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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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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 사람, 그리고 마을

왕초보 트레일러너의 15시간 달리기

100km 완주로 천변만화 제주를 온몸으로 껴안다
등록 2017-05-23 18:29 수정 2020-05-03 04:28
김현대 선임기자가 둘쨋날 제주 따라비오름으로 올라서는 삼나무 숲길을 달리고 있다.

김현대 선임기자가 둘쨋날 제주 따라비오름으로 올라서는 삼나무 숲길을 달리고 있다.

2017년 5월14일.

새벽 4시30분, 눈이 번쩍 떠졌다. 오늘은 내 인생의 날이다. 사흘간 100km를 뛰는 트레일러닝의 완주자가 될 수 있을까.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어주고 근육 테이핑을 한다. 발가락 사이엔 바셀린을 발랐다. 온몸이 욱신욱신, 축축 늘어진다. 50대 후반인데 이만한 게 얼마나 다행인가. 크게 고장난 곳은 없다. 걱정했던 무릎도 약간 시큰거리는 정도다.

“김현대 장하다!” 이틀 동안 달린 거리가 58km. 첫날 제주 한라산 구간 22km, 둘쨋날 표선면 가시리마을 따라비오름 구간 36km를 오르내렸다. 한라산 구간은 원래 32km였으나 비가 많이 내려 안전 문제로 10km 단축됐다.

오늘은 성산포 북쪽 구좌읍 종달리 해변에서 표선민속촌까지 32km, 제주섬 동쪽 끝에서 아래쪽 해변길을 서쪽으로 4분의 1쯤 달린다. 사흘 동안 동고동락한 100km 도전자가 67명. 나는 다시 한번 마음속으로 외쳤다. “거친 언덕길은 대부분 지났고 이제 평지이니 못 달리면 걸어서라도 갈 수 있겠지!”

5시간 뒤 나는 한껏 탄성을 질렀다. ‘완주자’(Finisher)라고 선명하게 새겨진 셔츠를 입고 메달을 입에 물었다. 닷새가 지났다. 트레일러닝에서 만나고 느낀 자연과 사람들의 기억이 갈수록 또렷하다. 아름다운 가시리마을을 다시 달리고 싶다.

자연
둘쨋날 100km 선수들이 ‘제주 오름의 여왕’이라는 따라비오름을 올라서고 있다.

둘쨋날 100km 선수들이 ‘제주 오름의 여왕’이라는 따라비오름을 올라서고 있다.

5월12일 아침 7시, 영실 아래쪽 법정사에서 첫날 오름짓을 시작했다. 비가 내리는 한라의 둘레길은 그 빛이 신비롭고 그 향이 웅숭깊다. 1시간쯤 달려 영실 탐방로 입구 체크포인트1(CP1)에 도착하니 8시10분이다. 내 뒤로 네댓 사람 될까? 주스를 내리 세 잔 마시고 바나나 토막을 서너 개 달게 삼킨다. 못해도 열 번은 오른 한라산이지만 종일 비가 내리는 한라를 껴안기는 처음이다.

오늘따라 사람을 홀리는 한라의 자태가 예사롭지 않다. 병풍바위가 가까워지면서 시야가 확 트이더니 탄성이 터진다. 멀리 건너편 능선 벽, 수직으로 쏟아져내리는 두 줄기 장쾌한 폭포수가 장관이다. 달리기는 어느새 뒷전, 서로 사진 찍어주고 더불어 찍느라 야단법석이다. 숨이 가빠오고 허벅지와 무릎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한 초보 트레일러너는 살짝 한 컷 끼어든다. 비 오는 한라를 품고 두어 시간 달리니 트레일러너가 된 뿌듯함이 가슴 깊이 채워진다. 윗새오름으로 올라서니 보랏빛 철쭉꽃밭이 이어졌다. 이렇게 투명한 보랏빛을 다시 볼 수 있을까. 체온이 떨어질세라 다리 힘이 풀릴세라 스쳐 보내는 것이 몹시 아쉬웠다.

둘쨋날은 오름과 목장, 곶자왈(화산숲), 잣성을 낀 제주 중산간의 속살을 제대로 쓰다듬는 코스. ‘오름의 여왕’이라는 해발 342m 따라비오름을 낀 ‘짧은 갑마장길’이다. 갑마장은 조선시대 최고의 군마를 사육하던 목장이다. 지금은 가시리마을 주민들의 700만m² 가까운 광활한 공동 목장으로 4월엔 노란 유채꽃이, 가을엔 억새가 천지를 뒤덮는다. 부드러운 목장길을 달리다가 끊어지면 곶자왈 지대로 들어선다. 깊은 산속 서늘한 기운이 올라온다. 따라비오름 정상에 올라서는 순간, 3개의 작은 분화구가 뒤틀리듯 이어진 기묘한 모습이 달리던 걸음을 붙잡는다. 가쁜 숨을 가라앉히며 오름을 내려서니 옛날 목장의 경계라는 돌담이 이어진다. 잣성길이다.

셋쨋날은 해변이다. 중간중간 풀밭길로 접어들었다가 자전거길로 들어서기를 반복한다. 종달리 해변에서 성산포가 보이는 작은 다리를 건너 섭지코지로 달린다. 후미 그룹의 내 동료는 신천리 목장의 노란 야생화 밭에 들어서자 아예 눕듯이 털썩 주저앉는다. 끝없이 펼쳐진 목장과 바다가 맞닿은 풍경 속에 자신을 한 컷 담으려는 욕심에 갖은 포즈를 취한다. 30km 지점에서는 밀물이 들면 무릎까지 바닷물에 잠긴다는 다리를 만났다. 불행히도 밀물이 약해 콘크리트 다리가 알몸을 그대로 드러났다. 골인 지점을 코앞에 둔 표선 해비치 해변에서는 한껏 기분을 냈다. 돌아가는 원래 코스를 버리고 1km가량 바다를 첨벙첨벙 가로질렀다.

푸른 바다와 노란 야생화가 어우러진 제주 신천리 목장 주변. 나란히 달리는 선수들의 모습이 싱그럽다.

푸른 바다와 노란 야생화가 어우러진 제주 신천리 목장 주변. 나란히 달리는 선수들의 모습이 싱그럽다.

쉼 없이 비가 내린 첫날, 선두그룹 선수들이 제주 윗새오름 반환점을 돌아 내려오고 있다.

쉼 없이 비가 내린 첫날, 선두그룹 선수들이 제주 윗새오름 반환점을 돌아 내려오고 있다.

사람

제주 국제트레일러닝대회 100km 도전자는 사흘 동안 하나가 된다. 달리기만 같이 하는 게 아니라 마을 공동 목장에서 같이 먹고 같이 잠을 잔다.

내년에 환갑인 김홍도씨는 에너지가 넘친다. 양말부터 배낭까지 어설픈 초보자를 열정적으로 격려해준다. 10년 이상 마라톤 경주에 참여하다 몇 년 전부터 트레일러닝에 푹 빠졌다. 해변길 섭지코지 근처에서 10여km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함께 달린 40대 이경화씨는 철인대회 심판이다. “트레일러닝 한 번 달리면 1년은 몸이 유지된다”며 뒤처지는 나를 북돋웠다. 104차례 마라톤 완주 경력의 고경남씨는 나보다 한 살 많은 강인한 여성이다. 후미 그룹에서 눈빛으로 정을 나누는 친구가 되었다. 가장 힘들었던 둘쨋날 36km를 달렸을때 서로 감격적으로 껴안아주었다.

오랜 독자라는 두어 살 위 이문호씨와는 해변 구간 절반 이상을 함께했다. 그 또한 장거리 초보자였으나 한껏 느끼고 즐기고 쉬어가면서 끝내 완주자 메달을 받았다. 40대 정상수씨와 유주인씨는 제주시에서 실내 암장을 하는 전문 클라이머 동료들, 널찍한 야전침대를 들고 와 슬리핑백에 몸을 눕히는 여러 참가자의 부러움을 샀다. 2년 전부터 꾸준히 훈련해 사흘 100km를 거뜬히 완주했다. 올해 일흔의 철인 이희찬씨는 사흘 내내 아픈 무릎을 끌면서도 포기하지 않았다. 제주 출신 한재진·변영심 부부는 7회째인 올해 대회까지 거의 매해 완주 기록을 세웠다.

마지막날 막걸리 파티를 하면서는 헤어지기가 못내 아쉬웠다. 자원봉사자들도 트레일러닝의 매력을 함께 즐겼다. 저녁이면 쏟아지는 별빛 아래 막걸리를 나누던 정겨움을 잊을 수 없다. 내년에 다시 볼 수 있겠지. 얼마나 반갑게 껴안아줄까.

기억: 도전과 마을
마지막날 제주 표선민속촌의 골인 지점을 통과하는 김현대 선임기자. 사흘 동안 15시간여 100km를 달렸다.

마지막날 제주 표선민속촌의 골인 지점을 통과하는 김현대 선임기자. 사흘 동안 15시간여 100km를 달렸다.

고백한다. 나는 마라톤을 완주한 적도, 20km 단축 코스를 달린 적도 없다. 지난해 한겨레신문사가 제주트레일러닝대회를 공동 주최하면서 얼결에 첫날 32km를 달렸다. 무릎이 고장나 둘쨋날부터 포기한 게 내 경력의 전부다. 올해도 무릎이 시원찮아 달리기 연습을 많이 못했다. 대신 크로스핏으로 몇 달 동안 열심히 땀 흘렸다. 그렇게 기초 체력을 다진 덕을 톡톡히 봤다. 지난해 중도 포기한 실패의 경험도 보약이 됐다. 순간순간 더 내달리려는 충동이 일 때마다 지난해를 떠올리며 ‘욕심’을 눌렀다. ‘끝까지 가자.’ 주문을 외우고 또 외웠다.

셋쨋날 결국 우려했던 무릎 이상이 왔다. 달릴 수 없었다. 다행히 절반 이상 지나온 터여서 걸어서 완주할 수 있었다. 지칠 대로 지친 이문호씨와 땡볕에 앞서거니 뒤서거니 서로를 격려했다. 공식 기록을 찾아봤다. 나는 사흘 동안 15시간3분34초, 매일 5시간 전후를 달렸다. 1등 노희성 선수의 기록 7시간14분04초보다 두 배 조금 더 되는 기록이다. 이만하면 첫발떼기로는 자랑스러워해도 되겠지. 트레일러닝 도전자들은 기록에 연연하지 않는다. 자연과 함께하는 느낌을 새기고, 나를 극복하는 도전을 즐긴다. 같은 곳이라도 매순간 달라지는 천변만화의 역동성을 만끽한다.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멋진 매력이다.

제주트레일러닝대회의 숨은 키워드는 ‘마을’이다. 마을의, 마을에 의한, 마을을 위한 축제다. 둘쨋날 36km 구간은 온전히 마을 공동 목장을 달린다. 마을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마을 사람들이 완주자에게 국수를 말아준다. 7년 전 제주트레일러닝대회를 처음 시작해 올해까지 이끈 안병식 코디네이터는 가시리마을 토박이다. 가시리마을 이장이 개회사를 했다. 아마 리 단위 마을에서 열리는 국제대회로는 제주트레일러닝대회가 유일할 것이다.

제주국제트레일러닝대회


“올가을엔  논스톱  100km  달려요”


제주 가시리마을에서 열리는 국제트레일러닝대회는 올해 7회를 맞았다. 지난해부터 한겨레신문사가 공동 주최로 참여했다. 사흘 동안 100km 코스를 달리는 것 외에 일반인이 즐기는 5km·10km 대회도 함께 열렸다. 25개국 860명이 참여했고 자원봉사자 200명이 힘을 보탰다. 억새가 만발하는 10월13~14일에 가을대회를 연다. 올해 처음 한 번에 100km를 달리는 논스톱 방식을 도입했다.
트레일러닝은 오프로드(off road)의 모든 지형을 달리는 아웃도어 활동이다. 산길, 숲길, 초원, 해안, 사막 등을 달리는 것이 모두 포함된다. 산악마라톤, 사막마라톤, 정글마라톤, 극지마라톤 등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트레일러닝대회는 유럽을 중심으로 2000년대 이후 급속히 확산되면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국제트레일러닝협회(ITRA)가 출범한 것은 불과 5년 전인 2012년이다. 제주대회는 2013년 국내 처음 ITRA의 공식 인증을 받았으며, 완주자는 3점의 포인트를 공인받는다. 가장 권위 있는 대회는 ‘울트라트레일몽블랑’(UTMB)으로 지난해 70여 개국 8천여 명이 참가했다.
아시아에서는 일본과 홍콩에서 트레일러닝대회가 활발하게 열린다. 일본의 경우 1948년 시작된 후지산악레이스가 효시이고, 본격적인 트레일러닝대회로는 1980년대 후반 시작된 다케루산 스카이뷰 울트라트레일이 꼽힌다. 일본의 트레일러닝대회는 350여 개나 되며 트레일러닝 인구도 15만 명 정도다. 홍콩에서는 1979년 시작된 옥스팜트레일워커 100km대회에 해마다 5천 명 이상이 참여한다. 2000년대 이후 트레일러닝 인구가 급증하면서 지난해에만 160개 대회가 열렸다. 중국에서도 최근 트레일러닝대회가 많이 생겼다. 국내에서는 제주 외에 비무장지대(DMZ), 경남 거제, 강원도 평창, 경남 지리산 등지에서 20~30개 대회가 열린다. 트레일러닝 인구는 1500명 정도이다.
ITRA는 몇 가지 트레일러닝대회 규칙을 제정했다. 필요한 장비는 배낭에 담아 달리고, 외부 지원에 의존하지 않고, 어려운 사람이 있으면 서로 돕고, 자연환경을 지키는 것이다.


김현대 선임기자 koala5@hani.co.kr
사진 유희선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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