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밸리브리, 나 떨고있니

등록 2008-05-16 00:00 수정 2020-05-03 04:25

김경욱 기자가 뛰어든 마필관리사의 세계, 배설물에 울고 경주 보며 울컥한 하루

▣ 글 김경욱 기자dash@hani.co.kr
▣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일부러 똥도 안 치우고 기다렸는데, 좀 일찍 오지….”

5월4일 새벽 경기 과천 서울경마공원 구내의 말 사육장인 주암마사. 말들에게 새벽 훈련을 시키던 홍대유(47) 조교사가 기자를 맞았다. 일일 마필관리사 체험을 위해 한국마사회 쪽과 미리 약속한 시간은 새벽 5시30분. 늦은 건 아니었지만, 그가 담당한 마사는 벌써부터 분주했다. “우리는 다른 마사보다 30분 일찍 하루를 시작해요.”

“아싸, 말똥 안치워도 된다!” 했더니

‘아차!’ 싶었다가 속마음은 이내 ‘아싸!’로 바뀌었다. 이곳에 오기 전부터 말의 배설물을 치워야 한다는 부담감이 밀려왔던 터. 빨리 마사 일을 시작했다니, 배설물은 벌써 치웠으리란 안도감이 스쳤다. 쾌재를 부르는 기자의 ‘뺀질거림’을 읽었을까. 홍 조교사는“말똥은 오후에 치우게 해주겠다”며 “우선 말 운동이나 시켜보라”고 잡고 있던 고삐를 넘겨줬다. “어, 어, 어, 엇….” 남세스러운 비명이 터져나온다. 고삐를 쥐고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홍 조교사가 조언해준다. “제일 순한 놈이니 걱정하지 말고 고삐를 꽉 쥐고 끌어요.” 오른손으로 고삐를 쥐고 천천히 한 걸음씩 움직였다. 말이 따라왔다. 말 이름은 ‘속전속결’이라고 했다.

말은 겁이 많고 예민하다. 경주마들은 특히 심하다. 낯선 사람이 만지려고 하면 물거나 앞다리를 들며 뛰어오른다. 특히 주의해야 할 점은 말 뒤에 서 있거나, 말을 다른 말의 뒤쪽으로 끌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말은 눈이 양옆에 달려 시야가 넓지만 자신의 뒤쪽만큼은 볼 수 없기 때문에 사람이나 동물이 뒤에서 나타나면 차는 버릇이 있다.

약 25분 동안 걷기 운동을 마치고 본격적인 새벽훈련을 시작했다. 관리사들은 말을 타고 주로로 나갔다. 달리기 훈련을 위해서다. ‘속전속결’은 전날 경주를 마친 터라 휴식을 취하게 했다. 한번 경주에 나가면 대개 4~6주 동안 다시 경기장에 서지 않는다. 최상의 몸 상태를 만들기 위해 충분한 휴식과 훈련이 필요한 까닭이다. 경주에서는 450~520kg 무게의 말들이 1천~2천m 구간을 평균 시속 60여km로 달린다. 이런 전력질주는 엄청난 에너지를 소비하기 때문에 평소 훈련 때는 가능한 한 시키지 않는다고 한다.

1500여마리의 말이 있는서울경마공원에는 총 54명의 조교사가 있다. 각 조교사별로 마사가 배정된다. 6조 마사의 홍 조교사는 7명의 관리사들과 22필의 말을 관리한다. 운동경기에 비유하자면 말은 선수, 조교사는 감독, 관리사들은 코치다. 마주는 조교사에게 말을 위탁하고 조교사는 관리사들을 고용해 말을 관리하고 훈련한다. 일반인들은 기수가 자신의 말을 관리하고 훈련도 시킨다고 생각하지만, 기수는 조교사들과 계약을 맺고 경주에서 말만 전문적으로 탈 뿐이다.

오전 6시20분. 훈련을 마치고 말과 조교사들이 마사로 들어왔다. 말을 바로 마방에 넣지 않고 다시 마사 앞에서 25분 정도 걷기 운동을 시켰다. 근육을 풀어주려는 것이다. 뒤이어 아침밥을 준다. 먼저 물을 주고, 밥통에 마른 풀과 발효시킨 풀, 당근, 발아보리, 사료 그리고 마지막으로 소금을 담는다. 말마다 식사량은 제각각. 하루 3번 식사하고 야식도 먹는다. 어떤 조교사들은 인삼가루, 마늘, 보약 등을 따로 먹이기도 한다.

말에게 아침을 먹이고 나면 관리사들도 아침을 먹는다. 식사를 마치고 나니 7시30분이 막 넘어간다. 이때부터 좀 한가한 시간이다. 관리사들은 씻거나 TV를 보면서 쉰다.

준비해간 각설탕은 꺼내보지도 못하고

말들이 점심을 먹는 오전 11시30분께 마사가 다시 분주해졌다. 특히 이날 오후엔 홍 조교사의 ‘위그’(4)와 ‘밸리브리’(6)가 경주를 앞두고 있어 긴장감마저 감돌았다. 오후 5시40분에 시작되는 10경주에 나서는 밸리브리는 랭킹 1위의 말이다. 홍 조교사는 “오늘 우승한다면 6연승이다. 쉽지 않은 기록이지만 자신 있다”고 했다.

밸리브리의 부담중량은 62kg. 몸무게 50kg인 기수가 탄다고 했을 때 12kg짜리 짐을 말 등에 더 얹어야 한다는 뜻이다. 경주 기록이 좋은 말일수록 무거운 짐을 지고 뛰어야 한다. 경마는 이렇게 핸디캡 경기로 진행된다. 특정 말의 독주를 막고 모든 출주마들이 우승할 수 있는 기회를 골고루 주기 위해서다. 무거운 안장을 사용하거나, 기수가 무거운 장화를 신는 등 부담중량을 맞추는 방법도 여러 가지다.

영화 에서 보이듯 각설탕을 좋아하는 말이 있을까? 홍 조교사는 “말은 대개 단것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만약을 대비해 각설탕을 준비한 것이 빛을 발하는 순간, 하지만….

“밸리브리에게 각설탕을 줘도 될까요?” “녀석은 각설탕보다 당근을 좋아해요.” 홍 조교사가 당근을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 넘겨줬다. “먹이면서 말과 교감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말이 당근을 먹는 것만 봐도 어디가 안 좋은지 진단할 수 있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낯선 얼굴이라 혹시 물지 않을까’ 걱정하며 손바닥에 당근을 올려놓고 조심스레 내밀었다. 밸리브리는 기자보다 더 조심스럽게 받아먹었다. 당근을 먹을 때마다 손바닥이 간지러웠다. ‘교감’이라는 조교사의 말을 떠올렸다. 속으로 조용히 말했다. ‘잘 뛰어, 밸리브리.’

경기 시작 “아아, 출발은 좋았는데…”

뒤이어 6조 마사의 막내인 박창서(33)씨와 마방 청소를 했다. 톱밥과 건초가 깔린 마방 바닥을 20일~한 달 간격으로 갈아준다. 이날은 4살배기 경주마 ‘서울축제’의 마방 바닥을 갈아주는 날. 말을 밖으로 데리고 나온 뒤 마방에 들어갔다. 암모니아 냄새가 코를 찔렀다. 박씨가 마스크를 건넸다. 바닥의 묵은 건초를 걷어낸 뒤, 톱밥을 작은 콩처럼 압축시킨 ‘펠릿’이라는 것을 깔았다. 물을 뿌렸더니 펠릿이 부서지며 톱밥으로 변했다. 그 위에 건초를 깔면 작업이 끝난다.

오후 2시30분. 관리사 세 명이 밸리브리를 끌고 도핑 검사장으로 향했다. 수의사가 말 목에 주사기를 꽂은 뒤 피를 뽑았다. 갑자기 말이 날뛰기 시작했다. 수의사는 “아이가 주사 맞을 때 우는 것처럼 말도 스트레스를 받는 것”이라고 했다. 출전하는 말은 세 시간 전에 반드시 도핑 검사를 받아야 한다.

마사로 돌아온 뒤 경기가 없는 말들에게 저녁을 챙겨줬다. 새벽에 출근하는 관리사들은 보통 오후 3시가 넘으면 당직자 외엔 퇴근한다. 그러나 이날은 경주 때문에 모두 퇴근을 미뤘다. 저녁을 챙겨주고 나니 10경주 한 시간 전이다. 이때 반드시 체중 검사를 해 관객에게 알려야 한다. 관리사들과 함께 밸리브리를 끌고 체중 검사장으로 향했다. 515kg. 지난 경기 때보다 6kg 정도 빠졌다. 출발 대기 장소인 지하 마도로 향했다. 지하 마도는 관중석 아래에 있다. 관중석은 빈틈이 보이지 않았다. 관리사들은 지하 마도에서도 말에게 계속 걷기 훈련을 시켰다.

그때 한쪽에서 위그가 출전한 9경주를 지켜보던 관리사 박명규(39)씨가 환호하는 모습이 보였다. “2착이에요, 2착.” 2위를 한 것이다. 예상 밖 선전. 시작이 좋다. 밸리브리를 따라 지하 마도에서 예시장으로 나갔다. 경기 시작 전 관객이 말과 기수를 가장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곳이다. 말들 위로 쏟아지는 수만 개의 시선이 느껴졌다. 환호하는 어린이들도 눈에 띄었다. 홍보팀의 김원영(35) 대리는 “어린이날을 앞두고 가족공원과 승마체험관을 찾는 가족들이 많다”고 말했다.

예시장을 10여 분간 돈 밸리브리는 발주대로 향했다. 조교사 대기실로 가서 모니터 앞에 앉았다. ‘출발!’ 발주대가 열리자 말들이 일제히 쏟아져나왔다. 밸리브리 등에는 문세영(27) 기수가 탔다. 밸리브리를 타고 5연속 우승을 이끈 주인공이다. 문 기수는 경기 초반 3위와 4위를 유지하며 안정적으로 말을 몰았다. 3코너에 접어들며 말들이 뒤엉키자, 문 기수는 트랙 안쪽으로 말을 몰았다. 잠시 숨을 돌리나 싶더니 바깥쪽 코너를 달리던 말들이 일제히 앞으로 치고 나왔다. 밸리브리는 앞에서 달리는 말과 옆에서 치고 나가는 말 사이에 갇혀 속도를 내지 못했다. 4코너에 접어들자 서서히 5위와 6위로 뒤처졌다. “아!” 하는 우려 섞인 탄성. 그러나 결승점을 앞둔 직선 주로에 들어오자 밸리브리는 명마답게 서서히 속도를 내며 치고 나오기 시작했다. 주위 말을 하나둘 제치는 모습에 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하지만 홍 조교사는 “힘을 못 낸다”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결국 선두 자리를 빼앗지 못했다. 결과는 3위. 홍 조교사는 덤덤하게 말을 잇는다. “이길 때도 질 때도 있는 거죠. 최선을 다했으니 후회는 없어요. 사실, 말에 62kg을 지우고 달리게 하는 것은 무리가 커요. 말 어깨에도 부담이 많이 가고. 잘 달릴수록 부담중량은 늘어요. 좋은 말을 죽이는 일이죠.”

‘이색 알바’ 휘파람으로 말 소변 받기

지하 마도에서 다시 도핑 검사장으로 간다. 경주가 끝나자마자 소변 검사를 한다. 검사장에는 소변만 전문적으로 받아내는 이색 아르바이트생들이 있다. 이들은 검사장에 말을 데리고 들어가 “휘~휘~” 하고 휘파람을 분다. 물론 아무렇게 부는 것이 아니라 그들만의 요령이 있다. 신기하게도 말은 긴장을 풀고 소변을 본다. 20여 분이 지나자 밸리브리가 나왔다. 경주의 치열함이 가시지 않은 듯, 온몸의 근육과 핏줄이 팽팽하게 긴장돼 있었다. 오른쪽 뒷다리에는 다른 말발굽에 차였는지 피가 흐른다. 열심히 뛰어준 녀석을 보니 울컥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마방에 데려가 목욕을 시켰다. 따뜻한 물이 몸에 닿자 말이 귀를 움직이며 이빨을 드러내 보였다. “좋다는 표현이에요.” 박명규씨가 말했다.

물을 뿌려주다 손을 뻗쳐 단단한 근육으로 덮인 말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나지막이 “수고했다”는 말을 건넸다. 오후 6시30분. 치열한 하루 일과가 끝났다. 마사 밖에는 봄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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