 사는데 김포공항에서 출발해 타이에서 만나면 되지 왜 무안까지 가냐”고 했어요. 힘들게 기차 타고 내려가서, 광주에서 다시 무안공항으로 가면 비행기 타는 시간보다 길어지잖아요.

참사가 일어난 날은 평범한 주말 아침이었어요. 밥하고 있었는데 큰누나한테 전화가 왔어요. 갈 때도 서울 용산역에서 광주송정역 가는 기차표를 저희가 끊어드렸거든요. 올라올 때도 끊어드려야 하잖아요. 전화해서 이 기차 타고 오시라고 해야 하는데 연락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런 대화를 하고 전화를 한 번 끊었다가 두 번째 전화가 왔을 때 누나가 “티브이(TV)를 켜봐라” 하더라고요. 그때 알았어요, 뭔가 잘못됐단 걸. 그때부터 장례 치르기 전까지 계속 무안공항에 있었어요. 사고 발생 한 열흘 뒤에 장례를 치렀나? 기억이 잘 안 나요.

 

2.

제가 사고 나기 전에 차 계약을 했는데 참사 이후에 차가 나왔어요. 카니발같이 아주 큰 차는 아니지만 좀 큰 차거든요. 그거 타고 큰누나랑 우리 식구, 부모님, 여행 다니려고 산 거였어요. 지금은 그 차에 어머니가 준 액세서리를 걸고 다녀요. 제가 처음 차를 샀을 때 어머니가 차에 걸고 다니라고 부처님이 새겨진 액세서리를 하나 주셨거든요. 원래 걸리적거려서 안 하고 다녔는데 지금은 꼭 걸고 다녀요.

집은 아직 정리 중이라고 해야 하나. 버릴 것만 버리고 남겨놨어요. 옷 같은 것은 대부분 안 버리고 그대로 두었어요. 정리를 꼭 해야 하나 그런 생각도 들고. 어르신들은 정리해야 고인이 마음 편히 간다고 하시지만, 저랑 누나들은 ‘그냥 놔둘 때까지 놔두자’고 했어요. 아버지가 언제부턴가 물건을 다 안 버리셨어요, 비닐봉지나 안 쓴 일회용 칫솔 이런 거. 쓰면 괜찮은데 안 쓰고 쌓여서 많아지고. 어머니도 아끼는 편이긴 한데 아버지는 아예 안 버리니까 두 분이 항상 그런 것 때문에 싸웠어요. 이거 좀 버리라고. 어머니가 직접 물건을 못 버리니까 저보고 이것 좀 갖다 버리라고 맨날. 하다못해 물건을 정리하다가 청첩장을 발견했는데, 아버지가 같이 은퇴한 직장 동료분들끼리 여행을 갔잖아요. 그러니까 같이 돌아가신 분들이죠. 그분들의 자녀 결혼 청첩장이 와르르 나오더라고요.

어릴 때 안방에서 드라마 보면서 아버지 얼굴에다 제 볼을 막 비볐거든요. 광대뼈를 비비면 아버지가 아파했는데, 그걸 제일 좋아했어요. 일부러 세게 막 비비면 아버지가 아프다고. 막내여서 더 그랬던 것 같아요. 그 기억이 참 좋았어요. 요즘엔 제가 여섯 살 딸한테 그러고 있어요. 얼굴을 막 이렇게 비비면 딸이 싫다고 하고.

 

고재승씨 부모님의 결혼사진. 고재승 제공

고재승씨 부모님의 결혼사진. 고재승 제공


 

3.

잘 지내냐는 말이 듣기 싫어요. 잘 지내냐는 말 자체가 싫은 게 아니라 물어보면 제가 대답해줘야 하니까. 지금 상황이 잘되고 있다고 말하기도 그렇고, 해결된 거 없다고 말하기도 싫고.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싫어서 잘 지내냐 그런 이야기가 싫은 것 같아요.

처음에 국토교통부 산하 항공철도사고조사위원회 쪽이 우리에게 장소를 묻는 연락이 왔어요. 공청회를 무안공항에서 하면 어떻겠냐고. 그래서 우리는 무조건 국회에서 해야 한다고 전달하고 대표단이 만나 이야기해봐야 할 것 같아 세종시에 가서 만났어요. 그때 공청회를 2025년 12월 초에 하겠다고 하더라고요. 우리는 “국토부 산하의 사조위가 독립하고 제대로 갖춰질 때까지 조사를 중지하라는 입장이다, 그래서 공청회를 할 수 있다고 말씀드릴 수 없다, 만약 공청회를 하겠다면 그전에 정보공개를 다 하라, 할 수 있는 거는 다 하고 공청회를 하라”고 말했고요. 처음엔 “장소도 국회로 하겠다, 자료도 가능한 것은 다 공개하겠다”고 했어요. 솔직히 참사 1주기가 다가와서 유가족들이 예민한 상황에 굳이 이때 해야 하나 싶었어요.

중간보고서를 1년 안에 꼭 내야 하냐고 물어봤더니 규정이 그렇대요. 그런데 그걸 무조건 지켜야 하는지 알아봤더니 아니더라고요. 그리고 중간보고서에 공청회 내용이 꼭 들어가야 하느냐, 그것도 아니었더라고요.

너무 이해가 안 됐어요. 무엇보다 유가족이 공청회에 직접 참여할 수 없다고 하더라고요. 항의했더니 그러면 유가족이 추천하는 전문가를 통해서 이야기할 수 있다고 했어요. 그럼 유가족이 전문가를 통해서 이야기하려면 사조위에서 자료를 줘야지 뭔가를 보고 우리가 물어볼 게 있을 텐데, 자료도 안 주면서 어떻게 그런 구조를 말하는지…. 게다가 참여하는 전문가도 무조건 되는 게 아니고, 유가족이 추천한 전문가를 승인해줘야 참여할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럼 이게 무슨 공청회냐, 누구나 와서 말하고 질문할 수 있는 게 공청회인데. 그래서 유가족들이 한겨울에 삭발하게 된 거죠.

2025년 12월1일 서울 용산구 대통령실 인근에서 항공철도사고조사위원회의 공청회 저지를 위해 삭발하는 고재승씨. 정택용 제공

2025년 12월1일 서울 용산구 대통령실 인근에서 항공철도사고조사위원회의 공청회 저지를 위해 삭발하는 고재승씨. 정택용 제공


4.

저는 이번 참사를 통해 나라에 대한, 사회시스템에 대한 신뢰를 잃었어요. 솔직히 말하면 처음에는 믿었죠. 한국이 세월호 참사와 이태원 참사라는 두 번의 대형 참사를 겪으면서 피해자 중심의 시스템을 갖추고 조사가 이뤄지게 된 줄 알았어요. 그런데 여전히 “법이 이래서 할 수 없고, 이거는 저래서 할 수 없다”고 똑같은 핑계를 대더라고요. 1년 동안 국회에 가면 “그건 내가 조사할 수 없다”, 대통령도 “지켜보자”, 경찰도 “열심히 하고 있다”였어요. 게다가 유가족은 인터넷 댓글로 2차 가해를 당했죠. 사실 저는 댓글은 무시하고 크게 상처받지 않는데 오히려 국가의 무관심과 행정적으로 지연시키는 태도가 2차 가해로 느껴졌어요. “내가 한 거 아니야. 나는 몰라.” 국가 폭력이 이런 거구나 싶었죠.

유가족협의회 활동을 하면서는 정부 행사에 쫓아가야 하고, 가기 싫어도 가서 한 번이라도 더 만나야 하는데 막상 가면 들러리가 된 기분이 들어요. 대통령 경청 행사도 그렇고, 광복절 행사도 그렇고. 우리가 굳이 참여해야 하는 자리가 아닌데도 가야 해요. 항상 ‘우리가 왜 여기 왔나’ 그런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가서 얼굴이라도 한번 비춰야 참사가 알려지니까 또 어쩔 수 없이 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저는 원래 앞에 나서기 싫어해서 이전에는 시민사회 활동 그런 거 한 적이 전혀 없었어요. 여기저기 다니면서 많은 걸 알게 됐어요. 우리나라에 모르는 사건 사고가 참 많았구나. 억울하신 분도 많구나. 지금까지 몰랐던 아픔들에 대해 되돌아보게 됐어요. 길 지나가다가 누가 “동참해주세요, 여기 서명해주세요” 하면 그런 거에 전에는 서명하지 않았어요. 이제는 그냥 다 하죠, 어디 가든.

용산에서 1인시위를 시작했는데 거기서 여러 사람을 만났어요. 환경운동 하는 분들, 개인적으로 억울한 분들, 본인의 생계를 위해 투쟁하는 분들, 인권운동 하는 분들…. 제가 상황이 이렇게 되다보니 옛날에는 관심이 없었는데 이제는 자연스럽게 저도 동참하게 되더라고요. 아무 상관이 없어도 그냥 옆에 가서 손팻말 하나 들고 서 있고, 끝나면 응원해주고. 그러다보니 신공항 백지화 활동을 하는 분들도 자연스럽게 알게 됐고, 또 요즘엔 팔레스타인, 이집트 난민, 이런 분들 보면 그냥 가서 곁에 서 있게 되더라고요. 난민 부모들은 시민에게 열심히 설명하고 있는데 옆에서 아이는 킥보드 타며 놀고 있고. 그거 보니까 자연스럽게 마음이 가서 옆에 서 있고 그래요. 가족이 제대로 지켜지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어서 그냥 서 있었던 것 같아요. 나는 내 가족을 지키지 못했지만 저 사람은 가족을 지키려는 건데, 내가 이 손팻말 하나 들고 서 있는 건 힘든 일이 아니다 싶어요.

고재승씨 부모님. 고재승 제공

고재승씨 부모님. 고재승 제공


5.

참사 이전으로 돌아가고 싶은 한 순간이 있다면, 용산역으로 돌아가면 딱 좋을 것 같아요. 부모님이 여행 가기 전날에 잘 다녀오시라고 배웅해드렸거든요. 큰누나랑 제 딸이랑 조카 셋, 이렇게 용산역에서 잘 다녀오라고 그랬는데 그때로 돌아가서 말리고 싶어요. 돌아가고 싶어요.

 

이소아·정나라·허정 ‘공익변호사와 함께하는 동행’ 활동가

*2025년 11월25일 ‘공익변호사와 함께하는 동행’ 활동가들이 유가족 고재승씨를 인터뷰하고 기록했습니다. 이 글은 ‘무안공항 참사 이후를 사는 사람들’ 4회로, 한겨레21 누리집을 통해 이전 연재물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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