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은하 〈매거진t〉 편집장
가슴 뛰는 새로운 만남보다는 익숙한 것과의 무력한 작별이 많아지는 나이로 접어들다 보니, 점점 흐지부지한 이별만 늘어난다. 이별인 것도, 이별이 아닌 것도 아닌 미적지근한 안녕. 가령 좋은 친구로 남기로 약속하며 헤어진 애인이라든지, 더 이상 공동의 화제를 만들 의지도 없지만 예전엔 친했지 하는 기억만으로 유지하고 있는 친구라든지, “너 ○○○ 되게 좋아했지?” 라고 물어보면 “뭐 싫어하지는 않았지”라고 얼버무리는 한때의 취향 같은 것들. 그런 애매한 이별은 대부분 그렇게 해서라도 붙잡고 싶은 미련일 수도, 그토록 매정하게 떨쳐버릴 필요까지 있을까 하는 심약함일 수도, 아니면 그냥 귀찮아서일 수도 있다. 그것도 아니라면 새로운 사랑이 오지 않으면 어쩌지, 이 나이에 친구라는 걸 다시 만들 수 있을까, 나에게 또다시 무언가에 뛰어들 열정이 남아 있는 걸까, 하는 남은 삶에 대한 최소한의 보험 같은 것일지도.
애매하고 흐지부지한 이별

새로운 취미를 만들거나, 새로운 친구를 만날 때나, 새로운 사랑을 시작할 때나 우리는 그 끝의 풍경을 굳이 기억하지 않는다. 시작의 환희는 종종 많은 이들을 근시안의 천치로, 단기 기억상실증 환자로 만들어버리고 마니까. 하지만 모든 열정엔 끝이 있고, 모든 자극엔 불감의 시대가 도래하며, 모든 관계엔 이별의 순간이 찾아온다. 그리고 시작할 때의 노력과 용기와 수고는 어떤 것과 이별하는 순간에도 공평히 필요하다. 하지만 이별의 고통은 종종 많은 이들을 관계의 사형선고를 믿지 않는 현실도피주의자로 혹은 그 모든 것의 영속과 반전을 믿는 몽상가로 만들어버리고 만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는 인간이 죽고 나서 사후 세계로 진입하기 전에 머무르는 역, ‘림보’의 풍경을 담고 있다. 이곳에 당도한 죽은 자들은 자신의 인생에서 단 한 가지 기억만을 선택할 수 있다. 그 신중하고 자못 고통스러워 보이기까지 하는 선택의 과정은 지난 생과 이별하는 가장 예의 바른 통과의례다. 그들은 결국 그 기억 하나를 자신만의 영화로 만들고, 영화가 상영되는 극장에 앉은 채 마침내 다음 세계로 떠난다. 물론 그곳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도 있다. 바로 수많은 기억 속에서 도저히 하나만을 선택하지 못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이제는 바꾸려 해도 바꿀 수 없는 기억의 숲에서 그렇게 길을 잃고 쓸쓸하게 헤맨다.
움켜쥔 주먹은 결코 좁은 병목을 빠져 나오지 못한다. 다음 세계로 가기 위해선, 앞으로 걸음을 내딛기 위해선 버리고 가야 한다. 이별하고 가야 한다. 그것이 관계건 기억이건 간에, 놓지 못할 만큼 절실하지 않다면, 혹은 더 노력할 수 없는 상태라면 그것을 단순히 소유하고 있다는 위로는, 끈을 놓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어떤 운동 에너지도 갖지 못한다. 손에 힘을 푸는 순간 다시 무언가를 잡을 수 있는 기회가 비로소 주어진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찰나. 어쩌면 우리가 지나온 삶에서 간직할 수 있는 건 그런 기억 하나쯤이면 족할지도 모른다.
물론 불행히도 정말 그 사랑이 마지막 사랑이었는지도, 그 친구가 마지막 친구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버려본 사람들은 안다. 제대로 이별해본 사람들은 안다. 언제든 다음은 온다는 것을. 혹 그것이 우리 인생의 베스트는 아니라 할지라도, 다시 노력해야 할 어떤 것들이, 다시 욕심나는 무언가가, 다시 열정을 태울 새로운 사람이.
가장 적극적인 준비운동
누군가 나에게 오는 2008년을 위해 무엇을 준비하겠냐고 묻는다면, 2007년의 많은 것들과 열심히 이별하겠노라고 답할 것이다. 그것이 새로운 해를 맞이하는, 새로운 고민들을 향한, 새로운 인연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일 것이다. 아니 어쩌면 새로운 만남을 위한 가장 적극적인 준비운동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여기 2007년에, 머리 몰래 가슴에 쌓아둔 몹쓸 미련들에, 게으름으로 방치해두었던 모든 관계들에 이제 마지막 인사를 고한다. 한때 나의 것이었으나 더 이상 나의 것이 아닌 것들아, 안녕. 그리고 한 번도 나의 것이 아니었으나 장차 나의 것이 될 모든 것들도, 안녕.
안녕, 뜨겁게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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