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적 오류로 졸지에 이름이 바뀌어버린 정인환 기자의 ‘집 나간 이름 찾기’… 대법원 결정 이후 북적대는 개명 신청 창구에서 고달픈 삶의 풍경을 보다
▣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에, 무슨 말이에요? 이름이 없다니? 다시 한 번 찾아보세요.”
처음엔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이 양반이 뭘 잘못 눌렀겠지’ 싶었다. 그런데 두세 번 되풀이해 확인해도 마찬가지였다. ‘한 번 더’를 한 번 더 말하려는 찰나 구청 직원의 눈꼬리가 조금씩 올라가는 게 느껴졌다.
‘정주환’으로 군대 다시 가는 악몽
“저기요, 이름이 혹시 정주환씨 아니세요?”
“건 또 무슨 소리예요? 제 주민등록증 손에 들고 계시면서.”
“본적지와 주민등록번호를 대조해보니, 정인환씨가 아니라 정주환씨로 나오는데요.”
결혼 1주년 기념식에 태어난 딸아이 출생신고를 하기 전까지 혼인신고를 미루고 있었다. 핑계는 ‘호주제 철폐 그날까지 끝까지 투쟁하자’였지만, 사실은 ‘천성이 게으르고 밥을 많이 먹기 때문’이다.
혼인신고를 하지 않아도 ‘벌금’이란 제재 수단이 없다는 것도 게으름을 부추겼다. 하지만 출생신고를 늦게 하면 벌금을 물어야 했다. 그래서 지난 1월 초 짬을 내 구청 호적계를 찾아갔던 것인데…. 허 참, 내 ‘이름’이 사라져버렸단다.
호적이 어떻고 주민등록이 어떻고 한참 열을 올려봤지만 결론이 나지 않았다. 마침내 호적계 담당자는 “간혹 호적 전산화 과정에서 한자를 잘못 옮긴 경우가 있으니, 본적지에 확인해보면 될 것”이라며 “20~30분만 기다리라”고 말했다. 담배 한 대 피우고 돌아오니 담당자의 얼굴이 환하게 펴져 있다. ‘뭐 좋은 소식이라도…?’
“원적을 대조해봤는데, 정주환씨가 맞다는대요!” 의기양양, 팩스로 받은 호적 원본을 들이민다. 분명 인(寅)자가 주(宙)로 바뀌어 있다. ‘님’이라는 글자에서 점 하나를 붙이면 ‘남’이 되는 법이다. ‘인’자 밑에 있던 점 두 개가 사라졌으니, ‘인환’이로 만 36년을 넘게 살아온 나는 그 순간부터 ‘주환’이가 됐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고 했던가. 이름을 잃어버린 나는 여러 개의 ‘몸짓’으로 항의 표시를 했지만, 잃어버린 이름을 찾기 위해선 ‘법원에 가야 한다’는 대답만 들어야 했다. “호적상의 이름을 고치라”는 게다. “얼마나 걸리느냐”고 물었더니, “두어 달 잡아야 한다”고 했다.
‘그럼 출생신고는? 아니, 정확히 말해 출생신고를 늦게 해서 내야 하는 벌금은?’ 친절한 구청 직원은 “주민등록상의 이름을 호적에 맞게 일단 고친 뒤, 출생신고를 하시죠. 그런 다음에 개명 신청을 하시면 된다”고 조언했다. ‘인환’이든 ‘주환’이든 내 인생 뭐가 달라지겠느냐만, 기분은 과히 좋지 않았다. ‘니가 그냥 고쳐주면 안 되겠니?’ 하는 말이 목 언저리까지 올라왔지만, 달리 대안이 없었다. 호적의 ‘주환’이가 주민등록의 ‘인환’이를 몰아내는 데는 신청서 한 장으로 족했다.
내 주민등록등본에서 딸아이의 이름과 뒷번호가 ‘30’으로 시작하는 주민등록번호가 인사를 건넨 것은 낯설은 설렘이었지만, ‘정주환’으로 바뀌어버린 내 이름에선 이물감만 느껴졌다. 한데…, 주민등록상의 이름이 바뀌었는데도 달라지는 건 별반 없었다. 그 무렵 낮잠을 자다 “정주환씨는 군복무를 한 기록이 없다”며 군대에 다시 가는 흉몽을 꾸긴 했지만, 집이나 회사에서 친구들을 만나서도 나는 계속 ‘정인환’이었다. 그러다 보니 호적의 이름을 바꿔야 한다는 사실을 그만…, 잊고 말았다. 그렇게 한참이 지났다.
“인생이 고달파서 이름이라도…”
“여보, 이상해~!”
개명 신청을 해야겠다고 결심한 건 ‘마누라 선생님’ 때문이다. 아이 예방접종을 하러 병원에 갔더니 “남편 이름이 정주환씨냐”고 하더란다. 그새 의료보험공단의 데이터베이스까지 ‘인환’이를 몰아내고 ‘주환’이가 자리를 차지한 모양이다. 조금씩 ‘주환’이가 ‘인환’이의 흔적을 지워가고 있다는 생각에 더는 미뤄둘 수 없었다.
대법원이 지난 6월26일 내놓은 자료를 보면, 최근 개명허가 신청이 급증하고 있다. 지난해 11월 “범죄 시도·은폐 등 뚜렷한 문제가 없으면 원칙적으로 이름을 바꿀 수 있도록 허가해야 한다”는 결정을 내린 이후 월평균 4천~5천 건이던 신청 건수가 두 배가량 늘었다는 게다.

실제로 대법원의 결정이 나오기 전인 지난해 10월엔 전국 법원에 접수된 개명허가 신청 건수가 5694건에 이른 반면, 11월과 12월엔 각각 7536건과 1만1536건으로 늘었다. 이런 추세는 올해도 이어져 △1월 1만1161건 △2월 1만2657건 △3월 1만590건 △4월 7685건으로 집계됐다. 개명 신청 허가율도 이전의 80% 수준에서 90%를 넘어선 것으로 보고 있다.
개명을 원하는 이들이 많긴 많은 모양이다. 인터넷 검색엔진에서 ‘개명’ 두 글자를 쳐넣으니 정보가 넘쳐났다. 개명허가 신청서 양식까지 내려받을 수 있었지만, 어차피 한 번은 법원에 가야 했다. 개명 신고에 필요한 서류를 챙겨들고 3월 초 어느 볕 따뜻한 날 관할 법원으로 향했다. 3층에 마련된 호적계는 일찍부터 사람들로 북적였다. 아이를 들쳐업고 이혼서류를 내러 온 새댁부터 손자 이름을 바꿔주려고 온 할아버지까지 찾아온 이유는 다양했다. “왜 도장을 안 찍어, 이 인간아!” 복도에선 가냘픈 몸매의 중년 여성이 남편으로 보이는 남성에게 우산을 휘두르고 있었다.
“번번이 사업에 실패하고…, 인생이 하도 고달파서 이름이라도 바꿔보고자 하오니….”
허름한 차림에 낡은 서류가방을 든 중년 남성이 반쯤 벗겨진 머리를 긁적이며 한쪽에서 ‘개명허가 신청 이유’를 적고 있었다. 곁눈질을 의식했는지 몸을 돌리는 그의 귓불이 뜨겁다. 신산스런 그의 삶이 이름을 바꿔서 조금이라도 나아질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인터넷에서 얻은 정보 외에도 몇 가지 첨부해야 할 서류가 있어 그날은 신청서 제출을 포기해야 했다.
개명 신청을 위해 제출해야 할 필수 서류는 법원 양식의 개명허가신청서와 호적·주민등록등본, 그리고 ‘범죄기록회보서’(전과 조회)다. 관할 경찰서 과학수사 담당부서에 가서 떼면 되는데, 범죄 목적으로 이름을 바꾸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란다. 지문을 찍은 뒤 이를 경찰청 데이터베이스에 등재된 ‘전과자’ 지문과 대조하는데, 괜스레 숨이 가빠졌다. 이 밖에 개명 신청 이유를 뒷받침할 수 있는 각종 소명자료는 법원 호적계에 문의하면 적절히 알려준다.
개명 신청 이유를 쓰는 건 쉽지 않았다. ‘그럴싸해 보여야 한다’는 생각에 공문서 흉내를 내다 보니 더 이상해졌다. 법원을 출입한 경험이 있는 동료에게 보여줬더니 “나라면 다시 쓰겠다”고 약을 올린다. 몇 차례 수정한 끝에 제법 그럴듯해 보여 다시 보여줬지만 “차라리 법무사에게 맡기라”고 진지하게 충고한다. ‘우씨~.’ 만만치 않다.
우선 이름이 뒤바뀐 걸 알게 된 사연을 썼다. ‘호적 전산화 과정의 오류 아니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물증이 없어 그만뒀다. 이어 대학 졸업장과 은행통장 사본, 예전에 쓰던 주민등록증과 여권·운전면허증 등 공인 신분증, 재직증명서 등 차례로 언급했다. “정인환으로 교육을 받았고, 은행거래도 하고 있으며, 국가에서 발행한 신분증에도 ‘정인환’으로 돼 있으며, 회사에서도 ‘정인환’으로 일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지방선거 투표도 할 수 없었네
“이 사건의 개명 신청은 이유 있으므로 주문과 같이 결정한다.” 신청서를 낸 지 한 달여 만인 지난 5월17일 법원의 결정이 내려졌다. 개명 허가 결정을 받은 뒤 한 달 안에 호적과 주민등록을 바로잡지 않으면 법원의 결정이 무효가 된단다. 동사무소를 찾아가 결정문을 들이밀며 “주민등록상의 이름을 바꿔달라”고 했더니, “구청 호적계는 다녀왔느냐”는 답이 돌아왔다. ‘인환’이로 돌아가는 일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구청 호적계에서도 이름을 곧바로 되찾을 수 없었다. 결정문을 본적지 호적계로 보낸 뒤, 호적 원본을 바꿔야 한단다. 이를 다시 관할 구청 호적계로 통보해주면 주민등록상의 이름이 바뀌게 되는데, 구청 직원은 “1주일에서 열흘 정도 걸릴 테니 그리 아시라”고 했다. 때마침 5·31 지방선거일이 다가왔다. 선거인 명부에는 ‘주환’이가 투표권을 주장하고 있었다. 가지고 있는 신분증은 ‘인환’이뿐이니, 결국 ‘주환’이도 ‘인환’이도 투표를 할 수 없었다.
6월12일 오전 다시 동사무소를 찾았다. 호적등본과 주민등록등본을 떼봤다. ‘마누라 선생님’의 남편이 익숙한 이름을 한 사내로 바뀌어 있었다. ‘허, 이거 나중에 딸아이가 커서 ‘출생의 비밀’을 밝히라고 떼라도 쓰는 거 아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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